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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회 의결 없이 "월성 폐쇄"···탈원전엔 규정도 흐지부지

중앙일보 2021.05.04 05:00
월성 원자력발전 1호기 조기폐쇄를 이사회에서 의결하기도 전에 한국수력원자력이 먼저 정부에 폐지계획을 제출한 사실이 확인됐다. 또 신한울 3·4호기에 대해서도 한수원은 “정상사업 추진이 어렵다” 취지의 보고를 했다. 전문가들은 한수원이 자체 판단만으로 이런 ‘셀프 탈원전’ 계획을 제출했을 가능성은 작다며 산업부의 개입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의사회 의결도 없이 ‘폐쇄계획’

3일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이 입수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 관련 발전설비 현황조사표’를 보면 당시 한수원은 월성 1호기에 대해 “에너지전환 로드맵 이행을 위해 조기 폐쇄가 불가피하다”며 폐지계획을 제출했다. 또 신한울 3·4호기는 “에너지전환 로드맵 상 신규원전 건설계획을 백지화하기로 돼 있어 정상적인 사업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한다”고 보고했다.
한국수력원자력이 2017년 11월 이사회에 보고한 현황조사표. 윤영석 의원실

한국수력원자력이 2017년 11월 이사회에 보고한 현황조사표. 윤영석 의원실

이런 현황조사표는 2017년 11월 이사회 보고 후 의결 절차 없이 산업부에 제출됐다. 실제 월성 1호기 조기폐쇄를 실제 이사회가 결정한 것은 이 보고를 제출하고 약 7개월이 지난 2018년 6월 15일이다.
 
원래 정부는 전력수급기본계획을 만들 때 한수원 같은 발전 사업자에게 발전설비 현황 자료를 받는다. 당시 한수원 현황조사표도 이런 맥락에서 작성했다.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운전이 영구정지된 '월성 1호기'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경주시 양남면 월성원자력발전소에 운전이 영구정지된 '월성 1호기'가 보이고 있다. 뉴시스

하지만 전문가들은 원전폐쇄처럼 논란이 될 수 있는 사안을 이사회 의결도 없이 작성해 정부에 제출한 것은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실제 ‘공공기관 운영에 관한 법률’에 있는 ‘한수원 이사회규정’을 보면 “발전소 같은 기본재산 처분은 이사회가 심의·의결해야 한다”고 돼 있다.
 
익명한 요구한 당시 이사회 멤버 A씨는 “2017년 11월 한수원이 이사회에 현황조사표를 보고할 때는 자세한 내용 설명 없어 이런 민감한 내용이 있는지 몰랐다”면서 “자산 폐지 같이 돈과 관련한 사안은 당연히 그때 이사회에 충분히 설명하고 논의·의결을 거쳤어야 했다”고 말했다.
 

장관도 인용 ‘한수원 보고’…탈원전 근거로 활용

이런 한수원 보고는 실제 정부 탈원전 정책 근거로도 활용됐다. 산업부는 한수원 당시 보고와 에너지 전환 로드맵을 바탕으로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월성 1호기와 신한울 3·4호기를 제외했다. 이렇게 만든 8차 전력수급기본계획은 다시 월성 1호기를 조기폐쇄 하는 근거가 됐다.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지난해 10월 국회 산자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관계자들과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왼쪽은 정승일 1차관. 중앙포토

성윤모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오른쪽)이 지난해 10월 국회 산자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관계자들과 자료를 검토하고 있다. 왼쪽은 정승일 1차관. 중앙포토

성윤모 산업부 장관은 신한울 3·4호기 건설중단 근거로 이 한수원 보고를 인용하기도 했다. 지난해 10월 국회 국정감사 당시 “신한울 3·4호 건설중단을 한수원과 협의했냐”는 질문에 성 장관은 “(한수원이 제출한) 의향조사표에는 ‘정상적인 사업 추진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고 돼 있었다”고 했다. 이 의향조사표가 한수원이 2017년에 제출한 현황조사표다.
 

‘한수원 보고’에 산업부 입김?

하지만 전문가들은 자칫하면 배임 문제가 불거질 수 있는 이런 보고를 한수원이 자체 판단만으로 정부에 제출했을 가능성은 낮다고 지적한다.
 
윤영석 국민의힘 의원은 “한수원 반대에도 정부가 두 원전을 전력수급기본계획에서 제외하면 나중에 책임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면서 “산업부가 탈원전 정책 절차적 정당성을 갖추려고 한수원에게 월성 1호기 폐쇄와 신한울 3·4호기 가동중단을 먼저 보고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실제 당시 보고서 작성 경위를 잘 아는 관계자도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긴 어렵지만, 현황보고서를 만들 때 상당한 진통이 있었다”고 했다.
 
주한규 서울대 핵공학과 교수는 “한수원이 현황보고서에 '정부 정책 때문에 두 원전 가동과 사업 진행이 어렵다'고 명시한 것이 결국 정부 지시로 이런 보고를 만들었다는 의미”라며 “정부가 탈원전 정책 추진의 부담을 한수원에 떠넘긴 셈”이라고 지적했다.
 
하지만 산업부 관계자는 “당시 현황보고서는 한수원이 에너지전환 로드맵을 참고해 한수원이 자체적으로 작성한 것이며 산업부에서 어떤 내용으로 작성하라고 지시한 적은 없다”고 반박했다.
 
세종=김남준 기자 kim.nam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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