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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병원에 너무 늦게 왔다며 날 괴물처럼 바라본 의사

중앙일보 2021.05.09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51)  

(지난 50회에 이어)책이나 공책 귀퉁이를 조금 찢어서 손바닥으로 돌돌 말아서 귀를 틀어막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내 교과서와 공책은 귀퉁이 여러 곳이 세모처럼 찢겨나가고 없었다. 그러나 그 거친 것마저도 귓속으로 밀어 넣고 나면 금방 젖어버렸고, 솜 역할을 대신 해주지는 못했다. 어느 날 어렵게 구한 면봉을 귓속에 넣어보았다. 질벅질벅 고름이 가득한 귓속. 그 긴 면봉이 절반도 넘게 안으로 거침없이 들어갔다. 캄캄한 터널 속으로 한없이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도대체 내 몸속에서 지금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두려움이 밀려왔다. 중학생이었던 그때 내 귓속은 이미 축구경기장처럼 넓고 휑했다. 이러다가는 얼마 안 가 왼쪽 귀를 타고 들어가 나의 왼쪽 뇌 절반도 녹아 없어질 기세였다.
 
그 더러운 고름은 내가 서른이 다 되어가도 멈출 기미가 없었다. 몇 번 병원에 가보니 너무 늦었다고 의사가 혀를 찼다. 왼쪽 고막과 귓속 연골조직까지 모두 사라졌고 영원히 회복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심한 염증 때문에 뇌압과 이(耳)압이 많이 올라가 통증이 엄청났을 건데, 어떻게 이 지경까지 견뎠느냐고, 나를 괴물처럼 바라보았다. 속으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났다.
 

이십대에도 내게 병원은 사치였다. 월급은 단 한 푼도 못 쓰고 아버지께 꼬박꼬박 상납했다. 뒤늦게 간 병원에서는 왼쪽 고막과 귓속 연골조직까지 사라져 회복이 불가능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사진 pixnio]

 
나는 지금도 그 고름 썩는 냄새가 코끝에 떠오를 때가 있다. 초등학교, 중학교, 소녀인 십대를 지나고, 심지어는 이십대까지도 내게선 늘 생선 썩는 고약한 악취가 떠나지 않았다. 나 스스로 그 고름 냄새가 심하게 느껴질 정도였으니 학생 시절 내 짝꿍이나 타인들은 내 몰골을 보면 오죽 끔찍했으랴.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수치스럽고 자괴감이 든다. 이십대에도 월급은 단 한 푼도 못 쓰고 아버지께 꼬박꼬박 상납되었으니 내게 병원은 사치였다. 버스비도 없어 종종 회사도 걸어 다녔다. 그 긴 세월 동안 내 귀는 계속 썩어들어 갔다. 이십대 초반 풋풋해야 할 아가씨에게서 향수나 화장품 냄새가 아닌, 송장 냄새가 났다.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귓구멍도 염치는 있던 걸까? 자포자기하고 살다 서른이 넘어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귓속에서 고름이 흐르지 않는다는 것을 느꼈다. 이 악마 같은 고름이 언제 어떻게 저절로 멈췄을까? 생각하면 지금도 미스터리다. 긴 세월 한쪽 귀와 뇌가 모조리 다 썩어 내린 기분이었건만, 이젠 그곳의 모든 재료가 바닥난 것일까? 결혼하고 나서, 사는 게 몹시 힘들었다. 고민 끝에 내 발로 병원을 찾아간 적이 있었다. 한쪽 청력 상실로 인한 장애판정이라도 받아 세금감면이라도 받고 싶은 심정이었다. 장애인판정은 나오지 않았다. 청력 50%를 상실해도 한쪽 귀가 있으니 장애판정이 안 된다는 의사 말만 종이처럼 내 손에 쥐어졌다. 그러면 사고로 손가락 한두 마디 상실한 사람은 열 개 손가락 중 더더욱 일부 아닌가? 그것은 장애판정이 어렵지 않게 나는 것을 보았다. 2분의 1인 절반의 상실이, 어떻게 열 개 중에 한두 개를 잃은 10분의 2만도 못한 비중이 되는 건가? 나는 도무지 그 판정에 승복할 수 없었지만, 억울하면 재검하세요 하는 말에 비용이 부담으로 다가왔다. 결국 거기서 모두 포기했다.
 
지금도 가끔 나의 초등학교 시절과 십대 시절을 떠올려본다. 이래저래 친한 친구 하나 없었던 나. 시쳇말로 왕따였다. 그때 나는 어떻게 그 모든 걸 견딜 수 있었을까? 내가 특별하고 대단한 무엇이 있어 견딘 것은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뿐이다. 이젠 그것들을 초월해 나의 과거나 현재가 부끄럽지 않다. 몸에 생긴 장애는 불편할 수는 있어도 부끄러운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가끔 그 시절을 돌아본다. 고아도 아니었으면서 고아보다도 못한 성장기를 보낸 어린 내가 거기 혼자 있다. 지금도 간혹, 내 속에서 절망하고 있는 사춘기 나에게 한없이 미안해지곤 한다. 그리고 이젠 참 다행히도 모든 것이 비교적 과거보다는 다소 괜찮아졌다고, 부디 너의 미래를 안심하라고 어린 나를 위로하곤 한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타인의 인생에 많은 관여를 한다. 정말 의도치 않게 그런 일들이 종종 벌어진다. 때로는 너무 어리고 몰라서 뜻밖의 사건을 저지르기도 한다. 어떤 경우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심각한 일을 저지를 수도 있다. 오늘 풀어놓은 나의 이야기는 전자에 해당한다. 지금도 나와 작은 오빠는 같은 쪽 귀를 또 같이 못 듣고 산다. 나는 너무 어릴 때 이 사건이 벌어져 왼쪽 귀로 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전혀 없다. 태어날 때부터 이렇게 태어난 듯 느낌이 들 정도다. 사실 나는 그날 마당에서 벌어진 일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그 날의 결과물만 평생 안고 살아갈 뿐이다.
 
친한 친구 하나 없던 어린 시절, 내가 특별하고 대단해서 견딘 것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진 pixabay]

친한 친구 하나 없던 어린 시절, 내가 특별하고 대단해서 견딘 것이 아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사진 pixabay]

 
나는 한쪽 귀를 못 듣는다. 청력을 잃은 지 벌써 50년이나 지났다. 나는 지금도 그대의 왼쪽에 앉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번 생에서는 오른쪽 공기를 마셔보긴 틀렸다. 그래도 그 시절 그럴 수밖에 없었던 나의 부모를 이해했기에 다 내려놓고 살아간다. 어렸던 내 눈에는 부모가 거대한 어른이었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들도 처음 접한 삼십대에 화전민이 되어 척박한 인생을 겪어내느라 힘겨웠을 것이다. 나의 엄마는 지금도 내 귀를 늘 미안해하신다. 다 지난 일이다. 이게 어디 엄마만의 탓인가. 내가 본 엄마는 최선을 다하셨다. 더구나 이젠 되돌릴 수도 없다. 아니다. 나는 끔찍한 그 시절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 앞으론 좋은 생각만 하고 싶다. 아직 남은 날들이 내게 있어 그것만으로 감사하다. 이제 내가 할 노력은 딱 하나다. 그래도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일. 바로 이것이다. 왜냐? 나는 내 모든 생을 통틀어 지금이 가장 행복하다. 긴 세월 한쪽 귀를 잃고 살지만, 적응하고 자족하는 마음을 배웠다. 내가 어쩌지 못하는 끝없는 낭패감과 상실감도 차분히 들여다볼 줄 아는 이성을 배웠다.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어느 날 말기암 판정을 받은 환자가 너무 억울해 하느님께 외쳤다.
 
“하느님! 너무 억울합니다. 제가 암이라니요? 대체 왜 제가 암입니까? 이건 너무 불공평합니다. 왜 하필 접니까? 저 수많은 사람 중에! 왜 하필 저냐고요! 하나님 뭐라고 말 좀 해보세요!”
 
이렇게 따져 물었다. 그때 하늘이 이렇게 대답했다.
 
“왜 너는 안 되는데? 왜, 저들은 그렇게 돼도 괜찮고 왜, 너는 그렇게 되면 안 되는데?”
 
맞는 말이다. 우린 언제든 뜻밖의 고난을 만날 수 있다. 나만 안 된다는 법이 있을 리 없지 않은가? 그러니 지금 고통 속에 있는 그대는 곧 끝날 것이니 조금만 더 견디시라. 지금 넘치듯 행복한 그대는 언제든 그것들이 순간 사라진다 해도, 그럴 수 있다 여기자. 가장 중요한 것은, 아직 그런 날이 오지 않았음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사는 일이다. 그리고 어려운 이들을 가슴으로 위로하며 살았으면 한다. 우린 언제든 음지가 양지 되고, 양지가 음지 될 수 있다. 행복이 아직 내게 있을 때 하루하루 잘 사용해야 한다.(끝)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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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김명희 시인·소설가 필진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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