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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레스덴 성모교회, 뤼겐섬…폐허됐던 동독 관광지 부활

중앙선데이 2021.05.01 00:21 734호 27면 지면보기

독일 통일 그 후 30년 〈7〉 

복원 공사 중인 베를린궁전.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복원 공사 중인 베를린궁전.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동서독이 분단돼 있던 40년 동안 동독 사람들에게 서독은 늘 가고 싶지만 갈 수 없는 그리운 곳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저녁 TV 앞에 앉아 서독 방송을 봤다. 동독 시절 서독 TV를 보는 것은 불법이었기에 동독 당국에서는 이따금 아이들을 통해 어느 집에서 몰래 서독 방송을 보고 있는지 알아내려고 했다. 하지만 실제로 서독 방송 시청에 관해서 동독 당국은 묵인하는 상황이었으므로 많은 동독인은 매일 저녁 서독의 바이에른이나 라인란트 또는 베스트팔렌 지역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수십억 유로 투입 대대적 복원
중세 유적 도시들 제모습 찾아

현대적 기반 시설도 함께 건설
라이프치히 등 도시 재생 성공

베를린시 임대료 상한제 논란
도심 쇠락 부른 동독 정책 연상

서독 방문은 공무수행자나 은퇴자 등 소수의 운 좋은 동독인에게만 허용됐다. 이들은 돌아와서 서독의 풍족한 모습을 전해 줬는데 이로 인해 동독 사람들의 호기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공산정권, 싸구려 아파트 대거 건설
 
동독 정권은 2차 대전 중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베를린궁전을 폭파시키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로 공화국 궁전을 세웠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동독 정권은 2차 대전 중 큰 피해를 입지 않은 베를린궁전을 폭파시키고 그 자리에 콘크리트 건물로 공화국 궁전을 세웠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서독에서 동독으로의 여행은 원칙적으로 가능했지만 보통 동독에 이산가족이 있는 서독 사람들이 동독을 방문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독 방문을 위해서는 사증이 필요했다. 예를 들면, 드레스덴이나 로슈토크 또는 카를마르크스슈타트 등과 같은 목적지에 도착한 후 24시간 이내에 동독 인민경찰에 신고해야만 했다. 서독 사람들이 동독을 방문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경계를 통과할 때 매우 불친절하고 지나치게 깐깐한 동독 국경수비대의 검문을 거치는 것은 불쾌한 일이었다.
 
서베를린으로 가기 위한 통과구간을 지나거나 동독의 다른 곳을 방문하는 경우에 동독 인민 경찰은 서독 방문자들을 속도위반 또는 다른 사유를 적용해 벌금을 부과하기 일쑤였다. 의도적으로 방문자들을 압박하기 위해서였다.
 
드레스덴 공습으로 대파됐던 성모교회가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드레스덴 공습으로 대파됐던 성모교회가 이전의 모습을 완전히 되찾았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이러한 연유로 동독 방문은 서독 사람들에게 인기가 없었다. 그렇지만 서독 정부는 학생들의 동독 방문을 지원하는 등 보다 많은 서독인이 동독을 다녀오도록 독려했다. 수학여행의 일환으로 모든 학생은 서베를린을 방문하고 하루를 동베를린에 체류하도록 했지만 학생들은 이 프로그램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동독은 분위기가 음산했기 때문에 대부분은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으며 일부는 방문을 꺼리기도 했다. 한때 독일 문화와 정치의 중심이었던 베를린의 한복판에 소련 군인들과 인민경찰들만 서성이고 있으니 서독의 청소년들에게는 흥미가 없을 수밖에 없었다.
 
궁전들과 박물관 그리고 세계적인 오페라 하우스가 있는 작센주의 주도 드레스덴이나 독일 고전주의를 대표하는 대문호인 괴테와 쉴러가 활동했던 바이마르와 같은 동독의 유서 깊은 도시들은 확연히 쇠락한 상황이었다. 이러한 도시들은 점점 더 잊혀 가고 있었다.
 
중세 도시의 고풍을 자랑하는 크베들린부르크.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중세 도시의 고풍을 자랑하는 크베들린부르크.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1970년대 말부터 동독은 유명한 문화재들의 복원 작업을 시도했다. 드레스덴의 츠빙거궁전과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자기박물관 그리고 왕궁이 제모습을 되찾았다. 하지만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바로크식 건축물로 꼽히는 드레스덴 성모교회를 비롯해 많은 문화재는 계속 폐허로 남아 있었다. 더욱 난감했던 것은, 주거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구도심 주변 지역에 ‘플라텐바우텐(Plattenbauten)’이라고 불리는 사각형의 흉물스러운 싸구려 아파트를 대규모로 지었다는 사실이다. 이 때문에 대규모 노동자 밀집지역인 베를린-마르찬이나 화학공장 노동자들의 거주지였던 할레-노이슈타트는 발전을 상징하는 곳이 아니라 ‘노동자용 사물함’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전통적인 구도심 지역은 날로 쇠락해 갔다. 이런 지역의 월세는 2차대전 발발 이전 해인 1938년을 기준으로 동결된 채 인상하지 못하도록 동독 당국이 규제했던 관계로 집주인들은 주택임대를 통해 돈을 벌 수 없었다. 이 때문에 집들은 점점 더 망가지기만 했으며, 상황이 이렇게 되자 어떤 사람들은 집을 아예 당국에 양도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고급 여름 휴양지가 된 뤼겐섬.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고급 여름 휴양지가 된 뤼겐섬.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중세 도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던 크베들린부르크나 괴를리츠와 같은 도시의 전통 구도심은 1989년까지 전혀 손을 쓰지 못한 채 완전히 망가지고 있었다. 그러자 동독 당국은 구도심 전체를 철거하려는 방안까지 고려했는데, 천만다행히도 이 계획은 실행에 옮겨지지 않았다.
 
1989년 가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자 동독 사람들은 서독으로 몰려왔다. 반대로 동독을 방문한 서독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통일 이후 20년이 된 시점에 한 조사 결과에 따르면 구동독 출신 인구의 90% 이상이 서독 지역을 방문한 것으로 나타난 반면에 반대의 경우는 80% 미만인 것으로 조사됐다.
 
통일 독일은 동독 지역 구도심들을 복원하기 위해서 수십억 유로의 자금을 투입했다. 그 결과 현재 드레스덴이나 라이프치히, 포츠담과 같은 곳은 독일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거듭났다. 바우첸이나 크베들린부르크, 괴를리츠나 다른 많은 도시의 중세 모습 구도심들 또한 파괴되지 않고 보전하는 것이 가능했다.
 
일부 재건 프로젝트는 격렬한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드레스덴 성모교회 복원을 위해 민간자본이 사용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포츠담의 병영교회는 프로이센 시절의 군국주의를 상기시킨다는 비판으로 인해 재건 과정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베를린궁전의 재건도 간단치 않았다. 이 궁전은 2차 대전 중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는데도 공산주의 정권이 폭파시켜 버리고 그 자리에 ‘공화국궁전’이라는 명칭의 사각으로 된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건물을 지었다. 이제는 그 콘크리트 건물을 철거하고 옛 베를린궁전을 그대로 복원했다.
 
동독 시절 월세 동결로 낡은 채 방치된 비스마르 주택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동독 시절 월세 동결로 낡은 채 방치된 비스마르 주택들. [사진 독일연방문서보관소, 젤리거]

예전 동독 지역이 단순히 거대한 박물관이나 자연보호지역으로만 남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했다. 젊은이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활기차고 매력적인 도심이 필요했으며 해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한 현대적인 기반시설이 중요했다. 전체적으로 이러한 작업은 성공적으로 진행됐으며 라이프치히와 같은 도시들은 현재 호경기를 누리고 있다.
 
또한 동독 관광지들도 인기가 높아졌다. 뤼겐섬은 2차대전 이전에 베를린 사람들이 즐겨 찾던 장소였는데 이곳에 고급 호텔들이 들어서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관광객들이 여름 휴가지로 즐겨 찾는 곳이 됐다.
 
통일 이후 20년간 독일 부동산 가격은 매우 완만하게 올랐는데 2008년 금융위기 이후에 상승세가 가팔라졌다. 이러한 현상은 경제 상황이 좋은 남부 독일과 구동독 지역의 대도시들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수도인 베를린도 예외가 아니었다.
 
임대료 규제하자 집주인들 주택 방치
 
사민당과 녹색당 그리고 구동독의 공산당이었던 사회주의통일당의 후신 정당인 좌파당이 함께 구성한 베를린시의 좌파 정부가 ‘집세 상한선’ 정책을 도입한 것은 역설적이다. 이 정책의 핵심은 월세를 1㎡당 9유로(약 1만2000원) 수준으로 동결한다는 것인데, 이는 시세의 절반 또는 그 이하 가격이었다.
 
그 결과는 동독 시절에 나타났던 것과 같은 현상이 재현됐다. 집 주인들은 적정 이윤을 기대할 수 없게 되자 주택을 임대하지 않고 집에 대한 추가적인 투자도 하지 않았다. 월세가 하락한 것이 아니라 주택 공급만 줄어들었다. 사회적 약자 계층에 속하는 사람들은 집을 구하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급기야 집세 상한선 정책이 위헌이라는 판결을 내렸다.
 
한국은 분단 경험을 더욱 뼈저리게 겪고 있다. 북한 주민들은 한국 TV를 보지도 못하고 남쪽 사람들은 북한을 방문하지도 못한다. 북한에서만 막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금지하고 있는 것이다. 벌써 세 세대에 해당하는 시간이 흐르는 동안 전혀 교류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데 이런 식이라면 어떻게 통일에 관한 인식과 의지가 생겨날 수 있을 것인가?
 
젊은 세대의 통일에 대한 인식이 약해진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물론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남쪽의 젊은이들이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라는 주장을 할 수도 있다. 북한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번영과 자유를 가져다줄 통일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가능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북한과의 연계 없이 한국에서 통일 논의를 이끌어 가기는 쉽지 않다. 코로나 국면이 끝난 이후 한국이 먼저 개인의 북한 방문을 허용한다면 하나의 전기가 되지 않을까 싶다. ※번역 : 김영수 한스자이델재단 사무국장
 
베른하르트 젤리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
독일 킬대학 경제학 석·박사, 파리1대학 경제학 석사, 1998~2002년 한국외국어대 국제지역학대학원 전임강사, 2004~2006년 서울대 행정대학원 겸임교수, 2007년부터 독일 비텐-헤르데케대학 객원교수. 2002년부터 한스 자이델 재단 한국 사무소 대표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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