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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의 실크로드에 길을 묻다] 비단길 종착역, 17세기 초까지 ‘차이나’는 없었다

중앙일보 2021.05.14 00:30 종합 24면 지면보기

서양인의 중국 찾기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는 『동방견문록』 표지. 마르코 폴로 일가가 베니스를 떠나는 장면이다.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있는 『동방견문록』 표지. 마르코 폴로 일가가 베니스를 떠나는 장면이다.

예전에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여행하던 사람들의 궁극적인 목적지는 중국이었다. 한나라와 당나라의 수도가 있던 장안(長安·오늘날 西安)이 종착역과 같았다. 거기서 더 동쪽으로 가면 한반도와 일본에 도달했겠지만, 그것은 간선도로에서 벗어난 지선(支線)이었다고 할 수 있다.
 

세레스·신·마친 등 다양하게 불려
마르코 폴로 이후 ‘카타이’ 대세
중국 남부지역은 ‘만지’라고 표기
‘하나의 중국’은 그들만의 말일 뿐

역사적으로 서방 사람들이 중국을 가리키던 명칭은 여러 개 있었다. 오늘날 통용되는 ‘중국(中國)’은 사실 과거 중국인이 자신들의 나라가 천하의 한가운데 있다고 여겨 사용한 자존·자긍의 표현에 불과했다. 그 문화적 우월성을 인정한 한자 문화권에서만 그대로 받아들여 사용했을 뿐 객관적인 명칭은 아니었다. 우리나라나 일본에서 ‘대동(大東)’이니 ‘대화(大和)’와 같이 자존감이 깃든 용어를 사용한 것과 마찬가지다.
 
고대 그리스와 로마인은 동방에서 비단을 생산하는 지역을 ‘세레스(Seres)’라고 불렀다. 당시 중국이 비단의 생산지였기 때문에 세레스가 곧 중국이라고 이해하는 사람도 많지만, 엄격하게 말해 고대 유럽인에게 세레스는 머나먼 동방의 어느 곳에 있는 ‘비단의 나라’ 정도였을 뿐이다. 그때까지는 중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보를 갖지 못했다.
 
‘차이나’는 첫 통일왕조 ‘진’에서 비롯
 
같은 곳에 소장된 ‘카탈루냐’ 지도 중국 부분. 중국과 북경을 각각 ‘카타이’‘칸발릭’으로 명기했다. [사진 김호동]

같은 곳에 소장된 ‘카탈루냐’ 지도 중국 부분. 중국과 북경을 각각 ‘카타이’‘칸발릭’으로 명기했다. [사진 김호동]

이에 비해 보다 널리, 또 지금까지 계속 사용되고 있는 명칭이 있다. 바로 ‘차이나(China)’인데,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Chin)에서 비롯된 것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서아시아에서는 아랍 문자로 ‘ㅊ’를 표기할 수 없어 ‘신(Sin)’이라고 했고, 인도에서는 ‘크다’는 뜻의 접두어 ‘마(ma)’를 붙여 ‘마친(Machin)’이라고도 불렀다. ‘친’이라는 명칭보다 그리 널리 사용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렸다.
 
‘친’ 못지않게 널리 사용된 중국의 명칭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키타이’이다. 이 말은 원래 중국 북부를 정복하고 요(遼·916~1125)라는 왕조를 세운 거란족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종족의 명칭은 그들 발음으로 ‘키탄(Kitan)’인데, 한자로는 ‘契丹(계단)’이라 표기했다. 중앙아시아에서는 ‘키탄’이라는 말이 ‘키타이(Kitai)’로 변음됐고, 모음동화로 인해 ‘카타이(Katai·Cathay)’라는 발음으로도 알려졌다. ‘캐세이 퍼시픽’이라는 항공사 이름도 여기서 나온 것이다.
 
마르코 폴로

마르코 폴로

키타이·카타이 명칭이 특히 유럽인 사이에서 널리 퍼지게 된 데에는 마르코 폴로의 역할이 크다. 그가 동방에서 겪은 체험을 구술한 『동방견문록』(1300년경)에 카타이(Catai)라는 지방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마르코 폴로의 책 어디를 봐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하나로 뭉뚱그려서 부르는 명칭은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북중국을 카타이라고 불렀고, 남중국은 ‘만지(Manzi)’라고 칭했다. 만지는 북방 사람들이 남쪽 주민을 ‘만자(蠻子·야만인)’라고 비하해 부르던 표현이었다. 이렇게 별도의 이름이 붙여진 것은 중국이 북방의 금(金)과 남방의 송(宋)으로 오랫동안 분열됐기 때문이다. 당시 몽골인이나 외국인의 눈에 하나의 중국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것을 나타내는 명칭도 필요하지 않았다.
 
마르코 폴로의 글은 유럽에서 큰 인기를 누렸고, 이후 유럽인의 세계관에도 깊은 영향을 남겼다. 현존하는 필사본만 120종에 가깝고, 인쇄술이 도입된 뒤로는 활자본 280여 종이 출간될 정도였다. 그의 글이 나온 지 반세기쯤 지난 뒤인 14세기 중후반이 되면 『맨더빌 경의 여행기』와 같은 일종의 유사품이 만들어져 오히려 원작을 능가하는 인기를 끌었다. 1375년에는 ‘카탈루냐 지도’가 제작됐는데 『동방견문록』에 보이는 동방의 세계에 대한 풍부한 정보가 반영돼 있다. 이들 글과 지도에는 모두 ‘카타이’라는 명칭이 부각돼 있다.
 
몽골제국이 붕괴되고 한인들이 건설한 명나라가 들어선 뒤 드디어 중국은 하나로 통일됐다. 키타이와 만지를 구분할 필요가 없어졌고, 자연히 중국에서는 키타이 혹은 카타이라는 말도 더 이상 사용되지 않게 됐다. 하지만 서방에서는 그러한 명칭이 여전히 사용됐다. 15세기 전반 티무르 제국의 사신이 명나라를 다녀온 뒤 남긴 여행기에는 여전히 중국을 가리켜 ‘키타이’라고 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주민들은 그 후로도 계속해서 이 명칭을 사용했다. 오늘날 러시아어로 중국을 ‘키타이(Kitai)’라고 부르게 된 것도 그러한 영향을 받은 결과다.
 
마테오 리치·고에스 신부의 고된 여정
 
중국 북경 남당교회 안의 마테오 리치 동상. 그가 1605년 세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중국 북경 남당교회 안의 마테오 리치 동상. 그가 1605년 세운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교회다.

유럽인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카타이라는 동방의 거대 왕국은 여전히 그들의 지리적 상상력 속에 깊이 뿌리박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명나라 말기인 1583년부터 1610년까지 중국에 체류했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가 남긴 비망록을 보면, 그가 중국에 도착한 이래 카타이라는 나라를 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여러 사람에게 탐문하고 조사한 결과 그가 알아낸 사실은 바로 자신이 머무는 중국이 카타이에 다름없으며, 그 수도인 북경이 바로 마르코 폴로가 묘사한 카타이의 수도 ‘캄발룩(Cambaluc)’이라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발견을 인도 무굴제국에 주재하던 예수회 당국에 알렸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럴 리가 없으니 더 찾아보라”는 것이었다.
 
때마침 고에스라는 신부가 인도에서 중국으로 들어가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가 아르메니아 상인으로 위장해 들어가려 한다는 소식을 들은 예수회 당국자들은 그에게 카타이의 행방을 찾아볼 것과, 그곳에서 마테오 리치를 만나볼 것을 특별히 당부했다. 고에스는 중국 서부, 즉 오늘날 신장(新疆) 지방에 도착했을 때 중국에서 장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무슬림 상인을 만났다. 그들은 고에스에게 북경에서 마테오 리치를 만났다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자신들은 바로 카타이의 수도인 ‘캄발룩’에서 왔다고 말했다. 이로써 고에스는 마테오 리치가 있는 북경이 마르코 폴로가 말한 캄발룩이고, 명나라의 중국이 바로 카타이임을 분명히 알게 됐다.
 
고에스는 북경으로 가기 위해 더 동쪽으로 여행하다가 1605년 말 명나라의 서부 국경이 있던 쑤저우(肅州)에 도착해서 명 정부의 입국 허가를 기다렸다. 그러면서 그는 마테오 리치에게 편지를 보냈고, 이를 받아본 리치는 그를 돕기 위해 중국인 신도 한 명을 보냈다. 고에스는 그를 만나보긴 했지만 오랜 여행과 병환으로 허약해져 마침내 1607년 그곳에서 사망하고 말았다. 그 뒤 그가 어디에 묻혔는지는 잊혀져버렸다. 다만 그의 묘비명만은 알려졌으니 ‘카타이를 찾아서, 천국에 이르다 (Cercando il Cataio, trovo il cielo)’였다고 한다.
 
이처럼 유럽인이 마르코 폴로의 ‘카타이’가 바로 중국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것은 17세기 초가 돼서였다.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가 유라시아 여러 지역의 민족과 문화를 연결해주는 고리의 역할을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교류를 통한 상호인식의 확대는 의외로 더뎠던 것도 사실이다. 유럽이 중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의 지리적 정체를 올바로 아는 것조차 이렇게 어려웠다. 중국이 이러했다면 한반도와 우리나라에 대한 인식은 매우 낮을 수밖에 없었다.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 기회에 살펴본다.  
 
카탈루냐 지도, 중세판 세계지도
아브라함 크레스크(Abraham Cresque·1325~1387)는 스페인 출신의 지도 제작자다. 그가 남긴 ‘카탈루냐 지도’는 중세 지도 가운데 가장 폭넓은 지리 정보를 담고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요즘 지도와 다르게 화려한 회화 같은 느낌을 준다. 현재 프랑스 국립박물관에 소장된 이 지도의 맨 앞에는 천체와 우주에 관한 설명과 도상이 그려져 있다.
 
나머지 8면에는 세계지도(mappa mundi)가 펼쳐지는데, 각기 두 면이 서로 연결돼 접히도록 제작됐다. 그중 가장 마지막 면에 중국이 나와 있다. 지도 중앙 부분에 만리장성을 나타내는 표시가 이어져 있고, 그 아래로 ‘CATAYO’(카타이)라는 글씨가 거꾸로 보인다. 그 바로 왼쪽 위에 큰 성채가 그려져 있는데 ‘Chanbalech’(칸발릭)이라고 쓰여 있다. 또 지도 동남부에는 해안과 수많은 섬이 그려져 있는데, 한반도와 일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김호동 서울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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