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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에 5.14급 암벽 완등…“클라이밍 덕에 중2병 몰라요”

중앙선데이 2021.05.22 00:02 737호 2면 지면보기
“걸고 가, 확보물 먼저 걸어.” “안 걸고 가다가 떨어지면 오늘 클라이밍 종료~.” “아니~. 인생 종료~.” 이렇게 한 말씀씩 하더니 동시에 “하하하~!”
중학생 클라이머 송윤찬(맨앞), 권기범(가운데), 이학진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등반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클라이밍 센터에서 동문수학하며 스포츠 클라이밍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중학생 클라이머 송윤찬(맨앞), 권기범(가운데), 이학진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등반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클라이밍 센터에서 동문수학하며 스포츠 클라이밍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애들도 아닌데, 귀밑으로 보송보송 솜털이 보인다. 어른도 아닌데, 콧수염도 살짝살짝 보인다. 이 세 명의 중학생들은 가장 무섭다는 14세. 질풍노도의 시기다. 그런데 이들은 바위에서 ‘빠르고 거센 바람-질풍(疾風)’이 되고 ‘무섭게 밀려오는 물결-노도(怒濤)’가 된다. 권기범(서울 신도중3), 송윤찬(고양 도래울중2), 이학진(인천 안남중2)군이다. 

고난도 암벽, 3~5판에 오른 세 명
엄지발가락 동전크기 굳은살 훈장

“힘자랑 아닌 자기 컨트롤 스포츠”
청소년대표, 2024올림픽, 5.15 노려

부모들 500㎞ 운전 매니저 역할
“애들이 응어리 발산, 마음 추스려”

 
멀찍이 떨어져 학교에 다니지만, 이들은 경기도 고양시 일산에서 동문수학하는 사이. 최근 모두 5.14급 암벽등반에 성공했다. 이 권·송·이 세 명을 지난 6일 충남 아산 영인암장에서 만났다. 
 
# 아이들
“안녕하세요.”
세 명의 배꼽 인사. 권·송·이를 가르치는 한만규(62) 일산클라이밍 센터장은 “클라이밍보다 먼저 인사를 잘하라고 교육한다”며 “학생들이라, 사람들이 기술은 물론 인성 교육을 눈여겨본다”고 밝혔다.  
 
권·송·이 셋은 모두 5.14급 등반에 진입한 상태다. 한 클라이밍센터에서 동문수학하는 세 명이 5.14급을 완등(추락 없이 오름)한 경우는 드물다. 그것도 불과 14세다. 
 
숫자로 보는 5.15 등반 난도.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숫자로 보는 5.15 등반 난도.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암벽등반 난도(요세미티 십진체계)는 5.6부터 5.15d까지 있다. 숫자와 알파벳 순서가 뒤로 갈수록 힘들어진다. 레드불 홈페이지는 5.14급을 “좋은 유전자와 수년간의 헌신적 훈련이 요구되는 등급”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노력만으로 안 되고, 자질만으로도 안 된다는 얘기다. 일반인에게는 손톱만 한 돌기가 군데군데 있는 아파트 외벽 수준이다. 
 
등반 잘한다는 ‘어른’들도 5.14급 루트를 수개월, 수십 번에 걸쳐 완등하기 일쑤다. 근데 이들은 당일, 2~3판 만에 끝을 낸다. 이들의 등반에 대해 “어이없다”라고 말하는 성인 클라이머들도 있을 정도다. 권·송·이는 ‘분더킨트(wunderkind·이른 나이에 뛰어난 업적을 남기는 이를 가리키는 독일어 )’일까.
 
기자가 “각자 알아서 등반을 해달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셋은 가위바위보를 했다. 맏형 권기범군이 먼저 오른다. 5.12d(루트명 바람골)를 단숨에 치고 올라갔다. 그의 가녀린 팔뚝이, 토르의 망치처럼 돌변했다.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권기범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올해 중학교 3학년이 된 권기범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권군을 3년 전 인터뷰한 적이 있다.  당시, 한 실내암장에서 만난 그를 ‘훨훨 난다’고 표현했는데, 권군을 잊고 있었다. 그때의 권기범이 오늘의 권기범인 줄 몰랐다. 기범군은 지난 2월 마이산 꿈과희망(5.14a)을 완등했다. 마이산 쓰나미(5.14a)는 세 번째 시도에서 완등했다. “(발) 사이즈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는데, 그는 “1m 60cm(44㎏)에요”라고 대답했다. 작은 키를 그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그렇지는 않아요. 선수 생활하는 데 지장은 없어요. (신체적) 조건이 완벽할 수는 없어요. 그걸 극복하는 게 과제이고, 재미이기도 해요.”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히히히. 형 너무 어른 말씀 같은데요.” 송윤찬군이 권군의 옆구리를 찌른다. 대롱대롱 15m 높이에서 확보한 채다. 가위바위보에서 진 윤찬군이 셋 중 가장 어려운 겨울햇살(5.13c)에 올랐다. 송군은 지난 4월 선운산 오토매틱(5.14b)을, 2월에는 조비산 슈퍼스타(5.14b/c)를 완등했다. 시도 횟수가 각각 9차례, 8차례다. 송군은 2년 전 한 방송사에서 ‘영재’로 뽑히기도 했다. 지난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틈틈이 열린 스포츠클라이밍 대회 학생부에서 3연속 우승을 거머쥐기도 했다. “학교 친구들이 ‘저기 올라가 봐라’, ‘팔씨름 한 번 해보자’고 해요. 그러면 ‘직접 체험해 보는 게 중요하다’, ‘클라이밍은 힘자랑하는 게 아니라 자기 컨트롤을 해야 하는 스포츠다’라고 대답해줘요. 그러면 친구들이 ‘멋있다’고 해요. 기범이 형보다 제가 너무 어른스럽게 말하는 것 같네요.” 송군의 팔은 유난히 길다. 키 1m 64cm(52㎏)에 양쪽 팔 길이가 1m 72cm에 이른다. 그는 “뭐, 학진이에 비하면 별거 아니죠”라고 답했다.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이학진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정준희 인턴기자

올해 중학교 2학년이 된 이학진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오르고 있다.정준희 인턴기자

이학진군은 1m 74cm(56㎏)에 팔 길이는 1m 80cm다. 클라이밍을 시작하던 2018년에만 20cm 넘게 컸다. 초등학생 때 체중이 너무 나가 클라이밍을 시작했단다. 이미 초등학교 6학년 때인 지난해 2월 초 태국 레일리 비치에 있는 5.14c 루트인 ‘그리드(greed)’를 완등했다. 만 12세로, 세계 최연소 5.14c 등반이었다. 12세치고 큰 키 때문에, 당시 나이 조작 의혹을 받은 해프닝도 있었다. 그는 최근 선운산 ‘조커(5.14a)'를 완등했다. “솔직히, 신체적 조건은 좋으면 더 좋은 것일 뿐, 절대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요. 노력을 더 많이 하는 게 중요해요.”

 
이들 세 명은 경쟁하는 사이일까. “음, 복잡한 관계(송윤찬).” "한마디로 말할 수 없는(이학진)." “형, 아우, 친구이면서 경쟁자이기도 해요”라고 형인 권기범군이 정리해 줬다. 
     
# 부모들
“글쎄요. 기범이가 중2병을 앓은 적이 없는 것 같네요.”
권기범군의 어머니 김은영(46)씨가 말했다. “우리 윤찬이도 확실히 덜한 편입니다.” 송윤찬군의 아버지 송동훈(46)씨가 맞장구를 쳤다. 이학진군의 어머니 박진애(42)씨는 “매우 무난하게 중2를 보내고 있어요”라고 했다. 
 
이들은 모두 “클라이밍을 하면서 응어리를 발산하는 것 같다”고 의견을 냈다. “클라이밍을 왜 시켰나”에서 시작한 질문과 답이 꼬리를 물고 “클라이밍의 교육 효과”까지 이어진 것이다. 
 
김유겸 서울대 체육교육과 교수는 “클라이밍은 극한의 체력과 집중력·인내를 요구하기 때문에, 자기 컨트롤이 부족하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며 “이른바 중2병도 자기 컨트롤 능력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라, 끊임없이 자신을 다듬는 클라이밍 과정이 도움될 것”이라고 말했다.
중학생 클라이머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등반하고 있다. 아버지 송동훈씨는 확보자가 되어 아들의 안전한 등반을 돕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중학생 클라이머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등반하고 있다. 아버지 송동훈씨는 확보자가 되어 아들의 안전한 등반을 돕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부모들은 아이들의 매니저이자, 자파(자일파트너)이기도 하다. 등반을 배워 아이들의 확보(등반 중 추락 시 로프가 확보물에 안전하게 걸릴 수 있게 하는 기술)를 직접 보기도 한다. 암장과 대회장까지 주 2회 400~500㎞를 운전하거나, 등반 중 손의 땀을 없애주는 초크 가루를 잘게 부숴주는 역할도 마다치 않는다. 
 
격렬한 운동이니만큼 부상도 잦다. “아픈 아이를 걱정하는 부모야 당연한데, 애들이 곧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다음을 준비하더라고요.” 권·송·이 부모들의 같은 대답이다.
 
곧 다가올 ‘다음’은 다음 달 12~13일 열리는 고미영컵 스포츠클라이밍 대회다.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도 겸한다. 또 다른 ‘다음’은 올해 도쿄 올림픽 바로 다음 대회인  2024년 파리 올림픽이다.
  
# 다시 아이들
“이렇게 할까요?”
20m 높이에서 로프에 매달린 채 모로, 가로눕는다. 어깨동무에 그칠 줄 알았더니 세 명이 그 자세로 엎드려 사진기를 응시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호흡이 척척 맞는다.
중학생 클라이머 권기범(맨앞), 이학진(가운데),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등반하는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클라이밍 센터에서 동문수학하며 스포츠클라이밍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중학생 클라이머 권기범(맨앞), 이학진(가운데), 송윤찬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암벽을 등반하는 중 휴식을 취하고 있다. 이들은 같은 클라이밍 센터에서 동문수학하며 스포츠클라이밍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을 준비하고 있다. 정준희 인턴기자

중학생 클라이머 이학진, 권기범, 송윤찬(왼쪽부터)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을 찾아 암벽등반을 했다. 절친한 형, 아우, 친구 사이인 이들은 6월에 있을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경쟁자로 나서야 한다. 정준희 인턴기자

중학생 클라이머 이학진, 권기범, 송윤찬(왼쪽부터)군이 지난 5월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을 찾아 암벽등반을 했다. 절친한 형, 아우, 친구 사이인 이들은 6월에 있을 청소년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경쟁자로 나서야 한다. 정준희 인턴기자

이런 이들이 당장 청소년 국가대표를 위해 경쟁해야 한다. 중장기 목표도 있다. “체대에 진학해 관련 공부를 하고 싶어요(권기범).” “지도자가 돼 클라이밍 팀을 만들고 싶어요(송윤찬).”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높은 난도를 등반하고 싶어요(이학진).” 

 
14세에 5.14급을 하니, 15세에 5.15급이 가능할까 물었다. 권·송·이의 표정이 더 진지해졌다. 그리고 서로를 쳐다보더니 “하하하!” 웃었다. 현재 인간이 성공한 최고 난도는 5.15d다. 세계에서 단 두 명이다.
지난 5울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등반을 마친 중학생 클라이머 이학진, 권기범, 송윤찬 군의 발(왼쪽부터). 정준희 인턴기자

지난 5울 6일 충남 아산시 영인암장에서 등반을 마친 중학생 클라이머 이학진, 권기범, 송윤찬 군의 발(왼쪽부터). 정준희 인턴기자

이들의 엄지발가락 위, 작은 동전만 한 굳은살이 솟아있다. 발에 꽉 끼는 암벽화를 자주 신었을 때의 상흔이자, 맹훈련에 대한 훈장이다.
 
다시 등반. 질풍이 노도를 뒤엎고, 노도는 질풍을 덮었다.
김홍준 기자 rimri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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