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미리보는 한·미정상회담 上] '쿼드' 외면해온 韓 승부수? 이수혁은 왜 SK배터리 공장 갔나

중앙일보 2021.05.12 05:00 종합 1면 지면보기
미ㆍ중 간 전략 경쟁 과정에서 중국 압박을 위해 미국이 꺼내 든 ‘쿼드(Quad, 미국ㆍ일본ㆍ인도ㆍ호주)’ 개념을 한국은 그간 방 안의 코끼리(elephant in the room, 눈에 빤히 보이지만 두려움이나 불편함 때문에 입 밖에 내지 않는 큰 문제)처럼 외면해 왔다. 미국이 양자 회담에서 쿼드 문제를 꺼내도 “‘협의’는 있었지만, ‘참여 요청’은 없었다”는 식으로 선을 그었고, ‘쿼드 플러스’가 거론될 때마다 정부 당국자들은 “4개국조차도 쿼드의 성격에 대한 의견이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며 거의 경기를 일으켰다.

'부분 협력' 통해 쿼드 트랩 돌파 시도
기후변화·코로나19 이어 신기술까지
정상회담용인가 입장 변화인가
전문가 "국익 중심 접근 필요"

  
이랬던 정부의 언어가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부분 협력’ ‘분야별 협력’에 가능성을 열어두며 코끼리의 크기를 재보기 시작했다. 21일 문재인 대통령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간 첫 정상회담을 앞둔 기류 변화다. 이번 정상회담에서 쿼드와 관련된 문제는 핵심적으로 다뤄질 가능성이 크다는 게 외교가의 지배적 전망이다. 물론 동맹 협박을 일삼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다르다고 선언한 바이든 대통령이 이 문제로 당장 중국을 버리고 미국 편에 서라며 한국을 거칠게 압박할 가능성은 크지 않다. 지난 3월 방한한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도 한ㆍ중 관계 등과 관련 “한국이 처한 외교적 상황과 복잡성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취지로 공감을 표했다고 한다.
 

접점 넓어지는 한·쿼드 협력   

쿼드 협의체를 둘러싼 한국 정부의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쿼드 가입국과의 '부분 협력' 가능성을 열어두며 기후변화와 코로나19, 신기술 분야의 워킹그룹에 참여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중이다. 사진은 지난 3월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에서 만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연합뉴스]

쿼드 협의체를 둘러싼 한국 정부의 기류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쿼드 가입국과의 '부분 협력' 가능성을 열어두며 기후변화와 코로나19, 신기술 분야의 워킹그룹에 참여하는 방안에 대해 논의중이다. 사진은 지난 3월 한미 외교국방(2+2) 장관회의에서 만난 정의용 외교부 장관과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 [연합뉴스]

하지만 외교의 기본은 주고받기다. 코로나19 백신 지원 등의 과제를 안고 있는 문재인 정부 입장에선 미국의 동아시아 정책 핵심축인 쿼드를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뜻이다. 이와 관련, 정부는 쿼드 정상회담을 통해 마련된 워킹그룹에 참여하는 형식으로 협력하는 방안을 구상 중이다. 쿼드는 기후변화, 코로나19, 신기술 등 3개 분야에서 참여국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워킹그룹을 창설했다.  
 
사실 쿼드와 분야별 협력은 가능하다는 입장 자체는 새로운 게 아니다. 달라진 건 참여하겠다는 분야다. 지난달 초 외교부 당국자는 쿼드와 관련한 브리핑을 자청해 “필요하다면 우리가 기여할수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쿼드 국가들과 협력을 모색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대응을 협력 가능한 분야로 꼽았다. “코로나19의 경우 한국의 백신 위탁 생산능력이 상당히 큰 만큼 그런 분야에서 협력할 수 있고, 기후변화 역시 우리가 2050 탄소중립 이행을 위한 선도적 역할을 선언한 만큼 가능한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을 것”이라면서다.
 

기후변화·코로나 넘어 '신기술'까지 

쿼드 가입국과 협력을 논의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대응은 반중 색채가 보이지 않는 분야다. 반면 신기술 협력의 경우 미중 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한국 정부의 선택에 따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쿼드 가입국과 협력을 논의하고 있는 기후변화와 코로나19 대응은 반중 색채가 보이지 않는 분야다. 반면 신기술 협력의 경우 미중 간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어, 한국 정부의 선택에 따른 여파가 상당할 것으로 예상된다. 사진은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연합뉴스]

기후변화나 코로나19 대응은 미국이 중국과 협력하겠다는 입장을 정한 분야다. 정부는 대중 압박의 색채가 옅은 분야에서 협력이 가능하다고 봤던 셈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정부는 분야별 협력이 가능한 분야로 신기술 워킹그룹도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역시 한국의 반도체 기술력 등을 높게 평가하고 있고, 신기술 분야는 한국을 빼고 논할 수 없다는 입장이란 점을 고려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이수혁 주미 대사가 지난 7일 미국 조지아주(州)에 위치한 SK이노베이션 배터리 공장을 방문한 사실도 공개됐다. 바이든 대통령이 반도체ㆍ배터리 등 미래 신기술 분야에서 사실상 중국을 배제한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추진하는 가운데 이런 주미 대사의 동선은 의미심장하다. 특히 정상회담을 코앞에 두고 이뤄진 방문은 한국 역시 신기술 분야 협력에 보다 전향적 입장으로 선회할 수 있다는 신호로도 읽힐 수 있어서다.
 
쿼드는 지난 3월 사상 처음으로 가입국 간 화상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은 화상 정상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화면 왼쪽부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AFP=연합뉴스]

쿼드는 지난 3월 사상 처음으로 가입국 간 화상 정상회의를 개최했다. 사진은 화상 정상회의에 참석한 조 바이든(왼쪽) 미국 대통령과 스가 요시히데(화면 왼쪽부터) 일본 총리, 나렌드라 모디 인도 총리, 스콧 모리슨 호주 총리. [AFP=연합뉴스]

정인교 인하대 국제통상학과 교수는 “미국이 쿼드 동맹국을 중심으로 각종 국제질서와 관련한 이슈를 추진해나간다는 것을 인식하고 한국 정부 역시 쿼드에 대한 본격적인 협력 대응에 나선 것”이라고 분석했다. 또 “특히 바이든 행정부가 미국 중심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생각보다 강도 높게 진행하면서 한국 정부 역시 이에 대한 대응이 불가피해진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전홍택 한국개발연구원(KDI) 명예교수는 “쿼드의 신기술 협력에서 5G 시대의 여러 기술표준이나 인공지능(AI) 등이 다뤄질 수 있지만 그 중 핵심은 역시 반도체 인프라가 될 수 있다”며 “한국이 이에 협력하기로 한 게 맞다면 반도체 분야의 글로벌 공급사슬 변화에 있어 국익을 챙기기 위한 대응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시방편 대응' 경계해야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미 백신스와프에 대한 대가로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선택지와 관련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미국을 도와줄 분야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미 백신스와프에 대한 대가로 한국이 제공할 수 있는 선택지와 관련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미국을 도와줄 분야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이런 기류변화가 이른바 ‘정상회담용’인지, 근본적인 전략적 입장의 변화인지는 명확지 않다. 일각에선 이번 정상회담에서 코로나19 백신을 지원받기 위한 목적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실제 정의용 외교부 장관은 지난달 21일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한ㆍ미 백신 스와프와 관련한 질문에 “바이든 대통령이 관심 갖는 (반도체) 글로벌 공급망에서도 미국을 도와줄 분야가 많아서 여러 가지로 협의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백신 공급의 대가로 한국 기업과의 반도체 협력을 제안할 수 있다는 것처럼 받아들여질 수 있는 발언이었다.
 
전문가들은 쿼드와 관련한 정부의 결정은 국익을 중심에 놓고 이뤄져야지 임시방편처럼 순간순간 고비를 넘기려는 식의 접근은 적절치 않다고 지적한다. 김성한 고려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신기술 분야는 미ㆍ중 간에 양보가 없는 사실상 제로섬 게임이 벌어지는 분야로, 한국이 쿼드의 신기술 워킹그룹에 참여한다면 미국도 큰 기대를 갖게 될 것이 분명하다”면서도 “하지만 워킹그룹 진입 후에는 구체적인 조치들이 필요한데, 이런 부분이 충실히 이뤄지지 않고 한국이 여전히 소극적 입장을 보인다면 오히려 한ㆍ미관계에 예상치 못한 파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고 말했다.
 
실제 쿼드 정상들은 지난 3월 정상회의 뒤 신기술 분야 워킹그룹의 목적을 ‘미래 혁신 기술과 국제적인 기준에 대한 협력 활성화’로 규정했다. 특히 ‘국제적 기준’을 언급한 건 쿼드를 중심으로 중국이 그간 교란해온 글로벌 공급망의 질서를 바로잡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여지가 있다. 한국이 이에 대한 충분한 전략적 이해 없이 뛰어든다면 방 안의 코끼리를 대면하려다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정진우ㆍ박현주 기자 dino87@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