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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방역에서 미국‧영국에 뒤지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던 유럽에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 유럽연합(EU)에서 전체 시민 4억5000만명이 2회씩 두 번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인 18억 회분의 화이자 백신을 '싹쓸이'하면섭니다.
 

[후후월드]

유럽연합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지난달 17일 EU 본부에서 28명 집행분과위원장(커미셔너)와 회동후 기자회견에 나섰다. [AP=뉴시스]

유럽연합의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이 지난달 17일 EU 본부에서 28명 집행분과위원장(커미셔너)와 회동후 기자회견에 나섰다. [AP=뉴시스]

이 과정에서 주목받은 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입니다. 화이자 CEO에 한 달간 집요하게 문자와 전화를 남기며 '개인 외교'를 펼쳐왔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섭니다. 일각에서 ‘어설픈 라이엔’이라며 조롱받던 그의 리더십도 덩달아 주목받기 시작했습니다. 
 

“1999년 사퇴한 자크 상테르와 아직 자리를 지키고 있는 폰데어라이엔의 차이는 출신국, 그리고 그가 메르켈과 친하다는 사실 뿐이다.”(텔레그래프)

 
최근까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게는 강도 높은 사퇴 압박이 쏟아졌습니다. 지난 1999년 EU 집행위원회(commission)의 대규모 비리 의혹으로 물러난 자크 상테르 전 위원장에 비유되면서까지 말이죠.  
 
최초의 여성 EU 수장이자 7명의 자녀를 둔 '워킹맘의 신화', 또 의사 출신의 전문성으로 코로나19 유행 초기 기대감을 모았던 그에겐 왜 어리숙하다는 딱지가 붙어있었을까요.

 

초기 백신 확보 실패에 '휘청'

지난 1월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에서 직원이 영국기를 철거하고 있다. [AP=뉴시스]

지난 1월 벨기에 브뤼셀의 EU 본부에서 직원이 영국기를 철거하고 있다. [AP=뉴시스]

EU 집행위는 최종 의사결정기구인 이사회(council), 유럽의회(parliament)와 함께 EU 전체를 이끄는 3개의 큰 축 중 하나입니다. 특히 위원장은 사실상 EU 전체의 행정을 이끄는 ‘선출직 실세’라고 볼 수 있죠.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향한 비판의 초점은 자리에 걸맞은 강력한 리더십을 선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코로나19 이후 백신을 둘러싼 선진국들의 경쟁은 피 튀기는 전쟁터를 방불케 했습니다. 평소 점잖은 척 다른 나라에 훈수들 두던 나라들이 체면도 떨쳐버리고 저마다 "우리 먼저"를 외쳤죠. 
 
하지만 EU는 아직 전체 인구의 22%가 1회 접종만 받은 상태입니다. 미국(42%), 이스라엘(62%)은 물론 브렉시트(Brexit·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로 자존심 싸움을 하고 있는 영국(50%)에도 한참 밀렸죠. 여기에 아스트라제네카와 계약한 백신 물량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추가 백신 공급도 어려웠습니다. 아무래도 '사공이 많은' EU로선 미국이나 영국처럼 순발력 있게 상황 변화에 대응하긴 쉽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미국, 영국 등에 비해 EU내 국가들의 백신 접종자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스라엘, 미국, 영국 등에 비해 EU내 국가들의 백신 접종자 비율은 상대적으로 높지 않다. 그래픽=김주원 기자 zoom@joongang.co.kr

이런 상황에서 점차 다가오는 여름 휴가철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압박해왔습니다. 주변에선 속속 여행 제재 완화 조치가 나오고 있는데 유럽의 사정은 그렇지 못했던 겁니다. 당장 관광으로 먹고사는 회원국들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습니다. 코로나19 유행이 본격화하기 전인 2019년 유럽 국가별 관광산업의 GDP 기여도는 그리스(21%)‧스페인(14%)‧이탈리아(13%)‧프랑스(9%)‧독일(9%) 수준이었습니다. 
 

‘메르켈의 그림자’ 꼬리표

사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임기는 시작부터 평탄하지 못했습니다.  
 
2019년 EU 집행위원장 인준 투표 당시 재적의원 747명 중 383명만이 찬성했고, 327명은 반대표를 던졌습니다. 과반(374표)을 얻어야 하는 투표에서 겨우 9표 차이로 간신히 살아남은 것이죠. 여기엔 정부수반직 경험이 없다는 것과 함께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꽂아넣은 ‘낙하산 인사’라는 시각도 한몫했습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2005년 메르켈 총리가 집권한 뒤 14년 동안 내각에서 함께 해 온 그의 측근입니다. 영국 런던정경대와 독일 하노버 의대를 졸업한 뒤 산부인과 의사로 일하다 42세에 기독민주당에 입당했습니다. 이어 앙겔라 메르켈 총리에게 발탁돼 가족청년부 장관, 노동부 장관, 독일 최초 여성 국방부 장관을 지냈습니다. 
 
지난 2019년 7월 최초의 여성 EU 집행위원장이 된 폰데어라이엔 당시 독일 국방장관(왼쪽)이 메르켈 총리에게서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로이터]

지난 2019년 7월 최초의 여성 EU 집행위원장이 된 폰데어라이엔 당시 독일 국방장관(왼쪽)이 메르켈 총리에게서 축하의 꽃다발을 받고 있다.[로이터]

이후에도 유럽의 굵직굵직한 현안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보단 메르켈 총리가 논의를 이끌어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유럽 재정위기, 난민사태, 브렉시트에서 메르켈 총리는 특유의 강한 리더십으로 EU의 사분오열을 막았습니다. 특히 브렉시트 협상 진행 과정에서 유럽으로 주도권을 가져오며 실질적 대표자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반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 과정에서 조용히 실무 협상을 준비했습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가 선정한 ‘2019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에도 1위에 메르켈 총리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4위에 올랐습니다. 당시 2위는 같은 EU 내의 크리스틴 라가르드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였죠.

 

"느리지만 차분한 리더십"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맨 왼쪽) 위원장이 지난 6일 터키에서 열린 EU·터키 정상회담에서 에르도안(오른쪽) 터키 대통령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나란히 앉은 가운데 의자가 없어 서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맨 왼쪽) 위원장이 지난 6일 터키에서 열린 EU·터키 정상회담에서 에르도안(오른쪽) 터키 대통령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이 나란히 앉은 가운데 의자가 없어 서 있는 모습. [AFP=연합뉴스]

하지만 앨버트 불라 화이자 CEO가 “변이 바이러스에 대한 세부 사항과 그 밖의 모든 (백신 관련) 세부사항을 알고 있었다”며 혀를 내두르는 등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꼼꼼함과 차분함을 통해 사태를 해결해나가는 모습을 보이며 평가도 조금씩 달라지고 있습니다. 불라 CEO는 “대통령과 총리, 왕을 비롯한 세계의 지도자들이 내게 손을 내민다”면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과는 깊은 논의를 했기 때문에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생겼다”며 그를 추켜세웠습니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67)으로부터 상석 의자가 아닌 소파를 받은 이른바 ‘소파 게이트’ 때도 이런 면모가 잘 드러나죠.  
 
터키가 여성폭력 방지협약 ‘이스탄불 협약’의 탈퇴한 것을 논의하기 위해 모인 자리에서 터키 외교부는 남성인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47)에게만 상석의 의자를 권했습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의 의자는 준비되지 않아 어정쩡하게 서 있다가 멀찍이 떨어진 소파에 앉아야 했죠.  
 
이날 회담 장면은 ‘소파게이트’로 불리며 외교적 결례 논란을 일으켰다. EU 제공

이날 회담 장면은 ‘소파게이트’로 불리며 외교적 결례 논란을 일으켰다. EU 제공

큰 외교적 결례였지만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현장에선 그에 대한 언급을 삼갔습니다. 대신 관련 논의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만큼 시간이 지난 지난달 26일 유럽의회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이의를 제기했죠. 
 
이날 그는 “여성이 남성과 동등하게 대우받으려면 얼마나 먼 길을 걸어가야 하는지 보여준다”며 오히려 이번 사건을 터키의 여성 인권 문제를 압박하는 데 활용했습니다. 더불어 EU 내 경쟁자인 미셸 상임의장의 “내가 부주의했다”는 사과도 이끌어냈죠. 뒤늦게 사과는 했지만 미셸 의장은 유럽 여성계의 반발에 내년에 3년 임기가 끝나는 상황에서 재선이 쉽지 않을 것이란 말이 나옵니다. 폰데어라이엔의 작심 비판이 터키와 함께 미셸의장을 겨냥한 것이란 평가가 나온 이유입니다.  
 

'홀로서기' 시험대 올라 

브렉시트와 코로나19 등 숱한 고비를 넘으며 집권 3년 차를 맞은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에게는 앞으로도 큰 갈림길이 닥칠 예정입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26일(현지시간)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26일(현지시간) 브뤼셀 유럽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AP=뉴시스]

후원자이자 비교 대상이기도 했던 메르켈 총리의 임기 만료가 오는 9월로 다가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차기 총리 후보로도 녹색당의 안나레나 배어복 공동대표가 인기를 끌며 '친정'인 독일 기독민주당의 정권 유지도 위태로운 상황입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이 자리에 오를 당시 가장 큰 반대를 했던 것이 독일 내 진보 세력인 사회민주당과 녹색당이었죠.
 
이재승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장은 “앞으로도 EU 27개국의 이견이 줄어들진 않을 것이며 리더십이 필요할 것”이라면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코로나19 구제금융 합의안을 도출하는 등 고유의 스타일이 있는 만큼 기대도 높아질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김홍범 기자 kim.hongbu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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