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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녀 나온 집안 세금 면제해줬다···'보쌈'으로 본 며느리 죽음

중앙일보 2021.05.07 12:00
MBN 사극 '보쌈'의 한 장면 [자료 MBN]

MBN 사극 '보쌈'의 한 장면 [자료 MBN]

“누가 죽었답니까?”
“이 댁 며느님이신 옹주께서 목을 매셨답디다. 역시 왕족은 뭐가 달라도 달라. 수절하기도 힘든 요즘 같은 세상에 서방님 따라서 목을 매다니. 열녀도 그런 열녀가 없어.”

전쟁 이후 국가적으로 열녀 장려사업
열녀 선정되면 집안에 면세 등 혜택

“당연히 열녀문을 내리시겠지?”  
1일부터 방영한 MBN 주말 사극 ‘보쌈-운명을 훔치다’의 한 장면. 광해군 시대 세도가인 이이첨의 며느리 화인옹주가 요절한 남편을 따라 자결한 것을 두고 행인들이 나누는 이야기다. 안타까움보다는 칭송과 경외감이 담긴 반응이다. 드라마니까 과장된 연출 아니냐고?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 후기 성해응이 쓴 『 절부변부인전(節婦邊夫人傳)』에는 수군절도사 이유수가 병들자 그의 처 변씨가 자신의 다리를 가르고 그 피를 받아 남편에게 먹였고, 살아날 가망이 없자 스스로 독약을 마신 일이 나온다. 변씨는 자신을 살리려는 집안사람의 만류도 단호히 뿌리쳤다. 
실학자 안정복도 『열녀숙인조씨정문(烈女淑人趙氏呈文)』을 지어 병조좌랑을 역임한 정광운의 처 조씨의 일화를 전했는데, 그녀는 남편의 삼년상을 지킨 뒤 독약을 마셔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다시 주변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독약을 마시고 죽었다. 이 외에도 조선 후기에 등장한 각종 '열녀전'에는 목을 스스로 그었다든가, 음식을 거부하고 방안에서 굶어 죽었다든가 하는 이야기들이 셀 수 없이 많이 등장한다.
 
이처럼 조선 후기는 여성, 특히 며느리에게 죽음을 압박하는 시대였다. 왜 그랬을까. 드라마 '보쌈'의 대화에 어느 정도 답이 나와 있다. 국왕이 열녀문을 내리고 포상하기 때문이다. 열녀문도 명예의 상징이 됐지만, 무엇보다 포상의 내용이 간단치 않았다. 열녀가 나온 집안은 나라에서 부역(국가나 공공 단체가 백성에게 부과하는 노역)과 세금을 면제해줬다. 국가에서는 유교적 분위기를 고양한다며 정기적으로 이런 사업을 벌였다.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은 「열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중화와 여성의 욕망」이라는 논문을 통해 “포상이 최소한 면세이고 그 혜택이 후손에게까지 지속됐기 때문에 가문 단위로 효자 열녀로 꾸며 신청하는 경우가 많았다”라고 말했다. 
 
MBN 사극 '보쌈'의 포스터. 조선시대엔 '보쌈'이라고 해서 남편을 잃고 수절한 부인들을 납치해 재가를 강제하기도 했다. [자료 MBN]

MBN 사극 '보쌈'의 포스터. 조선시대엔 '보쌈'이라고 해서 남편을 잃고 수절한 부인들을 납치해 재가를 강제하기도 했다. [자료 MBN]

 
하지만 조선 전기만 해도 분위기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조선은 여성의 개가를 금지하고, 욕망을 통제했던 사회였지만 죽음이 강요되지는 않았다. 남편이 먼저 죽을 경우 재혼만 하지 않으면 열녀로 추앙했다. 하지만 후기부터는 죽음을 통해 열녀로 인정받는 사회가 됐다고 한다. 
분기점이 된 것은 임진왜란이다. 
강명관 부산대 교수가 쓴 『열녀의 탄생』에 따르면 전쟁 과정에서 양반층에서도 향왜(鄕倭)가 나타날 정도로 유교적 질서관이 흔들리게 되는 것을 목격한 조정은 이를 회복하고 강화하는 것을 1차 목표로 세웠다. 그래서 열녀나 효자의 사례를 도서로 출판해 보급하거나 전쟁 시 열녀와 효자로서 사망한 사례를 적극적으로 발굴해 포상했다. 특히 임진왜란 때 정절을 지키고자 죽음을 선택한 사례가 많이 수집됐는데, 광해군 때 편찬한 『동국신속삼강행실도』를 보면 여기에 등장한 열녀 553명 중 80%에 해당하는 441명이 임진왜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드라마 '보쌈'의 배경이 광해군 시기인 점도 이같은 시대 분위기를 반영하는 셈이다. 드라마에서 화인옹주는 사망한 것이 아니라 보쌈꾼들에 의해 납치된 것인데, 이이첨은 며느리를 스스로 자결한 것으로 해버렸다. 
 
조선시대 열녀 발굴 수 [자료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열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중화와 여성의 욕망'에서 인용]

조선시대 열녀 발굴 수 [자료 소진형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 '열녀, 조선 후기 성리학의 대중화와 여성의 욕망'에서 인용]

실제로 열녀 발굴에 대한 사회적 붐이 일면서 분위기가 과열돼 일부 가문에서는 단기간에 열녀가 대거 등장해 진위 논란이 일기도 했다. 정약용은 이러한 풍조를 “명예를 낚아 부역을 피하게 하고 간사한 말을 꾸며서 임금을 속이게 한다”고 꼬집기도 했다.
 
이홍식 성결대 파이데이아 학부 교수는 「조선시대 열녀전(列女傳)과 여성 유서(遺書)에 투영된 욕망의 간극과 그 의미」라는 논문에서 "사대부 남성들에 의해 정리된 열녀전은 열녀의 삶과 죽음을 전(傳)의 양식에 따라 입체적으로 그려내어 당대의 사회적 표상을 만들어내고 있다"며 "단지(斷指)와 할고(割股·허벅지 살을 베어냄) 등을 통해 남편을 지극히 간호하다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몇 번이고 자결을 시도한 끝에 죽음을 성취하는 열녀상은 당대 사대부 남성들의 욕망이 만들어낸 허상일 가능성이 농후하다"고 지적했다. 
 
열녀의 탄생은 고종 시대까지 지속했다. 갑오개혁(1894~1896) 때 여성의 개가를 허용하는 조문을 포함하면서 비로소 자취를 감추게 됐다.
 
유성운 기자 pirat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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