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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택배 전선의 ‘호모 에렉투스’

중앙일보 2021.05.04 00:24 종합 27면 지면보기
김승현 사회2팀장

김승현 사회2팀장

사람이 똑바로 서지 못하는 상황은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너무 어리거나 또는 늙고 병들었을 때, 뭔가로부터 자유롭지 않은 경우에 똑바로 못 선다. 백만년 전, 현생 인류의 할아버지쯤 되는 호모 에렉투스(Homo erectus)의 시대부터 ‘직립(直立)’은 하나의 메시지였다. 조만간 만물의 영장이 등장할 것이라는 복선이었고 현생 인류의 존재감을 뽐내는 몸짓이었다. 직립의 본능은 숱한 진화의 단계를 거치면서도 인간의 상징이 됐다.
 

‘택배 대란’ 부른 40㎝의 차이
노동자 허리가 코로나19 제물
직립 인간에 대한 예의 지켜야

유구(悠久)한 직립의 문제가 현대 사회의 갈등으로 비화한 현장은 그래서 적잖이 당황스럽다. 아파트 ‘택배 대란’ 얘기다. 갈등의 핵심엔 인간의 직립 본능과 그 기본에 대한 우리의 무관심이 있다.
 
시작은 이랬다. 지상을 공원처럼 꾸민 아파트 입주민들은 택배 차량이 자주 보이는 게 싫었다. 입주민의 차량도 못 다니는 곳을 거칠게 질주했다. 뛰어노는 아이들과 산책하는 노인을 위협한다고 판단한 아파트 측은 택배 차량의 지상 출입을 금지했다. 코로나19 시대의 ‘생존 키트’인 택배는 지하를 통해 ‘집 앞 배송’이 되게 해달라고 요구했다. 간단한 해결책 같았는데, 아뿔싸, 그게 봉인된 본능을 건드렸다.
 
일반 택배 차량(하이탑) 저장고의 높이는 지하주차장(2.3m)을 통과하기 어려웠다. 2019년 1월부터 지하주차장 층고는 2.7m 이상으로 의무화됐지만, 그 이전에 사업 계획이 승인된 경우엔 신축 아파트도 2.3m인 경우가 있다고 한다. 하이탑 차량 저장고의 높이는 2.5~2.7m였다. 40cm 안팎의 차이를 입주민들은 알지 못했다. 오로지 택배 소비자의 권리, 입주민의 편의와 안전이 최우선이었다. 대신 저장고가 운전석의 높이(1.5m 안팎)와 같은 ‘저상 택배 차량’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한 층 아래,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기대했건만 ‘호모 에렉투스의 문제’가 터졌다.
 
서소문 포럼 5/4

서소문 포럼 5/4

저상 차량의 저장고 안에서는 택배 기사들이 허리를 펼 수가 없었다. 종일 허리를 굽히거나 무릎으로 기면서 힘을 써야 했다. “골병드는 근무 환경”이라는 게 택배 노조 측 주장이다. 반면, 하이탑의 저장고 높이는 1.8m 정도여서 허리를 펼 수 있었다. 업무 효율성 측면에서도 한 번에 더 많이 더 큰 물건을 실어 나를 수 있는 하이탑을 선호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차량을 세우고 집 앞까지 손수레를 이용하라는 제안도 나왔다. 그러나 체력 소모와 시간 낭비를 책임질 사람은 없었다. 입주민의 요구는 노동자의 생존을 부정하는 ‘갑질’일 뿐이었다.
 
양측의 대립은 아파트 단지 앞에 택배 물건이 쌓이는 대란으로 이어졌다. 코로나19로 일감은 풍년이었지만, 택배 농부는 웃을 수 없었다. 문제의 아파트엔 노동계의 선동 문구가 나부끼기 시작했다. 민주노총 전국택배노동조합(택배노조)은 오는 6일 파업 투표를 예고했다.
 
수년간 몇 차례 논란 속에서 여러 대책이 있었다. 지상에서 차량 속도를 줄이겠다는 약속, 노인 일자리 지원책인 ‘실버 택배’를 활용하자는 묘수가 나왔다. 그러나, 어린 자녀를 둔 입주민들은 ‘시간이 돈’이라는 택배 기사의 안전불감증이 불안했다. 실버 택배는 정부 지원을 못 받는 경우엔 택배 기사나 택배 대리점에 비용 부담이 돌아왔다. 정부와 지자체는 ‘왜 세금으로 택배비를 내느냐’는 비판도 받았다.
 
코로나 이전의 시대부터 물류의 폭발이 예견됐는데도 우리는 왜 이런 갈등을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파트 지하주차장은 왜 그리 낮게 설계됐고, 저상 차량 안쪽의 사정을 살피지 못했을까. 아파트 보안시스템인 현관 비밀번호가 고스란히 택배 기사에게 공유되는 현실은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노동자들이 간절히 원했던 배달 상자의 ‘구멍 손잡이’가 지난해 도입된 과정도 노동 환경 변화에 한참 뒤처진 감수성의 수준을 보여 준다. 하루 300개 이상의 물건을 드는 택배기사들의 허리에 주는 부담을 10% 정도 덜 수 있는 구멍을 뚫는 데에도 비용(상자 한 개에 200원 정도) 문제, 이물질 침투와 내용물 노출 등의 반대론에 부닥쳤다. 지난해 우체국 택배를 시작으로 대형마트들이 구멍 손잡이를 도입하는 캠페인을 하고 있는 건 다행스럽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며 청년 전태일이 산화했던 51년 전과는 분명히 다른 노동 환경이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타인의 노동에 무관심하다. 고객 편의와 회사 이익을 이유로 노동자의 허리가 끊어져 나가는 사정을 너무 모른다. 그건 호모 에렉투스에 대한 예의가 아닌데도 말이다.
 
김승현 사회2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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