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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호치키스의 부드러운 터치감, 내돈 2만원 뽑고도 남았다

중앙일보 2021.05.26 14:00

[더,오래] 한재동의 남자도 쇼핑을 좋아해(39)

 
드라마나 영화 속 주인공이 일하는 장면은 하나같이 멋지다. 비루한 내 밥벌이와 비교하면 SF 영화를 보는 것 같다. 스크린 속의 사무실은 하나같이 깔끔하고 화려하며, 직원들은 복도를 뛰어다니고 열정적으로 키보드를 두들기고 있다.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회의를 하거나 오글거리는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장면으로 마무리되기 일쑤다. 나만 그런 건지 모르겠는데, 십여 년간의 직장생활을 하면서 단 한 번도 그런 장면을 본 적이 없다.
 

TV 속 직장생활은 SF 판타지를 보는 것 같다. [사진 unsplash]

 
브라운관 속 직장생활이 판타지라는 가장 큰 증거는 바로 주인공이 스테이플러를 쓰는 장면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전자결재 등 업무 자동화와 온라인 협업 툴을 사용하는 시대에 무슨 스테이플러냐고 할 수 있지만, 아직 A4용지와 스테이플러 등 사무용품 없는 사무실은 상상할 수 없다. 직장인은 하루의 절반을 사무실 자리에서 보내게 되는데, 침구만큼이나 손길이 많이 가는 것이 사무용품이다.
 
사실 사무용품을 내 돈 주고 사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다. 보통 회사에서는 기본적인 사무용품을 갖춰 놓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필요한 사무용품은 총무과에 신청하거나 부서에 배당된 사무용품 비용으로 구매하기도 한다. 하지만 오늘 소개하고자 하는 사무용품은 회삿돈이 아니라 내 돈을 주고 산 것이다.
 
바로 스테이플러다. 호치키스라고 불리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호치키스는 미국의 상표명에서 유래된 콩글리시이고 스테이플러가 맞는 표현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회사에서 스테이플러를 이렇게나 많이 쓰는지 몰랐다. 영화 ‘광식이 동생 광태’에서 스테이플러 심 한 상자에 5000개가 들었고, 한번 사면 죽을 때까지 다시 살 일 없다는 대사가 나온다. 물론 집에서만 쓴다라는 전제가 있다. 그러나 회사에서의 스테이플러는 사용량은 상상 이상이다. 신입사원 시절 회의자료 취합을 담당했는데, 새로 채운 스테이플러 심을 한 번에 다 쓰기도 했다.
 
어디서 굴러다니던 오래된 스테이플러를 사용했는데, 뻑뻑해 손목에 힘을 잔뜩 줘야만 간신히 작동하고 걸핏하면 심이 막히기 일쑤였다. 그러다 임원실의 스테이플러를 써보게 되었는데, 이렇게나 부드러울 수가! 모든 것이 고급인 임원실의 스테이플러답게 정말 힘이 1도 들어가지 않았는데 너무나 완벽하게 찍혔다. 바로 사무용품점에 가서 같은 스테이플러를 찾았다.
 
10년 가까이 내 손목을 지켜준 스테이플러계의 명품. [사진 한재동]

10년 가까이 내 손목을 지켜준 스테이플러계의 명품. [사진 한재동]

 
이만 원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무슨 스테이플러가 이렇게 비싸지? 회사에서만 쓰는 건데 내 돈 들여 살 필요가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루 평균 5번 정도를 사용한다고 치면, 주 5일에 52주를 곱해보자. 일 년에 1300번가량 쓰게 된다. 일 년만 일할 건 아니니까 5년이라고 쳐도 6000번이 넘는다. 이만 원에 6000번의 부드러운 터치감을 살 수 있다는 거다.
 
내가 사장이라고 하면 스테이플러 제 돈 주고 사는 직원을 이뻐할 것 같다. 우리 사장님이 날 이뻐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만 원 주고 스테이플러를 샀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처음에는 누가 가져갈까 봐 서랍에 두고 쓰기도 했다. 나중에는 누군가 회의자료 준비하는 걸 보면 손들고 나서 스테이플러로 서류를 마구 찍어주었다. 직원들이 물어보면 부끄러움 없이 스테이플러계의 샤넬이라며 자랑까지 했고, 회사를 옮길 때도 탐내는 후배를 물리치고 챙겨왔다.
 
실과 바늘처럼 스테이플러에는 늘 곁에 있어야 하는 환상의 짝꿍이 있다. 바로 제침기다. 사실 없어도 큰 상관은 없으나, 생각보다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해야 하는 상황은 자주 발생한다. 이미 철 된 서류 중 일부를 수정해서 교체해야 하거나, 복사나 스캔 등을 하려면 스테이플러 심을 제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제침기가 없으면 손으로도 충분히 가능하지만, 심에 손가락을 찔리거나 종이가 찢어지는 상황이 벌어지면 작은 일이지만 짜증이 난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 일 많은 밥벌인데 작은 스테이플러 침까지 짜증 유발하면 안 되니 제침기를 추천한다.
 
제침기는 여러 형태가 있는데 대표적으로 집게형, 펜형, 슬라이딩형으로 나뉜다. 사실 성능은 다 비슷비슷한 것 같고 이왕이면 자기 손에 맞는 것을 사길 추천한다. 나는 집게형을 쓰고 있는데, 심을 제거할 때마다 영화 ‘가위손’의 에드워드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하지만 집게형은 종이를 자주 찢어먹는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유의하기 바란다.
 

밥벌이의 짜증남을 덜어줄 제침기. [사진 한재동]

 
이 글을 쓰면서 사무용품들 대부분이 한자어나 외래어로 많이 쓰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제침기는 한자어이고, 스테이플 리무버라는 외래어로도 널리 쓰인다. 스테이플러는 외래어이다. 국립국어원에서는 스테이플러를 ‘찍개’라는 말로 순화를 유도하지만 영 어색하다. 재미있는 줄임말이나 신조어를 만들어 쓰는 Z세대가 회사에 들어오기 시작했는데, 재치 있는 후배분이 나서서 재미있는 용어로 다 바꿔주었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재미없는 회사생활에 그런 재미라도 있도록 말이다.
 
직장인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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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재동 한재동 직장인 필진

[한재동의 남자도 쇼핑을 좋아해] '이제부터 쇼핑을 잘해야지!'라고 다짐하면 쇼핑을 잘할 수 있을까? 알고 보니 쇼핑에도 공부가 필요하더라. 쇼핑! 하면 비싼 명품 백을 사려고 줄을 서는 부정적 이미지를 떠올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집 앞 편의점에서 간단한 먹을거리를 사는 것도 쇼핑이다. 그렇다면 ‘쇼핑을 잘한다’라는 건 무슨 의미일까?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파악하고, 그것을 가장 효율적으로 구매하는 것으로 정의하고자 한다. 앞으로 이어질 이야기는 곧 불혹 직장인의 개인적 경험을 바탕으로 한 쇼핑 경험담이다. 거창한 명품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평범한 사람들이 즐기는 패션과 생활용품에 집중되어 있음을 미리 양해 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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