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서부개척 시대 카우보이를 백수로 만든 냉장 열차

중앙일보 2021.05.25 10:00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24)

 
“냉장고 없던 시절 신선한 고기를 구하는 방법은?”
 
저온유통체계가 없던 시절 도시인은 어떻게 쇠고기를 먹었을까. 아마 시장에서 샀을 거라고 쉽게 답할 것이다. 그렇다. 시장에서 가축을 도살한 뒤 생고기를 판매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시장에서는 소를 어떻게 구했을까? 도시에서 소를 키웠을까? 많은 소를 어떻게 공급했을까? 지금처럼 도매업체가 있었을까.
 
어렸을 적 나는 미국 프로농구인 NBA를 즐겨봤는데, 가장 좋아하는 팀은 단연 마이클 조던이 뛰는 시카고 불스였다. 나는 그때 왜 팀의 상징이 황소였는지 몰랐다. 황소처럼 저돌적으로 뛰라는 의미로 붙였겠거니 추측할 정도였다. 그보다 중요한 건 시카고 불스는 정의를 위해 싸우는 팀이고, 나머지 팀들은 내겐 모두 악당이었다는 점이다. 시카고가 미국 정육 산업의 심장부였다는 사실은 한참 뒤에야 알게 되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의 '황야의 무법자' 같은 서부영화에 등장하는 카우보이가 소몰이꾼이라는 사실도 알지 못했다. 나에게 카우보이는 그저 시가 담배를 물고 온갖 폼을 잡는 총잡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방목식으로 소떼를 몰고 도시까지 장거리 이동하던 카우보이들은, 남북전쟁 이후 1880년대부터 철도가 본격적으로 화물 운송을 시작하자 소떼를 열차에 싣고 산 채로 도시로 보내는 작업을 했다. 철도 승무원 대신 카우보이가 열차에 탑승했다. 이 때문에 서부영화에서 카우보이가 도적 떼들과 열차에서 총질하는 장면이 자주 등장하는 것이다.
 
광활한 미국 중서부지역을 쉬지 않고 달렸을 냉장 열차. [사진 Wikimedia Commons]

광활한 미국 중서부지역을 쉬지 않고 달렸을 냉장 열차. [사진 Wikimedia Commons]

 
미국의 서부개척 시대를 살펴보니 위의 질문에 대한 답이 나왔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집에서 신선한 쇠고기를 먹기 위해서는 소를 목초지나 대평원에서 도시까지 끌고 가야 했다. 철길이 개통되면서 열차를 이용했지만, 더 먼 과거에는 가축이 직접 걸어가게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후 냉장 기술의 발전에 따라, 도시의 정육업자는 냉장 열차를 이용하기 시작했다. 냉장 열차의 등장으로 육가공 산업도 발전했다. 살아있는 ‘소’를 이동시키는 대신 부위별로 해체한 ‘쇠고기’를 전국으로 배송하게 되었다. 도축과 포장시설이 갖춰진 정육회사에서 비로소 전국으로 교역할 수 있는 상품이 만들어진 것이다. 효율적으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는 시스템이 생겼으니 카우보이의 역할은 거기까지였다.
 
철도가 개통되면서 교통의 요충지가 된 시카고는 미국 정육 산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도축과 포장 시설이 일원화되고 공정은 체계화되었다. 그리고 그 배경에 저온유통체계라는 구조가 있기에 가능했다. 그중에서도 1879년 구스타부스 프랭클린 스위프트(1839~1903)가 개발한 냉장 열차는 이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도축한 고기는 부위별로 해체되어 상하기 전에 전국으로 배송되었다.
 
1947년 유니언 스톡 야드 전경. [사진 Wikimedia Commons]

1947년 유니언 스톡 야드 전경. [사진 Wikimedia Commons]

 
유니언 스톡 야드라는 거대한 도축장에서는 1874년 2만여 마리의 소를 도축했으나 1890년에는 그 숫자가 220여만 마리로 늘어났다. 냉장 열차의 덕택으로 전국 유통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살아 있는 소를 열차로 운반하는 물량은 36만 톤(1882년)에서 28만 톤(1886년)으로 감소했고, 반면 냉장 열차에 실은 포장된 쇠고기는 2600톤에서 69만 톤으로 급증했다. 당시 한 해에만 정육업체에서 사용한 얼음은 무려 150만 톤의 양이었다고 한다.
 
미국의 ‘자동차 왕’ 헨리 포드가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착안한 곳이 시카고의 유니언 스톡 야드였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일화이다. 소를 도살하고, 절단하고, 손질하고, 세척하고, 포장하기까지 모든 공정은 획기적이었다. 그러나 노동자의 처지에서는 열악한 환경일 수밖에 없었다. 가축의 비명이 난무하고, 코를 찌르는 듯한 악취가 몰려오고, 동물의 피가 연못처럼 고이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대부분 저임금의 이주 노동자가 공장의 자리를 메꾸었다.
 
소 도축 장면 (유니언 스톡 야드, 1906~1910). [사진 Library of Congress]

소 도축 장면 (유니언 스톡 야드, 1906~1910). [사진 Library of Congress]

 
노동자들은 매뉴얼에 따라 각자의 분업화한 작업만 반복적으로 수행했다. 도축 과정도 부분적으로 기계화하면서 가축의 살생에서 겪는 정신적인 고통도 줄어들게 되었다. 어쩌면 노동자 자신도 도축장의 한 부품처럼 수동적으로 같은 동작만 반복했는지도 모른다. 고기를 손질하는 사람도, 그것을 구매하는 소비자도 이제 쇠고기는 깔끔하게 패킹된 상품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심효윤 심효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필진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 아시아 지역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그들의 삶과 문화를 관찰한다. 부엌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냉장고 프로젝트>와 전통지식 및 무형문화유산을 기록하는 <위대한 유산 아시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