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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 나도 소방차 못 오는 도시재생 멈춰라” 창신·숭인동 분통 [영상]

중앙일보 2021.05.11 05:00 종합 18면 지면보기
10일 오후 서울시 종로구 숭인동의 한 목조 주택. 지난 3일 밤 불이 난 주택이 있는 골목으로 들어서자 30m 밖까지 메케한 탄내가 진동했다. 집 전체는 까맣게 탔고, 가재도구와 가스통 등이 그을린 채 대문 밖에 나와 있었다. 집 인근 전봇대에는 전선이 어지럽게 뭉쳐 있었고 여러 주택으로 위태롭게 이어져 있는 모습이었다. 지붕이 타 없어지자 오래된 나무 서까래가 등뼈처럼 형체를 드러낸 모습도 눈에 띄었다. 화재가 난 집은 다른 주택과 다닥다닥 붙어있는 구조여서 이웃집 지붕 18㎡도 불에 탔다.
 

불안한 ‘도시재생 1호’ 지역 가보니
좁은 골목에 전선 뒤엉켜 환경 열악
창신동, 지난 1년 간 화재 5건 이상
종로 이어 용산구도 해제연대 꾸려

가장 큰 문제는 이 집으로 통하는 길이 모두 비좁은 골목이거나 가파른 계단이었다는 것. 사고 당일에도 소방차가 들어오지 못해, 구급대원들이 길게 이어진 소방 호스를 직접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며 2시간 동안 화재를 진압해야 했다. 결국 이 사고로 9800만원에 달하는 재산 피해(소방서 추산)가 났다. 이 집에 살던 80대 여성은 대피했지만 불을 끄던 50대 남성은 얼굴에 1도 화상을 입어 병원 치료를 받았다.
 

“불 나도 소방차 못 와”…불안한 도시재생지역

지난해 10월 창신동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화재 진압 모습. 좁은 골목길로 소방대원들이 일렬로 현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 독자

지난해 10월 창신동에서 화재가 발생했을 당시 화재 진압 모습. 좁은 골목길로 소방대원들이 일렬로 현장으로 진입하고 있다. 사진 독자

도시재생구역으로 지정된 창신·숭인동 일대 주민들이 “화재 위험에 노출돼 있다”며 대책 마련을 요구하고 있다. “노후 주택들이 밀집해 불이 번지기 쉬운 데다 비좁은 골목길 탓에 신속한 화재 진화가 어렵다”는 게 주민들의 입장이다. 일부 주민들은 ‘역사성 보존’을 이유로 노후한 지역을 그대로 방치하는 도시재생사업이 화재 위험을 크게 높였다고 주장한다. 3일 불이 난 숭인동과 창신동 일대는 2014년 전국에서 처음으로 도시재생 선도지역으로 지정된 곳이다.
 
10일 화재 현장에서 만난 한 주민은 “3일 밤 화재 현장에 있었는데 그나마 이곳 숭인동은 큰길에서 가까워 그나마 불을 끄기 쉬웠던 편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시재생으로 골목길이 깨끗해지고 주거환경이 개선된 건 맞지만, 단순히 미화 차원이지 화재 등 안전에 대한 고려는 전혀 없는 상황”이라며 “창신동의 경우는 숭인동보다 비좁은 골목길이 많아 소방차는 물론 소방관들조차 들어가기 어렵다”고 했다.
 
강대선 창신동 공공재개발추진위원장은 “이 지역 집들이 너무 오래되다 보니 누전이나 합선으로 인한 화재가 잦다”며 “지난해부터 기억나는 화재만 5, 6건 정도 된다”고 말했다. 그는 “불이 나기 쉬운 것도 위험하지만, 소방차가 진입하기 어려운 곳이 많은 것이 더 문제”라며 “이 경우 불이 나면 속수무책으로 인명피해가 날 수 있어 주민들의 불안감이 크다”고 했다. 
 

“기억나는 화재만 5번”…“격차도 커져”

화재 취약한 창신·숭인 도시재생구역.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화재 취약한 창신·숭인 도시재생구역. 그래픽=김영희 02@joongang.co.kr

실제로 지난해 12월 30일 오전 10시경 창신동 문구완구종합시장 골목에서 불이 나 1800만원의 재산피해(소방서 추산)가 났다. 지난달 5일에는 신발도매상가에서, 3월 31일에는 창신동 오토바이판매점 등에서도 화재가 발생해 건물 1, 2층에 함께 있던 호프집과 신발 창고가 전부 탔다. 지난해 10월엔 창신동 한 약국의 뒤편에서 불이 나 애완용품점 등이 화재 피해를 봤다.
 
이에 일부 주민들은 “도시재생사업으로 주민 안전이 위협받을 뿐 아니라, 장기간 재개발이 되지 않아 타지역과의 격차가 갈수록 커지고 있다”며 도시재생지역 지정 해제를 요구하고 있다. 창신·숭인동 외에도 서울 용산구 동자동, 서계동, 자양 4동, 장위11구역 등 주민들 역시 도시재생해제연대를 꾸렸다. 
 
또 다른 도시재생지역인 용산구 서계동의 일부 주민은 최근 정부가 서계동 1번지 일대에 300세대 규모의 행복주택을 건립하는 것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이들은 “소방도로조차 없는데 많은 사람이 거주하는 행복주택 건설을 반대한다”며 주민 서명을 받아 문화체육관광부 등에 탄원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지난 3일 화재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한 목조주택. 소방서 추산 9800여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불은 이웃집 지붕으로도 옮겨붙었다. 허정원 기자

지난 3일 화재가 발생한 서울 종로구 숭인동의 한 목조주택. 소방서 추산 9800여만원의 재산 피해가 났다. 불은 이웃집 지붕으로도 옮겨붙었다. 허정원 기자

“도시재생 지속” 목소리에…해제연대, “제2의 창신동”

앞서 오세훈 서울시장은 도시재생 사업의 축소 방침을 밝힌 바 있다. 그러나 서울 지역 일부 구청장들이 이에 반대하는 상황이어서 당분간 지역별로 갈등이 격화할 조짐을 보이고 있다. 관악구, 양천구, 도봉구 등은 이미 도시재생사업에 들어간 매몰 비용과 정책 일관성 등을 근거로 “도시재생의 일방적 중단은 무리”라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이에 도시재생해제연대는 성명서를 내고 “사람 냄새나고 인간미 넘치는 동네를 만들 수 있다고 해 7년을 기다렸지만 돌아온 건 낡고 냄새나고 폐허가 돼 무너지는 동네뿐”이라며 “관악·양천·도봉구도 창신동과 같은 결과를 만들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비판했다.
 
허정원 기자 heo.jeongw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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