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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2035] 죽음 후에만 보이는 삶

중앙일보 2021.05.31 00:20 종합 26면 지면보기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채혜선 사회2팀 기자

집에서 200m도 안 되는 거리에 있는 경기도 A 특성화고. 이 학교 교문에는 학생들의 취업 현황을 알리는 현수막이 항상 걸려 있다. ‘스마트경영과 김○○ △△기업 최종 합격’이라는 문구가 오색찬란한 배경에 적혀 있는 커다란 현수막이다. 이를 지나칠 때마다 스무 살이 되기도 전에 진로를 정한 학생들이 대견하게 느껴지고는 했다.
 
현수막에 가려진 이들의 삶을 생각해본 건 최근의 일이다. ‘학생’에서 ‘사회인’으로 직행하면서 맞는 열아홉 겨울에 대해서 말이다. 온 나라가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 관련 소식으로 떠들썩할 때다. 수험생을 위한 각종 이벤트가 쏟아진다.  
 
공고 졸업 후 중소기업에 곧장 취직했던 한 작가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입시를 준비하지 않았던 열아홉의 나는 수고하지 않았던 걸까. 열아홉 할인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허태준,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었다』)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구의역 김군’ 5주기인 지난 28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역 승강장 모습. 김경록 기자

지하철 스크린도어를 고치다 사망한 ‘구의역 김군’ 5주기인 지난 28일 오전 서울 광진구 구의역 승강장 모습. 김경록 기자

이는 사회가 지워버린 이들에 대한 이야기다. 2016년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정비하다 참변을 당한 김모(당시 19세)군도 특성화고를 졸업한 새내기 노동자였다. 그가 열차에 치여 숨진 지 지난 28일로 꼭 5년이 됐다. 교복 위에 작업복을 입고 학창 시절을 보냈을 김군을 상상한다. 어쩌면 허태준 작가처럼 열아홉 겨울을 소외감 속에서 보냈을 그의 삶을 추모한다.
 
김군의 삶은 죽음으로만 기억되기에 더욱 비통하다. 김군뿐 아니라 산업재해로 세상을 떠난 노동자의 삶이 대부분 그렇다. 2017년 특성화고 실습 도중 프레스에 눌려 숨진 이민호(당시 18세)군, 2018년 충남 태안화력발전소 설비작업을 하다 목숨을 잃은 김용균씨, 지난 4월 평택항 부두에서 작업 중 사망한 이선호씨…. 비극적인 죽음 후에야 그들의 삶이 겨우 조명된다. 이를 두고 허 작가는 “삶에 대한 이야기는 없는데,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계속해서 들려왔다”고 한탄했다.
 
한국산업안전보건공단에 따르면 지난해 산재 사고 사망자는 882명이다. 하루 2.4명이 산재로 숨지고 있지만, 세상은 김군 죽음 이후로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산업 현장의 ‘위험의 외주화’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안전을 위협받는 일은 되풀이되고 있다.
 
김군이 숨진 구의역 9-4 승강장에는 “죽어야 바뀌는 세상을 살아서 바꿔야 한다”는 쪽지가 최근 붙었다고 한다. 이대로 바뀌는 게 없다면 죽은 뒤에야 호명되는 이들에 대한 모독 아닌가. 많은 김군들이 죽음으로 남긴 숙제를 이제는 풀 때도 됐지 않나. 물음표가 빼곡하게 머리를 떠돈다.  
 
아, 일단 수십명의 이름이 나열된 특성화고 취업 현수막을 더는 기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없을 것 같다.
 
채혜선 사회2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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