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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여자라서 행복해요’ 광고 카피가 사라진 이유

중앙일보 2021.05.04 10:00

[더,오래]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22)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
 
코로나 사태 이후 야근을 줄이고 집에서 와이프랑 꽁냥꽁냥 저녁을 만들어 먹는 날이 많아졌다.
 
“혹시 ‘여자라서 행복해요’라고 했던 냉장고 광고 기억나?”
옆에서 야채를 다듬고 있던 아내에게 물어봤다.
 
“그럼, 기억나지. 근데 그게 냉장고 광고였나?”
“응! 냉장고 광고였어. 심은하 나오잖아!”
 
아내는 잠시 놀라며,
“아, 심은하였어? 이영애 아니고?”
“응! 심은하! 근데 그 광고 문구를 지금 쓰면 어떻게 될까?”
“미쳤어, 혼구녕 날라고?”

 
LG전자 디오스 2001년 광고. [사진 광보정보센터]

LG전자 디오스 2001년 광고. [사진 광보정보센터]

 
고급스러운 부엌에서 치즈, 빵조각, 맛있는 퐁듀 요리를 즐기고, 우아한 욕조에서는 편안하게 누워서 와인을 마시며 휴식을 취하는 여성(배우 심은하)이 광고에 등장한다. 배경음악으로는 소프라노 조수미가 2000년에 발표한 뮤지컬 음반 ‘온리 러브’ 중에서 ‘The Bohemian girl, Act 2: I dreamt I dwelt in marble halls(나는 대리석 궁전에서 사는 꿈을 꾸었네)’가 흐른다. 광고는 우아한 음악과 함께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하고 마무리된다. 당시의 대부분 냉장고 광고는 제품 기능 설명에 충실했던 때라 파격적인 컨셉을 자랑했던 광고로 기억한다.
 
여성이 꿈꾸는 행복한 삶에 관한 이상적인 이미지가 표현됐는데, 마치 고급 냉장고를 갖게 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환상에 빠지게 된다. 퐁듀는 당시에는 매우 생소한 요리로, 몇몇 스위스 요리 전문 레스토랑이나 일류 호텔에서만 맛볼 수 있던 음식이었다. 고급스러운 이미지 연출을 위한 소재로 광고에 쓰였다.
 
광고에서 두 번째로 눈에 띄는 점은 냉장고 광고에 주부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전 광고에는 대부분 주부가 등장했다. 냉장고의 주인은 주부라는 인식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광고는 다르다.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증가하기 시작했던 2000년 밀레니엄 시대를 반영한 것이다. 과거의 ‘주부’라는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탈(脫)주부적 움직임과 주부가 아닌 여성으로서 정체성을 찾고자 하는 시대 상황과 맞물려 본다면 과장된 해석일까. 이유를 막론하고 ‘엄마라서 행복해요’ 라든지 ‘주부라서 행복해요’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이게 무슨 대단한 것이라고 유난스럽게 볼 수 있겠지만, 광고가 만들어진 해인 2001년에서 정확히 10년 전으로 되돌아가 보자. 가수 김국환은 ‘우리도 접시를 깨뜨리자’라는 곡을 발표했다. 남편도 부엌에 가서 설거지하면서 아내를 돕자는 계몽적인 노래였다. 주부들에게 찬사받았던 곡인데 가사를 한 번 살펴보자.
 
“자 그녀에게 시간을 주자. 저야 놀든 쉬든 잠자던 상관 말고
거울 볼 시간 시간을 주자. 그녀에게도 시간은 필요하지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고 부엌으로 가서 놀자…”
 
노래 가사의 화자는 남성이다. 청자도 철저히 남성을 염두에 두고 쓴 것 같다. 첫 소절부터 남편이 아내에게 자유시간을 허락해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물론 이마저도 당시에는 파격적이라고 사회에 반향을 일으킨 곡으로 지금까지 회자하고 있다. 한국 가정이 얼마나 보수적이고 남성중심주의적이었는지 노래 한 곡을 봐도 알 수 있다.
 

1991년 발매된 김국환 1집. [사진 지니뮤직]

 
다시 광고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여자라서 너무 행복해요’라는 카피는 대한민국 냉장고 광고 역사상 파급력이 큰 광고로 손꼽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당시 각종 연예 프로그램에서는 앞 다투어 광고를 패러디했다. 이를테면 ‘여자라서 햄 볶아요’와 같이, 주부의 현실은 광고처럼 우아한 여성의 삶과는 거리가 있다며 풍자했다. 광고만큼이나 사랑받았던 패러디이다.
 
사람들은 어떤 면에서 광고와 현실 사이에서 괴리감을 느꼈을까. 여성이 남성처럼 사회에 진출해도 사회가 여성에게 주는 부담은 여전했다. 아니 오히려 증가하였다. 맞벌이의 여부를 떠나서 주부들이 가사에 할애하는 시간적, 정신적 에너지는 절대 줄어들지 않았다. 여전히 햄 볶고 요리를 하는 주체는 여성이었다.
 
가사의 관리자이자 책임자는 늘 주부였다. 여성은 합리적인 가정관리 능력을 갖춘 전문 경영인이 되어야 한다. 때로는 경제적이면서 스마트한 소비자가 되어야 하고, 남편의 기를 살릴 줄 아는 퍼실리테이터, 인문예술의 융·복합적 교양을 갖춘 교육보조자, 친인척과 지역사회의 연계자인 코디네이터 역할도 수행해야 한다. 주부의 가사에 대한 기대 수준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계속해서 높아졌다. 슈퍼맘의 탄생 배경이다.
 
집은 전쟁터(회사)에서 돌아오는 남편이 편안하게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야 했다. 남편은 직장생활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동시에 아내는 희생적인 어머니가 되어야 했다. 아내에게는 남편의 출세와 성공, 자식의 성공이 무엇보다 중요했고, 본인 자신의 삶보다 가족을 위해 평생 그림자처럼 헌신하며 살아갔다.
 
가족의 성공 과정에서 생기는 여러 가지 어려움은 신분 상승(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을 하면 모두 해결되리라는 믿음을 갖고서 인내한다. ‘고급 냉장고를 살 만큼 여유 있는 삶이면 행복해질 수 있다’라고 마치 주문을 외우면서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결국 성공이라는 경제적 조건이 전제되어야만 유지될 수 있다고 광고 기획자는 이야기해주는 것일까.
 
냉장고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사진 pxhere]

냉장고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없으며 그저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사진 pxhere]

 
2000년대 초반 한 시대를 풍미했던 광고 카피는 현재는 금기의 주제가 되어 버렸다. 더구나 여자라는 존재가 냉장고라는 가전제품에 좌지우지되어서는 안 되며, 냉장고는 여성의 전유물이라는 인식도 사라졌다. 그리고 좋은 냉장고가 있다고 해도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쯤은 모두가 알아버렸다.

 
다시 우리 부부의 대화로 돌아가 본다.
 
“냉장고 주인은 이제 여자가 아니잖아? 우리 집만 보더라도….”
나는 마치 떳떳하다는 듯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요리를 비롯해서 가사에 많이 동참하고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내의 반응을 내심 기대했으나 다소 시니컬한 답이 돌아왔다.
“그렇지. 남녀 구분이 없어야지 당연히.”
“오빠 생일에 누가 선물로 김치냉장고를 사준다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이해했지? 오빠 생일에 김치냉장고 사줘 볼까?”
 
정말 적절한 예시였다. 정곡을 찌르듯 아내의 말이 가슴에 확 와 닿았다. 난 아직도 한참은 멀었나 보다. 오늘도 아내에게 배운다. 냉장고는 누군가를 위한 선물이 될 수 없다. 냉장고는 마땅히 그 자리에 있어야 할 존재일 뿐이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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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효윤 심효윤 아시아문화원 연구원 필진

[심효윤의 냉장고 이야기] 아시아 지역의 곳곳을 다니면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현장에서 그들의 삶과 문화를 관찰한다. 부엌과 음식문화를 연구하는 <냉장고 프로젝트>와 전통지식 및 무형문화유산을 기록하는 <위대한 유산 아시아 프로젝트>를 수행하면서 얻은 지식과 경험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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