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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의 윤여정? 평균 73세 여성 청소부들의 반란

중앙일보 2021.05.01 11:01
70대 여성 7명이 서울 종로구 관수동 전태일기념관에서 무대에 올랐다. 꽃다발을 받아든 이들은 여성 청소노동자들. 지난 29일 오후 5시에 열린 이들의 '구술기록집' 발간식은 '노년알바노조' 준비위원회의 발족식이기도 했다. 이날의 주인공 여성은 총 9명이지만, 2명은 청소 업무 일정상 참석하지 못했다.
 
청소노동자 대표로 기자들과 방송사 카메라 앞에 선 김근선(71)씨는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노인노동자들이 많다. 우리 이야기가 신문에 나오게 해주시면 좋겠다"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노동계의 윤여정’이라고까지 할 수는 없더라도, 70대의 여성 노동자가 앞장섰다는 점에서 노동운동에 새 역사를 쓴 셈이다.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발족식에서 김근선씨가 발언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지난 29일 서울 종로구 전태일기념관에서 열린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발족식에서 김근선씨가 발언하고 있다. 편광현 기자

“자식들도 모르는 이야기 털어놔”

구술기록집은 노년 노동자의 처우 개선 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2019년 11월부터 쓰여졌다. 70대 여성 청소노동자의 삶, 65세 이후 노동현장에서 겪는 이야기가 담겼다. 자식들도 모르는 이야기를 털어놨다는 서미순(가명·71)씨는 "인생사를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며 "전태일같은 그런 사람들에 비하면 우리는 별 것 아니겠지만, 이렇게 나서면 다른 노인알바생들도 편해질 거라고 생각해 구술에 참여했다"고 말했다.
 
구술기록집 제작과 노년알바노조 준비는 평등노동자회가 도움을 줬다. 평등노동자회에는 민주노동 부위원장을 지낸 허영구씨가 참여하고 있고, 허씨는 알바노조준비위 공동대표로 참여한다. 전문 노동운동가의 도움을 받기는 한 셈이다. 노년알바노조 준비위와 평등노동자회는 "100세 시대에 노년들의 삶이 소외되고 배제되지 않게 함께 목소리를 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어 "청소노동자뿐 아니라 불안정한 노년 노동자와 구직자 등을 돕는 조직으로 확대해 정식으로 노조를 설립할 예정”이라고 했다.
 

"반장 맘에 안 들면 내일 관둬야"

평균 연령 73세인 여성 청소노동자들이 회고한 노동의 세월엔 ‘한(恨)’이 서려 있었다. 이들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싶지 않다"고 했다. 구술기록집에 따르면 지난 2011년 8년간 일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퇴직한 서씨는 남자중고교와 서울 마포구 합정역 인근의 건물 청소부로 일했다. 서씨는 "학교는 방학 때 일을 하는데도 돈을 챙겨주지 않아 관뒀다"고 했고, "이후 상가건물에서는 사장의 통보로 갑자기 해고됐다"고 회고했다. 또, "2014년부터 근로계약서, 명세서도 없이 8년간 월급을 받았다"며 "숙련자라 청소를 더 잘하게 됐는데 월급은 되레 깎였다"고 덧붙였다.

인천국제공항 청소노동자들.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 없음. 중앙포토

인천국제공항 청소노동자들. 해당 기사와 직접적 연관 없음. 중앙포토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공동위원장인 임진순(75)씨는 용역업체의 괴롭힘을 꼬집었다. 임씨는 "과거 한 용역업체 반장은 자기 마음에 들면 좋은 위치에 배치하고, 마음에 안 들면 '집에 가서 애나 보라'며 출근을 못 하게 했다"며 "월급을 탈 때마다 선물이나 돈 10만원씩을 반장에게 줘야 했다"고 말했다. 일하는 건물에서 나이가 가장 많다는 이창순(73)씨는 "중간 용역업체가 바뀔 때마다 불안하다"며 "운이 좋아 고용 승계를 해도 3개월 수습 기간이 계속 생긴다"고 토로했다.
 

연세대서 경험한 '노조' 경험이 도움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구성원 9명 중 6명은 71세까지 연세대에서 일했던 청소노동자다. 이들은 "연세대 청소노동자 노조를 설립해 본 경험이 노년알바노조를 세운 결정적 계기"라고 설명했다. 세브란스 병원과 연세대에서 일했던 김근선씨는 "노조가 없을 땐 청소 용품을 우리 돈으로 사서 썼고, 부당대우도 많이 당했다"며 "하지만, 노조가 있으면 그런 일들이 사라지더라"고 말했다. 임씨 역시 "예전엔 억울해도 하소연할 데가 없었다. 노조가 있어서 내 인권이 존중받았다"고 했다.
지난 29일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발족식에서 꽃다발을 받은 70대 여성청소노동자 7명. 이들은 70대 여성노동자 구술기록집' 발간에 참여했다. 편광현 기자

지난 29일 노년알바노조 준비위 발족식에서 꽃다발을 받은 70대 여성청소노동자 7명. 이들은 70대 여성노동자 구술기록집' 발간에 참여했다. 편광현 기자

임씨는 "노년 노동자 스스로가 노조의 필요성을 알아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노조하면 큰일나는 줄 안다. 노인네들도 일하는 동안은 우리를 지켜줄 노조가 필요하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서씨는 "연세대 밖 노동자들도 노년알바노조로 가자고 했는데, 본인이 민망해하거나 가족들이 말리는 것 같아 아쉬웠다"고 했다.
 

"돈 많이 달라는 것 아냐"

김근선씨는 "노조를 한다고 무조건 월급을 많이 달라는 것은 아니다"고 말했다. 그는 "우리가 청소만큼은 젊은 사람들보다 잘할 수 있다"며 "나이로만 차별을 두지 않고 우리가 하는 일로만 평가받고 싶다"고 노조 설립 취지를 설명했다. 이창선씨 역시 "계속 같은 일을 하는데 처우가 나빠지는 것은 이해가 안 된다"고 말했다. 임진순씨는 "노조가 커지고 대단해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다만, 억울할 때 같이 노동청에 가줄 수 있는 곳만 돼줘도 참 든든하겠다"고 했다.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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