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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상의 퍼스펙티브]거래 질서 바로 잡는다고 도박성이 없어질까

중앙일보 2021.05.27 00:42 종합 26면 지면보기
 

혼돈의 암호화폐 투자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이현상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때로는 사실보다 서사(敍事)가 더 강력하다. 경제 현상도 예외가 아니다. 행동경제학자이자 2013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로버트 실러 미국 예일대 교수의 저작『내러티브 경제학』은 경제를 움직이는 스토리에 주목한다. 그는 이 책에서 암호화폐 현상을 '내러티브 경제'의 대표적 사례로 소개했다.

예측 불가 급변성이 혼란의 근원
각국 정부·중앙은행 부정적 기류
'20·30 탈출구' 주장에 정치권 영합
섣부른 보호가 절망을 키울 수도

 
비트코인이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를 초래한 제도권 금융에 대한 저항의 의미로 개발됐다는 낭만적 의미 부여가 내러티브의 시작이다. 디지털 신기술과 결합한 탈(脫)중앙 결제수단이 국가 기반 화폐를 대체할 수 있다는 전망이 투자자의 관심을 끌었다. 무엇보다 신기술의 가능성을 읽고 투자한 사람들이 돈방석에 올랐다는 성공담이 암호화폐 바람을 일으켰다.
 
한국 사회 암호화폐 현상에는 이런 내러티브 외에 또 하나의 강렬한 내러티브가 있다. 집값 폭등 같은 공고한 기득권 구조에 희망을 뺏긴 2030 세대가 돌파구를 암호화폐 투자에서 찾고 있다는 담론이다. 암호화폐에 부정적 입장을 비친 은성수 금융위원장을 해임하라는 '코이너'(암호화폐 투자자)들의 청와대 청원은 이런 내러티브가 빚은 소극(笑劇)이다. 은 위원장은 지난달 22일 국회에서 "(암호화폐에 대해) 국민이 많이 투자하고 관심을 갖는다고 투자자를 보호해야 한다고 생각은 안 한다"며 "잘못된 길로 간다면 잘못된 길이라고 이야기를 해야 한다"고 말해 암호화폐 투자자들의 원성을 샀다. 표를 의식한 정치권은 은성수의 말을 '꼰대 화법'으로 치부하며 '선량한 투자자 보호론'을 들고 나왔다.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이현상의 퍼스펙티브 그래픽=신용호

"잘못된 길" 은성수는 틀렸나


은성수는 무얼 잘못한 걸까. 질문에 답하기 전에 암호화폐의 성격부터 보자. 암호화폐의 정신이나 미래 가치를 말하자는 게 아니다. 투자 대상으로서의 특성을 보자는 것이다. 지금의 암호화폐 시장은 누가 봐도 도박판이다. 참여자들도 이를 모르지 않는다. 암호화폐가 미래 혁신 기술을 담는 그릇이 될 수 있다는 관점과는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도박의 성립 요건 중 핵심은 우연성이다. 2008년 대법원은 내기 골프의 도박성을 인정하면서 "우연이란 주관적으로 '당사자에 있어서 확실히 예견 또는 자유로이 지배할 수 없는 사실에 관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것'을 말한다"고 판시했다. 암호화폐 투자자들은 차트가 요동치는 이유가 뭔지도 모르고 돈을 넣고 뺀다. 지금 산 값보다 더 비싸게 사 갈 '더 큰 바보'가 있을 거라고 막연히 기대한다. 일론 머스크의 트위터 한마디, 중국 정부의 규제 소식, 미국 투자회사의 포트폴리오 편입 뉴스 등은 우연의 사건일 뿐이다. 주식 투자에도 우연성이 없다고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기업 가치가 투자의 바탕이 된다는 점이 암호화폐와는 다르다.

 
은성수는 "암호화폐가 (제도권에) 안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라고 말했다. 국가 보증 화폐 체제의 수호자 격인 금융위원장으로선 어쩌면 당연한 입장이다. 암호화폐 제도화가 기존 화폐의 지위를 약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우려를 기득권자의 꼰대 정신 혹은 관료의 나태함으로 간단히 매도해버릴 수 있을까.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업비트 라운지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오전 서울 강남구 업비트 라운지 전광판에 비트코인 등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투자자 반발에 책임 미룬 정부


그러나 암호화폐 투자를 '잘못된 길'로 간단하게 매도하기엔 현실이 복잡하다. 하루 수십조원에 이르는 암호화폐 거래액에서 보듯 판이 너무 커져 버렸다. 거래소에서 벌어지는 사기·시세조작 같은 불법·부정 행위는 커다란 사회문제가 됐다. 정부의 잘못은 우물쭈물하면서 사태를 방기한 것이다. 암호화폐에 제도의 보호막을 입히자니 기존 화폐의 독점권이 흔들리고, 규제하자니 '2030의 희망을 뺏는다'는 내러티브가 너무 강력했다. 3년 전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이 거래소 폐쇄 운운했다가 투자자들의 반발에 밀려 후퇴한 이후, 정부는 사실상 수수방관했다. 그 사이 거래소가 200개 넘게 난립하는 등 시장이 어지러워졌다. 코로나19 이후 금융 유동성 확대로 암호화폐 값이 뛰면서 다시 발등의 불이 됐다.
 
정부가 미적대는 사이 정치권이 먼저 나섰다. 특히 4·7 재·보선에서 나타난 20·30세대의 이탈에 위기감을 느낀 여당이 더 적극적이다. 개인 투자자들의 압력에 휘둘렸던 주식 공매도 논란과 비슷한 양상이다. 국회에서 거론되는 암호화폐 제도화는 투자자 보호에 방점을 찍는다. 가상자산업을 하려면 금융위원회에 신고하거나 인가받도록 하고, 거래 사기 및 불공정 행위를 규제하는 내용이다.

 
혼란한 시장 질서를 바로잡고, 선의의 피해자를 보호하려는 의도 자체는 평가할 만하다. 당국의 무관심과 감시 소홀 속에서 작전 세력이 판을 치는 현실은 바로잡아야 한다. 그러나 암호화폐 투자를 마치 주식투자나 금융투자 수준으로 보호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법안 중에는 암호화폐 거래소가 불공정 거래 행위를 상시 모니터링하게 한다거나, 가상자산 이용자를 위한 보험 계약을 의무화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현재 당국의 금융 감독 시스템, 암호화폐 거래소 규모와 인력 등을 생각했을 때 현실성이 있는지도 의심스럽다.

 
국가 화폐 권력을 이길 수 있을까


암호화폐 투자에 대한 정치권의 이런 접근법이 젊은 층에 대한 공감의 표현일 수는 있다. 그러나 집값·취업난에 절망한 젊은이들이 암호화폐에서 출구를 찾는다는 내러티브는 과연 문제가 없는 걸까. 무엇보다 암호화폐가 이들의 출구가 될 수 있나. 글로벌 금융 유동성 잔치가 끝나 가면서 암호화폐 투자의 불확실성 그림자도 짙어졌다. 최근 보름 사이 암호화폐의 글로벌 시가총액은 1000조원 가량 사라졌다. 출구는커녕 막다른 골목이 될 가능성이 커졌다.
 
각국 정부는 암호화폐 규제에 팔을 걷어붙였다. 미국에서는 1만 달러 이상의 거래에 대해선 신고를 의무화했다. 중국은 암호화폐 거래를 아예 금지하는 한편 채굴장 폐쇄에까지 나섰다. 유럽연합(EU)도 2024년을 목표로 디지털 자산에 대한 포괄적 규제를 준비하고 있다. 터키와 인도 역시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대대적 규제를 추진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서울 강남구 업비트 라운지 전광판에 비트코인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 강남구 업비트 라운지 전광판에 비트코인 시세가 표시되고 있다. [연합뉴스]

해외발 변수는 어떻게 할 건가


정부는 암호화폐를 '가상자산'으로 정의하고 사업자에게 자금세탁 방지 의무를 지우는 '특정금융정보법'(특금법) 개정안을 지난달 25일부터 시행했다. 개정안에 따라 암호화폐 거래소는 오는 9월 24일까지 신고를 마쳐야 한다. 은행을 통한 실명계좌 개설 확인을 거쳐야 하는데 중소 규모 거래소는 이 문턱을 넘기가 쉽지 않다. KB·하나·우리은행 등은 암호화폐 거래소와 실명계좌 발급 계약을 하지 않기로 했다. 이 때문에 투자자의 혼란이 불가피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일각에서는 박상기 전 법무부 장관의 거래소 폐쇄 발언 후폭풍에서 보듯 정부가 거래소 폐쇄를 강행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 나온다. 내년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투자자의 반발에 부담을 느낀 정치권이 개입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그러나 어설픈 투자자 보호는 부작용만 키울 뿐이다. 현재 암호화폐 거래의 사회적 혼란이 과연 사기나 시세조작 같은 불법행위에서만 비롯된 건지 따져봐야 한다. 이보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도박성 짙은 가격 급변이 아닌가. 국내에서 아무리 거래 질서를 바로잡는들 전 세계에서 24시간 거래되는 시장의 변수를 어쩌겠는가. 가령, 암호화폐 시장을 뒤흔드는 일론 머스크의 입을 국내법으로 다물게 할 수 있는가.

 
코인 투자를 '좌절한 젊은 세대의 탈출구'라는 내러티브와 이 내러티브에 기반을 둔 포퓰리스트적 접근은 자칫 결과적으로 이들의 절망을 더 키울 수 있다. 물론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의 기회를 좁힌 점은 통렬하게 반성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에게 도박판을 깔아줄 수는 없다. 젊은 세대의 고통에 영합하는 대신 '아닌 건 아니다'라고 용기 있게 경고하는 것 또한 기성세대의 책임이다.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돼 있다'는 말이 또 한 번 유효한 건 아닌지 걱정스럽다.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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