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영남 "'TV는 사랑을 싣고' 첫사랑 찾으려 PD 꼬신 프로그램"

중앙일보 2021.05.22 00:10

[조영남 남기고 싶은 이야기] 예스터데이 〈13〉 풋사랑

젊은 시절의 강은교 시인.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라는 구절의 서정시 ‘사랑법’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중앙포토]

젊은 시절의 강은교 시인.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라는 구절의 서정시 ‘사랑법’으로 대중적인 사랑을 받았다. [중앙포토]

내가 잠자고 일어나는 나의 안방에는 수십 점의 사진이 걸려 있다. 사진을 그대로 걸어놓은 것도 있고, 사진으로 만든 콜라주(사진과 그림을 섞는 기법) 작품도 걸려 있다. 그중에는 아주 오래 걸려 있는, 사진과 그림을 합성한 콜라주 작품이 하나 있다. 남녀공학이었던 시골 삽교 중학에 다닐 때 탁구 동아리 멤버 중 한 명이었던 성희영(가명) 사진이다. 그 사진을 보면 알지만 남다른 데가 있다. 밭농사 일을 안 해서였을까. 옛날에도 얼굴빛이 늘 하얬다. 그래서 병이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공부도 썩 잘했다. 그쪽 반에선 단연 톱이었다. 탁구 동아리에는 우리 3학년 남학생과 공교롭게도 한 학년 아래의 여학생 몇 명만 속해 있었다. 방과 후 우린 탁구실에 모여 어둑해질 때까지 함께 탁구를 치는 게 그룹 활동의 전부였다.  우리는 시골학교여서 그랬는지 남녀 간에 좋아하는 속마음이 있어도 “나는 네가 좋다”라거나 “우리 사귀자” 이런 말은 엄두도 못 냈다. 그러다가 아버지가 병석에 눕는 바람에 나는 서울에 사는 큰 누나 집으로 밀려가게 되었는데, 잘 모르겠다. 우리 동아리 멤버가 이별 기념으로 사진 한 장씩을 교환했는지 그게 확실치 않은데 하여간 희영이 사진이 한장 남아 나는 그걸 그대로 간직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을 아예 미술작품을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희영이 사진은 늘 이사갈 때마다 식당이나 나의 안방 벽에 붙여 놓았기 때문에 그 옛날 KBS의 김재현 PD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가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구냐고 묻고 대답하던 중 문득 “이것으로 아예 TV 프로그램을 만듭시다” 해서 만든 TV 프로가 바로 지금의 ‘TV는 사랑을 싣고’다. 
 

중학 선생님, 사촌동생 만남 주선
난생처음 전화 건 상대가 강은교
‘연세춘추’ 보고 시 쓰는 것 알게 돼

중학 탁구 동아리 후배 사진 본 PD
‘TV는 사랑을 싣고’ 프로그램 제안

동아리 후배, TV 나오길 꺼려 상봉 무산
 
첫 프로에 내가 수십 년 전에 가까웠던 희영이를 찾아 나선 건데 금방 찾긴 했다. 대전 근처 어느 중학교 선생으로 근무하고 있다는 걸 알아냈다. 그녀는 같은 직종의 남자와 결혼해서 아이들까지 있다고 하면서 TV에 나오는 걸 극구 사양해 성희영과의 상봉은 사실상 무산되었다.
 
나는 햇수로 무려 48년간이나 성희영의 사진작품을 끼고 산 셈이다.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성희영의 얼굴 작품을 보면 내가 순식간에 청소년 시대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고 또 내가 생애 최초로 좋아했던 여자가 저토록 아름다운 소녀였다는 생각이 나를 스스로 흐뭇하게 만든다. 손목 한 번 잡지 못했지만 평생 잊지 못하는 나의 첫 풋사랑 느낌이 물씬 든다는 얘기다.
 
조영남씨와 김민기씨. 1970년대 초반 사진이다. [사진 조영남]

조영남씨와 김민기씨. 1970년대 초반 사진이다. [사진 조영남]

이쯤 되면 독자님께선 대번에 “그런 식이라면 지금까지 도대체 몇 명의 여자와 인연이 있었던 것이냐” 물으실 것이고 나는 또 이렇게 떳떳이 대답할 수가 있다. “이래저래 합해 두 번 결혼, 두 번 이혼을 포함하면 얼추 피카소만큼은 되지 않것시유?”
 
그럼 성희영 다음은 누구냐. 바로 대답하겠다. “네, 두 번째 풋사랑은 강은교입니다.” “뭐라구? 현재 우리나라 최대의 여성시인 그 강은교란 말이냐. 점입가경이구나! 정녕 시인 강은교가 너의 옛날 풋사랑이었다구? 너 또 명예훼손으로 고발당하려고 그러느냐?” “지난 재판 때는 감옥 근처까지만 가봤지만 이번 일로는 감옥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서 순순히 진술해 보거라.”
 
성희영 시절로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 삽교중학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병석에 눕게 되자 나는 서울로 밀려 올라가는 신세가 되었을 때 평소 나를 제자 이상으로 살뜰하게 대해주셨던 강연희 영어 선생님이 쪽지 한장을 건네주며 나한테 길게 설명했다.
 
“너 이번에 서울 가면 얘를 꼭 만나봐라! 이름은 강은교, 내 사촌 여동생인데 작년 경기여중에 수석 입학했어. 예쁘고 착한 아이란다. 그런데 은교가 나폴레옹을 숭배한데요. 네가 그림을 잘 그리니까 나폴레옹을 크게 그려서 은교한테 전해줬으면 좋겠어.”
 
그리하여 나는 강은교의 서울 주소와 전화번호가 적힌 쪽지를 들고 고등학교를 다니기 위해 서울에 올라왔다. 물론 나의 괴나리봇짐 속에는 성희영의 증명사진과 제법 크게 그린 나폴레옹의 초상화 작품이 곱게 들어 있었다.
 
나는 영옥이 큰 누나가 경영하던 을지로 6가 수구문 근처 조그마한 약방에 기거하면서 우선 서울 말씨와 전화 거는 방법부터 배웠다. 그리하여 내 생애 최초로 전화를 건 상대가 바로 강은교였다. 내 생애 최초 기계 문명 접선 상대가 바로 강은교다.
 
달달 떨리는 손가락 끝으로 전화기를 돌렸다. 저쪽에서 받는 것 같았다. 나는 침착하게 연습해둔 대사를 읊었다.
 
“저는 삽다리 강연희 선생님이 보내서 올라온 조영남입니다.”
 
나의 떨리는 목소리에 저쪽에선 뜻밖에도 “네에, 아! 저, 어쩌나…”, 우물쭈물하다 전화가 끊겼다.
 
반갑다, 만나자, 나폴레옹 어쩌구 할 새도 없이 그렇게 됐다. 나는 차마 다시 걸 용기가 안 났다. 그리고 바로 잊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는 용문고등학교를 거쳐 한양음대생이 되었고 내가 지휘를 했던 동신교회 학생 성가대원 중에 경기여고 학생이 몇 명 있는 것을 보고 어느 날 문득 묻는다.
 
“야! 니네들 혹시 강은교 모르냐?”
 
애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알아. 은교 걔 우리 반 반장이야.”
 
“그럼 다음 주에 내 이름 대고 한 번 데리고 와봐!”
 
이렇게 해서 4년 만에 나는 강은교와 실제로 첫 만남을 갖게 된다. 눈이 부리부리하게 컸다는 것과 어른스런 영민함으로 분위기를 제압한다는 것이 내 뇌리에 남아 있는 그녀에 대한 첫인상이다.
 
그후 강은교는 얼마간 동신교회에 나왔고 예배가 끝나면 은교가 사는 혜화동까지 걸어가 꺾어져 들어가는 골목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왜 그랬는지 그녀의 집엔 한 번도 못 가봤다. 어떤 땐 내가 로터리 한켠에 있던 빵집에서 기다리면 은교가 특이하게 큰 보폭의 걸음걸이로 나오기도 했다.
 
은교는 분명 여고생이었는데 대학생인 내가 듣기에도 어려운 얘기를 많이 했다.
 
지난해 11월 김동길씨 자택을 찾아간 조영남씨.

지난해 11월 김동길씨 자택을 찾아간 조영남씨.

나는 그때 첨으로 철학자 니체에 대한 얘기나 모든 사물에는 영혼이 들어 있다는 범신론 같은 얘기도 들었다. 나는 사실 미학적으로 머리를 길게 길러 양 갈래로 땋을 수 있고 하얀 옷깃 칼라가 맵시 나는 이화여고를 좋아했는데 은교는 천상 아무리 추워도 오버코트를 못 입게 했던 전형적인 경기여고 타입이었다.
 
나는 아버지가 이미 반신불수이신 걸 한 번도 말 안 했는데 은교는 자주 아버지(독립운동가로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고 체신부장관을 지낸 춘산 강인택)의 노환을 세상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며 걱정하곤 했다.
 
어느 해 눈이 펄펄 내리는 일요일 은교 친구들한테 “은교 아버지 돌아가셨어”라는 소릴 듣게 된다.
 
나는 속으로 “음, 그래서 교회엘 안 나왔구나” 생각했다. 그리곤 또 잊었다.
 
또 세월은 껑충 뛰어 나는 서울음대로 옮겼고 음대 연극반에 끼어 정신없이 왔다 갔다 할 때쯤 우리는 연극 코치로 연세대 재학 중이던 오태석과 정하연을 초빙한다(오태석이 대한민국 연극계에 우뚝 선 것과 정하연이 TV 드라마 작가로 유명해진 걸 보면 우리의 연극반 문호근과 이건용의 예지력이 얼마나 예리했던가를 여실히 보여주고 남는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정하연이 들고 있던 ‘연세춘추’라는 두툼한 대학 학회지 첫 장을 무심코 넘기다가 추천서 같은 것이 있어 들여다봤는데 어라! 작자의 이름이 바로 강은교(姜恩喬)가 아닌가. 시 제목은 ‘순교자’인가 그랬다.
 
나는 정하연한테 이러이러한 강은교 맞냐고 물었더니 바로 내가 알던 강은교였다. 내가 ‘딜라일라’로 유명한 가수가 되었을 때 이미 강은교는 여러 개의 상을 받으며 여성 시인으로 우뚝 서게 된 거다. 그때 나는 강은교가 같은 업종으로 시를 쓰는 남자와 결혼했다는 얘기도 들었다. 나는 그동안 어느 여성 시인이 임신과 함께 무슨 병으로 사경을 헤맨다는 뉴스를 얼핏 듣긴 했는데 그게 내가 아는 경기여고 강은교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거다.
 
김초혜·문정희·마종기 시인 등과 교유
 
당시에 퍼졌던 소문대로 강은교는 안 좋은 상태에서 결정적인 수술을 받게 되었다며 지금 명동 성모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얘기를 듣고 나는 정하연을 앞세워 병원을 찾아가 강은교를 만나보게 되었다. 병실에 들어서자 온통 붕대로 머리 부분을 휘감은 강은교가 빙긋이 웃으며 나를 반갑게 맞아 주었고 옆에 있던 남편분과도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그녀가 마침 죽을 먹고 싶다기에 정하연과 나는 냄비에 든 죽을 밀어 넣고 병원을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또 세월이 흘러 LA 교외에 살고 계신 강연희 선생님 댁을 방문해 옛 얘기들을 나누며 강은교가 지금은 몸이 완쾌되어 부산 쪽의 동아대학 교수로 있다는 소식도 들었다.
 
우리는 뜬금 없이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혜화동’이라는 시(詩)도 직접 받아 읽었다. ‘혜화동’이라는 시를 노래로 만들겠다는 나의 약속은 지켜지지 못하고 있다.
 
나는 피카소가 늘 부러웠다. 그림 그리는 재능은 물론 부러웠지만 그보다는 일찍부터 그가 늘 시인들과 교제를 트며 산 것이 특히 부러웠다. 막스 쟈코브, 아폴리네르, 장 콕토 등과 교제를 튼 것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 어설픈 풋사랑 얘기를 쓰면서 깨닫게 됐다. 나도 남부럽지 않게 시인들과 교제를 트고 살았다는 점이다. 한국 최고봉의 강은교 시인은 중학교 선생님의 배려로 열다섯 무렵에 알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뿐 아니다. 나는 ‘사랑굿’의 김초혜(소설가 조정래의 부인)라는 이름의 여성시인과도 일찍부터 가깝게 되었고, 여성 시인 문정희 여사와는 한 아파트에 살기도 했다. ‘아침 이슬’을 쓴 김민기(우리 김민기의 시는 노벨문학상을 탄 밥 딜런을 무색케 한다), ‘우리는’을 쓴 송창식, ‘두 개의 작은 별’을 쓴 윤형주, ‘나 그대에게 모두 드리리’의 이장희, ‘황톳길’의 김지하 선배와도 가까웠고 누구나 다 아는 마종기 시인과도 인연을 갖고, ‘모란 동백’을 쓴 이제하 시인,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시를 암송하고 계신 김동길 선생님까지 가까이 할 수 있었으니 나는 피카소 부럽지 않게 생겼다.  〈계속〉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