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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위기 대통령 정조준한 ‘냉전의 아들’…무기는 3700시간 녹음테이프

중앙일보 2021.05.20 14:52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중앙포토]

미국의 37대 대통령, 리처드 닉슨. [중앙포토]

 

“대통령이 하면, (불법적인 일이라도) 불법이 아니다.”  

 
리처드 닉슨(1913~1994) 전 미국 대통령이 한 인터뷰에서 했다는 말이다. 워터게이트 스캔들과 관련해 자신을 변호한답시고 둘러댄 변명이었다. 야당 불법 도청 시도 정황이 워싱턴포스트(WP) 기자들의 특종 보도로 드러난 워터게이트 스캔들은 그를 권좌에서 끌어내렸다. 닉슨의 남루한 해명은 WP 기자 출신 작가인 마이클 돕스(71)의 뇌리에 깊이 꽂혔고, 1972년 워터게이트 스캔들이 발발한 뒤 약 반세기가 가까운 지금 새로운 책을 출간한 계기가 됐다. 
 
십수 년 간 자료를 모으고 추가 취재를 통해 펴낸 『제왕 닉슨(King Nixon)』이다. 워터게이트 특종을 해낸 WP 기자들, 밥 우드워드(78)와 칼 번스타인(77)의 후배가 닉슨을 또다시 파헤친 셈이다.  
 
마이클 돕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작가 겸 교수다. [펭귄 출판사 캡처]

마이클 돕스. 워싱턴포스트 기자 출신 작가 겸 교수다. [펭귄 출판사 캡처]

 
WP의 경쟁지인 뉴욕타임스(NYT)는 지난 19일(현지시간) 서평에서 돕스의 신간을 “풍요롭고 다채롭다”고 극찬했다. NYT에 따르면 돕스는 이 책의 집필을 위해 총 3700시간이 넘는 닉슨의 육성 녹음테이프 및 파일을 들었으며 각종 자료를 방대하게 취합했다고 한다. 닉슨과 워터게이트에 대해 새로운 게 뭐가 있을까 싶지만, 돕스의 노력의 결과 “새로운 드라마”가 드러났다고 NYT는 평했다.  
 
마이클 돕스의 닉슨에 대한 신간.

마이클 돕스의 닉슨에 대한 신간.

 
돕스가 천착한 주제 중 하나는 닉슨의 자기중심적 사고가 어떻게 가능했는지 여부다. 돕스는 성장기에서 열쇠 중 하나를 찾았다. 그의 어머니가 닉슨을 과도하게 애지중지했다는 것이다. 닉슨의 이름 역시 사자왕 리처드에서 따왔다고 한다. 돕스가 이 책 제목을 『제왕 닉슨(King Nixon)』이라고 지은 이유다. 닉슨이 핑퐁 외교를 통해 미ㆍ중 수교를 성사시키는 등 외교적 성과를 거두었음에도, 권력에 눈이 어두워진 배경엔 그의 성장기가 있다는 게 돕스의 해석이다.  
 
여기서 잠깐. 마이클 돕스라는 이름을 들으면 미국 정치 드라마의 팬들은 ‘하우스 오브 카드’를 떠올린다. 백악관 안팎의 정치 암투극으로, 시즌6이 넘도록 인기를 구가해온 드라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을 쓴 이는 영국 정치인인 마이클 돕스로, WP 전 기자인 돕스와는 동명이인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둘이 먼 친척 간이라는 점이다. 정치라는 드라마의 막후를 파헤치는 DNA를 공유한 셈이다.  
 
'하우스 오브 카드' 포스터 [넷플릭스]

'하우스 오브 카드' 포스터 [넷플릭스]

 
닉슨 책을 낸 돕스는 그러나 픽션보다는 논픽션 작품에서 두각을 드러내왔다. 그가 천착해온 주제는 냉전 시대로, 한국 외교·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그의 ‘냉전 시리즈’는 필독서다. 냉전 시대의 물줄기를 바꾼 굵직한 사건이 발생했던 연도를 제목을 삼은 ‘1945’ ‘1962’ 1991‘ 시리즈다. 돕스는스스로를 ‘냉전의 아들(a child of the Cold War)’이라 표현한 적도 있다.  
 
냉전에 대한 그의 관심은 태생과도 깊이 연관돼있다. 6ㆍ25가 발발했던 1950년 태어난 그는 외교관 자녀=로, 소비에트 연방(소련) 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WP에 입사한 뒤에도 주로 해외특파원으로 중국 천안문 사태, 소련 해체 등의 현장에서 기사를 송고했다.  
 
1991년 쿠데타가 발생하자 지지세력에 호소하는 연설 중인 옐친 당시 소련 대통령. 노란 동그라미 안의 인물이 마이클 돕스다. [마이클 돕스 홈페이지]

1991년 쿠데타가 발생하자 지지세력에 호소하는 연설 중인 옐친 당시 소련 대통령. 노란 동그라미 안의 인물이 마이클 돕스다. [마이클 돕스 홈페이지]

 
천생 기자인 그는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정치인들과의 투쟁을 위해 2007년 WP 내 팩트체커 팀을 발족시키는 데 앞장섰다. 지금은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언론이 대부분 시행하는 팩트체커의 시조인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등 일부 정치인들이 사실무근 내용을 주장할 때 그들을 피노키오에 빗댄 그래픽을 함께 게재해 주목받았다.  
 
WP는 그만뒀지만, 그는 여전히 현장 기자다. WP에도 여전히 르완다 사태 등에 대해 기고하며 프린스턴대 등에서 언론학 강의를 하고 있다.  
 
전수진 기자 chun.su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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