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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영의 문화가 암시하는 사회] “부자니까 착한 거야”를 현실로 느끼는 청년들

중앙일보 2021.05.21 00:30 종합 23면 지면보기

온라인 커뮤니티에 나타난 ‘종교적 자본주의’

기택(송강호): 이 사모님이 참 순진해, 착하고. 부잔데 착하다니까.
 

벤야민이 예언한 자본주의 종교화
테크 CEO는 성자, 돈 없으면 죄인
‘가난하면 애 낳지 마’ 원망 쏟아져
운동권 정치인 거짓 청빈도 한 몫

충숙(장혜진): ‘부잔데 착해’가 아니라 부자니까 착한 거지, 뭔 소린지 알어? 솔직히 이 돈이 다 나한테 있었어 봐. 나는 더 착하지, 착해.
 
기택: 그건 그래. 네 엄마 말이 맞아. 부자들이 원래 순진해, 꼬인 게 없고. 부잣집은 또 애들이 구김살이 없어.
 
충숙: 다리미야, 다리미. 돈이 다리미라고. 구김살을 좌악 펴줘.
 
‘기생충’ 해외 포스터들. 수석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 많은데, 영화에서 수석은 종교화된 자본주의에서 성물의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 CJ ENM]

‘기생충’ 해외 포스터들. 수석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 많은데, 영화에서 수석은 종교화된 자본주의에서 성물의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 CJ ENM]

지금 미국에서 HBO 드라마로 제작 중이고 최근 일본에서 연극 제작 계획도 나온 봉준호 감독 영화 ‘기생충’(2019)에 나오는 대사다. 요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배달 일을 하는데, 부자들이 싸가지 없을 줄 알았더니 오히려 더 친절했다” “여러 곳에서 편의점 알바를 해봤는데 가난한 동네일수록 진상 손님이 많더라” 등등의 글을 볼 때마다 저 대사가 머릿속에 재생된다. 1020 세대가 많은 게시판에 이런 글이 자주 보이는 데다가, ‘성급한 일반화’라는 반론보다 ‘불편한 진실’ ‘그래서 무리해서라도 부자동네로 가야 한다’는 등의 댓글이 현저히 많아진 게 최근 몇 년간의 트렌드다. 이제 부자는 경제자본뿐만 아니라 ‘착함’의 상징자본까지 차지한 상황이다.
 
내가 어릴 때는 부자는 악당이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게 나오는 동화가 많았는데, 떡잎부터 자유주의자였던 나는 그런 동화를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이렇게 바뀐 분위기도 씁쓸하다. 부(富)를 악으로 매도하지 않는 세상을 원했던 거지, 반대로 가난을 죄나 패배로 여기는 세상을 원했던 건 아니니까.
 
‘루저’로서의 죄의식을 퍼뜨리는 자본주의
 
‘기생충’ 해외 포스터들. 수석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 많은데, 영화에서 수석은 종교화된 자본주의에서 성물의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 CJ ENM]

‘기생충’ 해외 포스터들. 수석을 주제로 한 포스터들이 많은데, 영화에서 수석은 종교화된 자본주의에서 성물의 역할을 담당한다. [사진 CJ ENM]

"부자니까 착한 거”라는 ‘기생충’ 충숙의 대사에는 자신이 착하지 못한 게 돈이 없기 때문이라는 합리화만 있는 게 아니라, 부자가 되지 못해 호감 가는 성격도 되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패배감이 섞여 있다. 앞서의 배달원이 부자들이 더 친절한 것을 보고 뭔지 모를 "박탈감”과 "자괴감”을 느꼈다고 쓴 것처럼 말이다. 이 느낌은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1892~1940)이 예언적 단편 저술 ‘종교로서의 자본주의’(1921)에서 말한 ‘슐트(schuld)’에 해당한다. 독일어 슐트는 ‘빚’ ‘부채의식’ ‘죄의식’ ‘죄’를 뭉뚱그려 의미하는데, 벤야민은 일종의 종교가 된 자본주의가 그리스도교의 ‘원죄’ 의식처럼 이러한 슐트를 끝없이 증식시키고 퍼뜨린다고 했다. 한마디로 못 벌고 못난 ‘루저’인 것에 죄의식을 느끼는 세상인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 자본주의 죄의식은 여러 형태로 펼쳐진다. 기택(송강호)이 자신들의 박 사장 저택 입성을 위해 음모를 꾸며 쫓아낸 윤 기사에 대해 뒤늦게 걱정하자 그의 딸 기정(박소담)이 외친다. "우리는 우리가 제일 문제잖아. 우리 걱정만 하면 되잖아. 아빠, 아빠, 우리한테 집중 좀 해줘, 응? 우리한테! 윤 기사 말고 나한테! 제발 좀!” 여기서 기정은 기택의 가난한 아빠로서의 죄책감을 환기시키고 있는데, 이 대사 역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요즘 급증한 "가난하면 애 낳지 마세요” "흙수저 부모의 특징” 등등의 글들과 겹쳐져 보인다.
 
이런 글들은 주로 1020 세대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겪고 있는 고충을 나열하고 "무책임하게 나를 낳은” 그리고 심지어 "빨대 꽂는” 부모를 원망하는 내용이다. "그건 가난이 문제가 아니라, 글쓴이 부모의 인성 문제다” "가난해도 사랑으로 키울 수 있지 않으냐”의 반론 댓글도 달리지만, "아무리 사랑으로 키운다 해도 자식의 박탈감은 못 메운다”는 재반박이 달리곤 한다.
 
한편, ‘기생충’에서 기택과 충숙의 가족보다 더욱 ‘슐트’로 가득한 사람은 ‘지하실 남자’ 근세다. 그는 실질적으로 많은 빚을 지고 채권자를 피해 박 사장 저택 지하벙커에 숨어 살고 있으며, 매일 밤 박 사장이 표지인물로 실린 비즈니스 잡지를 세워놓고 "오늘도 저를 먹여 주시고 재워 주시고… 리스펙트!”를 외치며 자신의 부채의식을 표현한다. 그런데 이 장면은 마치 종교 제례 같아서, "자본주의는 제의(祭儀) 종교다”라고 한 벤야민을 상기시킨다. 벤야민이 말하는 자본주의의 제의는 시장가치를 형성하는 매매·투자는 물론, 근세의 박 사장 숭배처럼 높은 시장가치를 지닌 존재에 대한 숭배를 포함한다.
 
실제로 지금 인터넷과 소셜미디어에서 가장 숭배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미술가 자크 블라스가 말했듯 현대에는 오로지 거대 IT기업 창업자들만이 ‘선지자(visionary)’로 불린다. 또한 소셜미디어에서 플렉스(flex), 즉 돈 자랑을 하는 셀럽들은 현대의 성자들이며, 그들은 그 이미지로 장사해서 더욱 돈을 번다. 지금은 비트코인 사태 때문에 많은 미움을 받고 있지만, 테슬라 CEO 일론 머스크에 대한 지지는 예전부터 ‘컬트’ 즉 제의 종교에 비유됐다. 지금 머스크 지지자와 비트코인 지지자의 한판 대결을 보고 있으면 거의 종교적 성전을 방불케 한다.
 
네이트판 10대 게시판에 올라온 ‘100억 vs 서울대 의대’ [인터넷 사이트 캡처]

네이트판 10대 게시판에 올라온 ‘100억 vs 서울대 의대’ [인터넷 사이트 캡처]

이렇게 벤야민의 자본주의 종교화 예언이 실현되면서, 돈은 더 이상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가 최종 목적이며 유일한 가치가 되어 가고 있다. 지난해 10대들의 커뮤니티 게시판에 "100억 vs 서울대 의대” 중에 무엇을 고르겠냐는 글이 화제가 됐는데, 100억원이 3176표, 서울대 의대가 98표였다. 압권은 베댓이다. "잘 모르나 본데 설의(서울대 의대) 가는 이유가 대부분 돈 때문임.. 설의 간다 해도 100억 못 버는데 당연히 암 것도 안하고 100억 고르지.” 이 베댓은 608개의 ‘좋아요’를 받았다. 종교화된 자본주의의 복음서에 기록될 만한 말이다.
 
유교적 운동권에 대한 염증도 한 몫
 
자본주의가 종교의 위치를 대체하는 것은 전 세계적 현상이다. ‘기생충’이 칸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작품상을 휩쓴 것도 그 현상을 상징적 공간과 블랙 유머로 맛깔나게 풀어내 세계인의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현상은 한국의 청년층에서 유난히 더 두드러진다. 과거 한반도를 500년 넘게 지배한 유교, 특히 조선식 주자학에 대한 거부감이 급격히 높아진 데다가, 그 유교의 계승자인 586 운동권의 최근 문제들이 청년층의 반감에 쐐기를 박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정치학자 함재봉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의 의견에 따르면, 현 정부의 실세인 운동권은 구한말 위정척사(衛正斥邪)파, 혹은 조선의 도덕 근본주의 사림(士林)파와 일맥상통한다. 모든 것을, 심지어 실리를 따져야 할 경제정책도, 선악(善惡)과 바르고 삿된 것(正邪)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일본 학자 오구라 기조의 말처럼 "도덕지향적”이며, 도덕을 확보하면 부와 권력이 저절로 따라올 것으로 믿는다.
 
그런데 실제 조선 역사를 봐도 알지만, 이런 도덕 근본주의자들은 언제나 도덕적으로 살며 부와 권력에 초연한 게 아니다. 오히려 도덕 혹은 명분을 장악하기 위한 싸움을 치열하게 벌여 경쟁자를 절대 악으로 몰아가고 승리하면 권력과 부를 독차지하는 식이다. 남이 부를 탐하는 것은 부도덕이요 악이라고 비난하며 청빈을 설파하지만, 나의 부는 ‘절대 선인 나’에게 자연스럽게 주어진 특권으로서 어떻게 얻은 것이든 정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로남불’이 가능하며 ‘조국 사태’ ‘윤미향 사태’에 대해서도 여태 사과가 없는 것이다. 많은 청년들이 여기에 염증과 환멸을 느꼈다.
 
문제는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부에 대한 적극적 추구와 찬양이 종교 수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벤야민의 예언대로 종교화된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기쁨을 줄 수 있는 다양한 가치를 오로지 부(富)로 획일화하고, 돈 못 버는 ‘루저’로서의 죄의식과 더 많은 부를 향한 갈증으로 우리를 몰아넣어 불행하게 만든다.
 
애덤 스미스를 비롯해서 자유시장경제 철학의 기초를 세운 경제학자들 중 그 누구도 시장과 자본주의 시스템과 돈을 인간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겼지, 그 자체를 목표이며 획일화된 최고 가치로 여기지 않았다. 특히 『자유론』과 『정치경제학 원론』을 쓴 존 스튜어트 밀(1806~1873)은 인류를 행복하게 할 핵심 요소가 자유와 개별성과 다양성이라고 보았고, 그것을 극대화하기 위해 과연 자본주의가 나은지 사회주의가 나은지 면밀히 검토했으며, 결국 전자의 편을 들었지만, 후자를 절충하는 여지도 남겨 놓았다.
 
하지만 이러한 진정한 자유주의와 개별성에 대한 담론은 그간 좌우 모두 조선식 유교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에서 이제야 조금씩 논의되고 있는 형편이다. 조선식 유교의 가치체계가 그 위선으로 자멸하고, 그 반작용으로, 수단이어야 할 자본주의가 종교가 되어버리고 있는 지금, 우리에게는, 특히 청년세대에게는, 새로운 가치체계가 절실하다.
 
문소영 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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