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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폭에 극단선택하는 아이들…日 '이지메 보험'까지 나왔다

중앙일보 2021.05.09 05:00
2018년 5월, 일본 구마모토(熊本) 현립고등학교 3학년이던 후카구사 도모카(深草知華)는 조퇴한 후 극단적 선택을 했다. 후카구사가 남긴 유서엔 '친구들에게 이지메(집단 괴롭힘)를 당했다'는 내용이 있었고, 조사 결과 같은 반 학생 여럿에게서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내 시야에서 사라져" 등의 폭언을 들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지메 보험 가입 2년 사이 7.3배 증가
학기 시작 앞둔 3월에 가입 집중돼
"문제 은폐 학교에 대한 불신 보여줘"

일본에서 학교내 집단 괴롭힘(이지메)이 점점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포토]

일본에서 학교내 집단 괴롭힘(이지메)이 점점 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앙포토]

후카구사의 부모는 딸의 죽음으로부터 3년이 흐른 지난달 28일 구마모토 지방법원에 가해 학생인 4명에게 위자료 1100만엔(약 1억 1300만원)을 청구하는 소송을 냈다. 이들은 "가해자들은 3년간 처벌을 받지도, 사과하지도 않았다"며 "딸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법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90년대부터 사회 문제로 떠오르기 시작한 일본 내 학교 폭력, '이지메' 문제가 점차 심각해지고 있다. 아이들 간 문제가 법정 다툼까지 번지는 경우가 늘면서 이지메를 당할 경우에 대비한 '이지메 보험' 가입자 역시 증가하고 있다고 도쿄신문이 5일 보도했다. 
 

법까지 만들었지만…늘어나는 학교폭력 

일본 정부는 2003년 집단 따돌림 등 학교 폭력을 조기에 발견하고 해결하기 위해 '이지메 방지 대책 추진법'을 만들었다. 상담교사를 크게 늘리는 등 대책을 마련했지만, 학교 폭력은 매년 증가하는 추세다. 
 
2019년 문부과학성이 집계한 일본 전국 초중고 학교의 이지메 건수는 총 61만 2496건으로, 1년 사이 6만 8563건이나 늘어나 역대 최다였다. 이지메로 피해자의 몸이나 마음에 심각한 피해가 발생한 '중대 사태'로 분류된 건수도 전년보다 121건 증가한 723건에 달했다.
 
일본 경시청은 2020년 초중고생 자살자 수가 집계가 시작된 1980년 이후 가장 많은 499명에 이른다고 발표했다. 지난해 이지메 관련 집계는 아직 발표되지 않았지만,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의 상당수가 이지메 피해를 당했을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조사에 따르면 가장 많은 학교폭력 유형은 '놀림이나 조롱, 욕설'(61.9%)이었고, 이어 '때리거나 발로 차기'가 21.4%, '따돌림, 집단 무시'가 13.7%였다.
 
이지메를 당한 후 목숨을 끊은 후카구사 도모카의 부모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방송화면 캡처]

이지메를 당한 후 목숨을 끊은 후카구사 도모카의 부모가 지난달 28일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사진 방송화면 캡처]

학교 불신, 변호사 찾는 피해자들

학교 폭력을 당한 피해자들이 소송 등 법적 해결을 원하는 경우에 대비한 '이지메 보험'까지 등장했다. 아이가 집단 괴롭힘을 당했을 경우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 상담해주고, 소송에 들어갈 경우 관련 비용 등을 보장하는 소액 단기보험이다. 
 
도쿄신문에 따르면 일본의 한 보험사가 2019년 출시한 '이지메 보험'의 올해 3월 가입자는 작년에 비해 1.4배 증가했고, 출시 첫해인 재작년과 비교하면 7.3배 늘었다. 보험료는 보장 내용에 따라 월 1000엔(약 1만원)대에서 4000엔(약 4만원)대다. 가입은 주로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3월에 집중된다.
 
보험에 가입하면 아이가 이지메를 당했다고 판단될 경우 보험사가 추천한 상담 변호사에게 연락해 증거 수집이나 학교와 교섭하는 방법 등에 대한 조언을 얻을 수 있다. 교육기관 조사에서 이지메로 인정돼 소송에 들어갈 경우, 변호사 선임 비용 등이 지급된다.
 
상품을 출시한 보험사측은 "학교 폭력은 점차 악질적으로 변해가고, 신체적 상해 등 위법 행위가 발생하는 경우도 많다. 보호자들이 최악의 상황을 피하기 위한 방안으로 보험을 선택하고 있다"고 말했다.  
 
학교 폭력에 대비한 보험 상품까지 등장한 건 교육기관에 대한 일본 사회의 뿌리 깊은 불신을 보여주는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이지메 문제 해결을 위한 시민단체인 '젠틀하트프로젝트'의 코모리 미도리(小森美登里) 이사는 도쿄신문에 "학교가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거나 문제를 은폐하는 경우, 학부모들은 학교를 믿지 못하고 변호사를 찾게 된다"고 말했다. 
 
이어 "이지메는 아이들끼리의 문제지만, 행위 자체는 어른에 의한 학대와 다를 바 없다. '범죄'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고 촉구했다.
 
도쿄=이영희 특파원 misquick@joongang.co.kr
 
※우울감 등 말하기 어려운 고민이 있거나 주변에 이런 어려움을 겪는 가족·지인이 있을 경우 자살 예방 핫라인 ☎1577-0199, 희망의 전화 ☎129, 생명의 전화 ☎1588-9191, 청소년 전화 ☎1388 등에서 24시간 전문가의 상담을 받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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