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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대생 가수 김민기 “음대 형은 그림 그려야 해, 핫핫핫”

중앙선데이 2021.05.29 00:02 738호 16면 지면보기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4〉 김민기·이제하와 만남

나는 지난주에 화가 피카소가 일찍부터 시를 쓰는 친구들과 친하게 지낸 걸 부러워하면서 나도 그랬다는 식으로 내가 친했던 시인들, 강은교 김초혜 마종기 김지하 이제하 등을 댄 것까지는 좋았다. 문제는 내가 김민기 이장희 송창식 윤형주의 이름까지 거론하면서 그중에 ‘아침 이슬’을 쓴 김민기나 ‘모란동백’을 쓴 이제하는 당장이라도 노벨문학상을 탈 만한 실력가라고 큰소리를 쳤다는 점이다.  
 

난 그림, 김민기는 기타 치며 노래
첫 전시 기획하고 아리송한 추천사
“미술교육 안 받아 예술성 논의 무리”

이제하 ‘모란동백’ 자작곡 CD 보내
경상도 사투리 노랫말 탓 다시 녹음
내 장례식 땐 이 노래 불러줬으면

그런데 한가지 걱정된다. 내 글을 읽는 독자님들 중에 “뭐라구? 고작 유행가 가사 나부랭이를 쓴 친구들이 노벨문학상을 탄다구?” 하실까 봐 나의 노파심에서 2016년 미국의 유행가 가수 밥 딜런이 진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는 걸 새삼 일러두는 바이다. 그땐 나도 깜짝 놀라 ‘아니 세상에 밥 딜런이 카뮈나 사르트르나 헤밍웨이가 탄 그 노벨문학상을 탔단 말인가’ 하며, 즉시 밥 딜런이 썼다는 자서전 『바람만이 아는 대답』(문학세계사)을 구입해 읽으면서 드디어 ‘아하! 노벨 심사위원들이 나이롱뽕을 치다가 상을 준 것이 아니구나’ 싶었다.
 
김민기, 함께 무박 3일 술 마셔도 멀쩡
 
1972년 오아시스에서 나온 ‘조영남 애창곡집’. 김민기씨가 제작에 참여했다. ‘행복의 나라로’는 조영남씨와 함께 기타 연주를 했고, ‘작은별’은 ‘대사’를 맡았다.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위로가 되는 문장을 김씨 특유의 저음으로 낭송했다. [사진 성승모·김영훈]

1972년 오아시스에서 나온 ‘조영남 애창곡집’. 김민기씨가 제작에 참여했다. ‘행복의 나라로’는 조영남씨와 함께 기타 연주를 했고, ‘작은별’은 ‘대사’를 맡았다. “일이 뜻대로 안 될 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며...”. 이렇게 위로가 되는 문장을 김씨 특유의 저음으로 낭송했다. [사진 성승모·김영훈]

그런데 왜 내가 느닷없이 김민기와 이제하를 들먹이느냐. 간단하다. 그들은 죽었다 깨나도 자기들 입으로 으쓱대는 걸 못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선 셈이다.
 
나는 막 군대에 입대해서 일등병이던 시절쯤 김민기를 처음 알게 된다. TV에 출연한 걸 봤는데 빡빡머리에 양반다리를 한 채 무대 바닥에 앉아 기타를 치며 노랠 부르는 것이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알고 보니 바로 KS(경기고에 서울대)였고 당시 서울미대 회화과 학생이었다. 내가 그림을 좋아한다는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스물한 살의 청년 김민기는 “형은 그림을 그려야 해 핫핫핫” 하는 바람에 나는 군대 때 그림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김민기가 핫핫핫 요란한 소리를 낼 때는 극히 상태가 양호하다는 뜻이다.  
 
군대 때 무슨 그림이냐 하겠지만 나는 군대생활 36개월을 쭉 용산 삼각지에 있는 육군본부에서 근무했는데 누가 믿겠는가. 낮에 육본 사무실 책상에 앉아 행정사무를 볼라치면 복도를 지나는, 특히 여군들이 창문으로 시도 때도 없이 내 얼굴을 훔쳐보기 위해 기웃거렸기 때문에(믿거나 말거나 그때 나는 ‘딜라일라’를 부른 인기 짱의 현역가수였다) 중대장이 나한테 합창실이나 육군회관 같은 데 가서 일을 보고 퇴근 시간에 와서 얼굴만 비치면 된다고 해서 군대 때 나는 바짝 그림에 몰두할 수가 있었다.
 
주말이면 김민기와 함께 미아리 나의 여자친구네 집 마루에서 왼종일 음대생인 나는 그림을 그렸고 미대생인 맹갈이는 옆에서(민기는 한글의 고어식으로 ‘맹갈’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왼종일 기타를 튕기며 노래를 해댔다.  군에서 만기 제대를 하고 세계적인 기독교 부흥강사 빌리 그레이엄 쪽과의 인연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을 즈음 이미 내가 그려놓은 그림들이 제법 많아졌다. 이를 어쩌나 했는데 김민기가 이랬다.
 
‘아침 이슬’과 ‘친구’가 들어 있는 71년 ‘김민기 1집’. 100만원 선에 거래된다. [사진 성승모·김영훈]

‘아침 이슬’과 ‘친구’가 들어 있는 71년 ‘김민기 1집’. 100만원 선에 거래된다. [사진 성승모·김영훈]

“뭘 우물쭈물해 형! 전시를 하면 되지 핫핫핫.”
 
그런 전시회 기획이 맹갈의 머리에서 나온 것으로 보아 맹갈은 문화기획에 탁월한 재능을 타고난 것임에 틀림없다. 그가 ‘학전’이라는 이름의 전설적인 소극장을 운영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그림의 검증을 위해 당시 서울미대 윤명로 교수와 김차섭 화백에게 나를 끌고 간 것도 맹갈이었다. 그 두 선배들로부터 가수보다 화가로 나가는 게 어떠냐는 칭찬을 받은 것도 그때였다.
 
전시장을 잡는 것 역시 맹갈의 솜씨였다. 우리는 형식에 따라 추천의 글 같은 걸 써야 했는데 누가 가수 나부랭이의 그림에 추천서를 써주겠는가.
 
“형 그럼 까짓것 내가 쓰지 핫핫핫” 해서 쓴 게 천하의 명 추천 글로 남아 있다. 지금 읽어도 가관이다. 노벨문학상에 딱이다. 이렇게 나간다.
 
“‘조영남씨의 작품을 보고…’/ 그가 미술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비전문가라고 생각할 때 그의 작품을 놓고 어떤 고차원적인 의식상의 문제나 높은 예술성 같은 것을 논한다는 것은 매우 무리일 것이다. 아그리빠나 줄리앙의 석고 데생도 해보지 못했고 그래서 가장 기초적인 조형훈련도 쌓지 못하였으며 또 그가 저속한 유행가 가수라는 점을 보아서도….”
 
이런 식으로 쭉 나가다가 끝머리의 마무리가 절묘하게 떨어진다.
 
“그에 대한 최대의 찬사는 ‘그림이 괜찮은데, 흥 꽤 재미있어,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고 돈도 꽤 벌고 할 테니 이렇게 취미 삼아 해 보는 것도 괜찮겠지… 껄껄껄’일 것이며 ‘이제 그가 저속한 가수라는 점과 그의 치졸한 작품전에 최대의 동정을 보내는 바이다’라는 이야기들은 완전히 반대이거나 거의 다 틀린 이야기들일 것이다. 1973년 11월 10일 김맹갈.”
 
당시 우리 둘 사이에 통로는 술이었다. 나는 그가 3박 4일 연속으로 자세 한 번 흐트러지지 않고 술 마시는 모습을 쭉 보아왔다. 그런 땐 무박 3일이라고 해야 맞는다는 말뜻도 그때 알았다. 언어표현의 정확성에서는 그를 따를 자가 없는 것 같다. 사전에도 없는 노추러블럼(notroublem)이라는 트러블과 프라블럼의 교묘한 합성어도 만들어냈고, 내가 가끔 쓰는 ‘모순에 어긋난다’는 말도 그자한테서 배워둔 술어이다. 내가 미국 체류할 때 그자가 편지에 써 보낸 쌀농사 짓는 얘기는 밥 딜런의 자서전을 찜쪄먹을 정도로 흥미로웠다. 나는 그자가 만든 노래 ‘아침 이슬’을 녹음한 적이 있는데(금년이 ‘아침 이슬’이 세상에 나온 지 꼭 50년 만이라고 한다), 거기에 이어서 한대수의 노래 ‘행복의 나라로’를 조영남 김민기 둘 만의 통기타로 연주해낸 희귀한 LP판 ‘조영남 애창곡집’을 지금도 고이 간직하고 있다.
 
시인 마종기 선배로부터 얘기를 전해 들은 이제하 형은 어느 날 나에게 ‘모란동백’이란 자작곡 노래 CD를 보내왔다. 들어봤더니 참 좋았다. 내 생각에 딱 하나 문제점은 그가 원래 마산 출신이라 노랫말의 발음이 지독한 경상도 사투리였다는 점이다. 가령 ‘떠돌다’를 ‘뜨돌다’로 부른 거다. 그래서 나는 ‘모란동백’을 표준어 발음으로 불러둬야겠다는 맘을 먹고 그룹 ‘사랑과 평화’의 건반 주자였던 김명곤한테 편곡을 맡기고 녹음에 들어갔다.
 
이제하, 고교 때 쓴 시 교과서에 실려
 
커피 마시는 이제하 시인의 사진을 활용한 조영남씨의 1985년 콜라주 작품(부분). [사진 조영남]

커피 마시는 이제하 시인의 사진을 활용한 조영남씨의 1985년 콜라주 작품(부분). [사진 조영남]

노래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점도 희한한 경로를 통해서였다. 당시 MBC 라디오의 ‘싱글벙글쇼’라는 프로그램의 강석(지금은 은퇴했음)의 공적이 절대적이었다. 강석은 이 노래를 첨 듣고 좋은 노래로 판단, 계속 틀어댔기 때문이다. 2016년부터 나는 미술 대작사건으로 장기 재판 중이었는데 걸핏하면 강석이 전화를 해 “형! 이 노래 좋아, 이 노래 크게 뜰 거야. 난 이 노래가 너무 좋아”, 저녁엔 “형! 여기 노래방이야. 내가 지금 ‘모란동백’을 부르는데 ‘나 어느 벼언방에’, 이 ‘변’을 어떤 식으로 불러야 하는지 지금 형이 빨리 한 번만 불러봐 줘”, 이런 식이었다.
 
나 역시 이 노래의 가치를 높게 평가, 아예 스토리를 만들어 놨었다. 무슨 스토리냐. 제법 당위성 있는 스토리다. 강석 같은 라디오 DJ들에게 부탁하는 거다. 만약 내가 죽으면 최소한 사망 소식과 함께 사망자의 노래를 틀 것 아니냐. 그때 ‘제비’나 ‘딜라일라’ 대신 꼭 ‘모란동백’을 틀어달라. 이것이 나의 유언 같은 부탁이었다. 이런 옹색한 부탁을 하는 데는 물론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대한민국 가수증명서를 소유한 사람한테는 협회에서 정식 가수장을 치러주는 관례가 있다. 몇 년 전 황금심 대선배의 장례식이 있었다. 황금심 여사는 그 유명한 ‘타향살이’의 주인공 고복수 선배의 사모님이셨다. 물론 나는 검정 옷을 입고 참석했다. 장례식이 모두 끝나고 사회자가 마지막 순서로 선배님이 남기고 가신 ‘알뜰한 당신’을 다 함께 불러 드리고 장지로 모시자고 했다. 난 노래 제목부터 기분이 이상했다. 장례식과 안 맞는 것 같았다. 혀를 깨물며 간신히 웃음기를 참고 끝을 맺었다.  
 
누가 믿겠는가. 불과 며칠이 안 되어 고운봉 선배가 작고하셨다. 이번에도 가수장례식이라 또 참석했다. 이번에 관 앞에서 함께 부른 노래는 ‘선창’이었다. 이번에도 쉽지 않았지만 잘 참고 부를 수 있었다. 내 옆에 앉았던 코미디언 남보원 선배 때문에 사달이 났다. 헌화 줄에 서 있던, 가수협회장을 오래 하셨던 4중창단 ‘블루벨즈’의 리더셨던 박일호 선배한테 “야 일호야”, “네! 선배님”, “니네들 죽으면 니네가 불렀던 히트곡 ‘잔치잔치 벌렸네(즐거운 잔칫날)’ 그 노래 불러줄게” 하는 바람에 때아닌 웃음소리가 들리는 장례식장이 됐다.
 
집에 돌아와서 생각해보니 이게 남의 일이 아니었다. 내가 안 죽는다는 보장도 없고 내가 죽으면 가수협회에서 나의 장례식을 치러준다며 공지를 할 것 아닌가. 자! 장례식을 무사히 끝내고 사회자가 고인을 위해 장지로 모시기 전에 무슨 노래를 함께 부를 것인가. ‘제비’는 박자가 어렵고 ‘달라일라’는 영어 가사가 있는데 무슨 수로 합창을 할 수가 있는가. 천상 부르기 쉬운 ‘화개장터’의 “구경 한 번 와 보세요”, 이 노래를 부를 것 아닌가. 그런 경우를 위해서 준비해둔 노래가 있다. 바로 ‘모란동백’이다. 장례식장 노래로는 최상이다. 나는 내가 죽은 다음에 벌어질 일까지 꼼꼼히 처리하는 계획이 있는 사람이다.  
 
나는 ‘모란동백’의 작사가 작곡가, 거기에다 가창가이기도 하셨던 이제하 선배를 그가 경영했던 동숭동의 아주 많이 허름한 맥주 카페를 찾아가 인사를 드린 적이 있다. 이 글을 쓰면서 전화를 드렸더니 제주도에 가신 지 몇 년 됐다는 것이었다.  
 
이제하 선배가 마산고등학교 학생 때 쓴 시 ‘청송 그늘에 앉아’는 교과서에도 실렸을 정도로 널리 알려졌다. 이제하가 쓴 소설집 『밤의 수첩』(나남)은 밥 딜런의 자전적 얘기 못지않게 멋있다. 생뚱맞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단편 ‘밤의 창변’의 첫 문장은 이렇게 나간다.
 
“중(僧) 하나가 오토바이 뒤에 수녀 하나를 태우고 산속으로 들어간다.”
 
대박! 이 문장 한 줄로 이제하는 노벨문학상이나 아니면 예스벨문학상을 충분히 거머쥘 수 있지 않을까. 운운.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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