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임기말 고질병 '역사' 꺼냈다···"文발언, 레임덕 인정한 셈"

중앙일보 2021.05.12 18:09

“모든 평가는 국민과 역사에 맡기고 마지막까지 헌신하겠다.” 

 
지난 10일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4주년 특별연설 마지막 대목에서 했던 말이다. 이를 놓고 여의도 정치권에선 “문 대통령이 5년차 임기말 징크스에 빠진 것 아니냐”는 관측이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마친 뒤 질의 할 기자를 지정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문재인 대통령이 10일 오전 청와대 춘추관에서 취임 4주년 특별연설을 마친 뒤 질의 할 기자를 지정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모든 대통령은 임기 초반에는 국민과, 중반엔 참모와, 말기에는 결국 역사와 대화한다. 그리고 가장 위험한 때가 역사와의 대화를 시작할 때'라는 여의도의 격언을 염두에 둔 수군거림이다.  
 
이명박(MB) 정부 청와대에서 일했던 이동관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12일 중앙일보와의 통화에서 “모든 대통령은 임기 말 온갖 비난 여론에 직면하고 힘이 급격히 빠지기 시작하면서 ‘역사의 평가를 받겠다’는 말을 반복해왔다”며 “문 대통령의 10일 발언 역시 사실상 스스로 레임덕 상황이 됐음을 인정한 말로 난 이해했다”고 말했다.
 
이 전 수석은 “과거 김영삼 대통령 말기에 대통령이 대화를 단절하고 스스로 청와대에 고립됐던 상황에 대해 ‘청와대가 귀곡산장이 됐다’는 비유가 등장했다”며 “대통령이 여론을 등지고 소통을 멀리하면서 자신의 레거시(유산)에만 집중하는 독선과 독단에 빠지는 것은 국가 전체를 상당히 위험한 상황으로 이끌 수 있다”고 했다.
 
야당에선 "평가를 역사에 맡긴다"는 문 대통령의 말을 ‘비판 여론을 듣지 않겠다’는 뜻으로 해석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 문 대통령은 10일 연설에서 “부동산 가격을 안정시키겠다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고, 재ㆍ보선에서 엄중한 심판을 받았다”면서도 “부동산 정책의 기조는 바꾸지 않겠다”고 했다. 임혜숙 과학기술정보통신부ㆍ노형욱 국토교통부ㆍ박준영 해양수산부 장관 후보자에 대한 검증 부실 책임론에 대해서도 “야당이 반대한다고 검증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청문회 제도 자체를 탓했다. 연설문에는 혹독한 비판을 받은 뒤 한동안 입에 올리지 않았던 소득주도성장론까지 1년 반만에 다시 등장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울산 남구 3D프린팅 지식산업센터에서 열린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 전략 보고'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뉴스1

문재인 대통령이 6일 울산 남구 3D프린팅 지식산업센터에서 열린 '울산 부유식 해상풍력 전략 보고'에 참석해 박수치고 있다. 뉴스1

문 대통령은 그러면서 “보통 때라면 마무리를 생각할 시점이지만, 남은 1년이 지난 4년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며 남북관계, 경제정책 등 모든 분야에 대한 새로운 과제와 계획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안병진 경희대 교수는 “5년차 대통령의 연설문이 아니라 대선 출정식 원고를 보는 것 같았다”며 “국정과제를 제시하는 것은 임기말 대통령이 아닌 차기 대선 주자들의 몫인데 문 대통령이 전형적인 5년차 현상에 빠진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익명을 원한 정치권 인사는 “임기말 대통령은 여론의 혹독한 평가를 받게될수록 ‘내 정책 목표는 선한 의지를 갖고 있다’는 자기 최면을 강하게 걸게된다”며 “다만 정책적 선한 의지에 대한 미련과 현실적인 정책의 성과는 완전히 차원이 다른 얘기”라고 말했다.
 
역대 대통령 중 역사의 평가를 가장 강조했던 이는 YS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꼽힌다.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청와대 비서실장 시절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문재인 대통령 [연합뉴스]

 
YS는 임기 초반 ‘역사 바로 세우기’를 비롯해 ‘하나회 청산’ 등 굵직한 개혁 과제를 이끌며 지지율 고공행진을 이어갔다. 그러나 임기말 아들 현철씨가 연루된 한보 비리 사태 등을 겪으며 레임덕에 빠졌다. 임기 종료를 8개월 남겨뒀던 1997년 6월 당시 청와대 전ㆍ현직 참모들과 만난 자리에서 나왔던 건배사는 “국민적 비판이 있지만 개혁과 변화, 세계화 추진 등 국정목표는 옳았다”, “역사는 문민정부의 치적을 올바로 평가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임기말 주변에 “정도전은 이방원에게 패배했지만 조선의 통치 기반을 닦은 진정한 혁명가”라는 말을 자주 했었다고 한다. 공개 석상에서도 “조선시대 500년을 지배한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은 정도전”이라며 “당장 권력의 승패가 아니라 제도와 문화와 이념 이런 것들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 적도 있다. 당시 참모들은 “대통령이 우리 얘기도 잘 듣지 않는다. 답답하다”는 말을 하곤 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였던 1997년 1월 '유시유종'이라는 글을 썼다.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임기 마지막해였던 1997년 1월 '유시유종'이라는 글을 썼다. 시작할 때부터 끝을 맺을 때까지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중앙포토

배종찬 인사이트케이 소장은 “대통령이 여론은 물론 여당과의 소통까지 단절하기 시작하면 이는 곧장 당ㆍ청 간의 충돌 상황으로 전개되며 결국 정권을 야당에 내주는 결과로 이어진 적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이번 장관 인사에서 문 대통령이 여당에 정치적 부담을 전가하는 결정을 할 경우 여권 내 분열이 가속화될 우려가 있다”고 했다.

 
강태화 기자 thkang@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