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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권 인사 안 넘기면 격추” 민항기 강제착륙 시킨 독재자

중앙일보 2021.05.25 00:03 종합 16면 지면보기
27년째 집권 중인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 [AP=연합뉴스]

27년째 집권 중인 벨라루스 루카셴코 대통령. [AP=연합뉴스]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초상화가 지난해 9월 동유럽 벨라루스의 수도 민스크에 등장했다. 광장을 가득 채운 반정부 시위대의 손에 들린 초상화는 사실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67)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사진을 합성한 이미지였다. 1994년 집권한 뒤 각종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 내리 6선을 해온 루카셴코를 김 위원장과 동일시하며 비판하는 메시지였다.
 

27년째 집권 벨라루스 루카셴코
이웃나라 가던 아일랜드 비행기
전투기 출격시켜 위협, 거센 역풍
장남 권력세습 ‘유럽의 북한’ 불려

지난 23일(현지시간) 루카셴코가 자신에 반대하는 야권 언론인을 체포하기 위해 민항기를 강제 착륙시키면서 비판이 일파만파 번지고 있다. 루카셴코 정권이 체포한 야권 언론인은 로만 프로타세비치. 익명성이 비교적 잘 보장되는 메신저인 텔레그램에서 반(反) 루카셴코 채널인 넥스타 라이브(Nexta Live)를 개설, 운영해온 인물이다. 대선 전후로 이 채널을 통해 반대 세력이 결집하고, 하루에 수백개의 메시지가 공유됐다. 루카셴코에겐 눈엣가시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지난 23일 미그-29 전투기로 격추 위협해 강제 착륙시킨 라이언에어의 항공기. [AP=연합뉴스]

루카셴코 대통령이 지난 23일 미그-29 전투기로 격추 위협해 강제 착륙시킨 라이언에어의 항공기. [AP=연합뉴스]

민항기 강제 착륙은 루카셴코가 프로타세비치를 잡기에 얼마나 혈안이 되어 있었는지를 드러낸다. 프로타세비치가 타고 있던 항공기는 아일랜드 소속 저가항공사 라이언에어(Ryan Air)로 그리스 아테네를 출발, 벨라루스 이웃 국가인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향하던 중이었다. 약 170명, 12개국 국적의 승객이 탑승한 이 민항기를 루카셴코 측이 강제로 착륙시킨 것이다.
 
이를 위해 전투기까지 출격시켜 민스크 공항에 비상착륙하지 않을 경우 격추하겠다고 협박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야권 인사인 파벨라투슈코 전 문화부 장관이 외신에 “민스크 공항 관제센터가 (비상착륙을 요구하며) 여객기 격추를 위협했고, 이를 위해 미그-29 전투기를 출격시켰다는 정보가 있다”고 말하면서다.
 
북한 김정은과 루카셴코를 합성한 이미지를 들고 시위 중인 벨라루스 시민들. [AFP=연합뉴스]

북한 김정은과 루카셴코를 합성한 이미지를 들고 시위 중인 벨라루스 시민들. [AFP=연합뉴스]

이번 강제 착륙 사건으로 루카셴코는 역풍을 단단히 맞고 있다. 이전에도 미국·유럽연합(EU)·캐나다 등은 루카셴코를 벨라루스의 대통령으로 인정하지 않거나, 제재를 가하고 있었다. 이번 사건으로 EU 내 반 루카셴코 분위기는 강력 확산 중이다. 미국도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명의 성명을 내고 “미국 시민을 포함한 승객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린 충격적 행위”라며 “EU·리투아니아·그리스 정부 관계자와 협력하고 있으며 조사를 위한 국제민간항공기구(ICAO) 위원회의 조속한 개최를 바란다”고 밝혔다.
 
벨라루스는 ‘유럽의 북한’이라고 불린다. 구 소비에트연방(소련) 붕괴 후 독립한 94년부터 루카셴코가 권좌에서 내려오지 않고 있는 데다 장남에게 정권을 이양하겠다는 의지를 공고히 하는 등 사실상 독재 국가가 됐기 때문이다. 루카셴코는 지난해 여섯 번째 취임식을 기습적으로 강행했다. 27년째 집권이다. 게다가 장남인 빅토르(47)를 후계자로 삼고 권력 이양을 위한 준비까지 마쳤다. 정부 내 국가안보위원회라는 조직을 만들고 “유사시 위원장이 국정을 맡는다”고 적시하면서다. 이 위원회를 사실상 장악한 인물이 빅토르다.
 
루카셴코의 어린 시절은 다소 평범했다. 벨라루스가 소련의 일부였던 시기 성장기를 보낸 그는 농업학교 등에서 공부했고, 국영농장 관리인 등으로 일했다. 그러다 군대에 들어가 두각을 드러냈고, 94년 벨라루스가 독립하면서 권좌에 올라 지금까지 군림하고 있다. 유럽권에서 거의 유일하게 그와 외교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은 러시아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 정도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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