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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권 이율배반…ILO 비준 밀어붙이고선, ILO 위반정책 추진

중앙일보 2021.05.13 13:41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김기찬 고용노동전문기자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12일 지방자치단체에 근로감독권을 주는 방안을 검토토록 지시했다. 이재명 경기도 지사가 지난해부터 주장해오는 것을 수용하는 모양새다.
 

[현장에서]

하지만 이는 국제협약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시도다. 그것도 한국이 비준해서 법적 효력을 가진 협약을 무시하는 행위다.
 
국제노동기구(ILO)의 협약 제81호는 노동자의 근로조건 보호, 산업안전보건 등 근로자 보호를 위한 근로감독업무는 국가 중앙부처에서 담당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한국은 이 협약을 1992년 비준했다. 국내법과 동일한 효력을 가진다.
ILO 로고

ILO 로고

 
민주당은 ILO 핵심 협약 비준을 지난 대통령 선거 공약으로 내걸었다. 이를 이행하려 경영계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압도적인 의석수로 밀어붙여 결국 통과시켰다. ILO 핵심 협약 비준서는 지난달 ILO에 기탁돼 1년 뒤 법적 효력을 가진다.
 
이런 여권이 이미 비준돼 법적 기능을 하는 ILO 협약을 위반하며 근로감독권을 지방으로 이양하는 방안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이율배반이다.
 
ILO 협약을 비준한 국가 가운데 지방정부에 근로감독권을 둔 국가는 없다. 그리스는 94년 근로감독 업무를 지방으로 이양했다가 ILO의 강력한 시정조치 요구와 경고에 98년 중앙부처로 환원했다. 이탈리아도 이런 시도를 하다 ILO를 비롯한 국제사회의 제재 움직임에 거둬들였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0월 19일 국정감사장에서 지자체에도 근로감독권을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뉴시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해 10월 19일 국정감사장에서 지자체에도 근로감독권을 줄 것을 주장하고 있다. 뉴시스

 
한데 민주당의 이런 시도가 이번이 처음이 아니라는 데 더 큰 문제가 있다. 20대 국회에서 신창현 당시 의원이 관련 개정법안을 냈다가 폐기됐다. 당시 국회입법조사처는 "부적절하다"는 의견을 냈다. 그런데도 21대 국회에서 윤준병 의원이 같은 내용의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재차 발의했다. 지속적으로 ILO 협약을 위반하고 훼손하려는 행위를 이어오고 있는 셈이다.
 
주무 부처인 고용노동부는 이에 대해 우회적이지만 강하게 정치권을 질타했다. 이재갑 전 고용부 장관이 직접 나서서다. 이 전 장관은 지난해 10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 출석해 "지자체에 근로감독 권한을 주면 고용부 장관이 지휘·감독하기 어려워지는 문제가 있다"며 "개별 사건 하나하나에 대해 전국적 통일성을 유지할 수 없는 문제가 생긴다"고 말했다. 부작용을 일일이 열거하며 반대입장을 명확히 전달한 것이다.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12일 지자체 근로감독권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오종택 기자

더불어민주당 송영길 대표는 12일 지자체 근로감독권에 대한 검토를 지시했다. 오종택 기자

 
노동계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한국노총은 "ILO 협약 위반 행위로, 국제적 기준과 선진화에 역행해 국제적 망신만 초래할 것"이라고 통박했다. 한국노총은 이 문제와 관련 11년 전인 2010년 10월 논문에 가까운 의견서를 낸 적이 있다. 당시 한국노총은 "근로감독권을 지방으로 넘기면 업무 중복, 업무 연계성 약화로 근로감독 기능의 위축을 초래한다"고 지적했다. 특히 "법 적용의 유기적 체계가 약화되면 노사 간 갈등 심화 등 사회적 문제를 야기한다"며 "지자체의 경험 부족과 전문성 결여로 업무 혼선만 초래할 것"이라고 비판했다.
 
송 대표는 산업재해 TF에 검토를 지시했다. 산업안전으로 지자체의 근로감독권한을 국한해도 ILO 협약을 위반하기는 마찬가지다. 제81호 위반은 물론 노사와 협의 한 번 안 했기 때문에 제155호, 제187호도 위배하는 게 된다. 한국노총은 "산업안전 관련 근로감독권이 지자체로 이관되면 산업 재해 피해가 오히려 증가할 것이고, 예방에 걸림돌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기업 입장에서도 비용부담이 늘어날 뿐만 아니라 중복규제로 인한 행정비용이 증가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특히 "각 지자체별로 제각기 다른 안전기준이 적용될 경우 혼란이 야기되는 것은 물론 지역 기업의 발전과 기업유치 명분으로 각종 안전보건에 대한 규제 완화로 이어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우려했다.
 
민주당이 법 적용당사자인 노동계와 경영계의 의견만 들었어도 국제협약을 무시하는, 이런 어이없는 법안 발의나 정책을 내놓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국민의 의견보다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져 ILO 협약조차 입맛에 맞게 비틀어 활용하려는 내로남불과 다름없다. 내년에 발효되는 ILO 핵심 협약은 또 어떤 방식으로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들지 벌써부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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