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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매치 첫승 후 메틸 알코올을 양주로 알고 자축, 0-12 참패

중앙선데이 2021.05.01 00:02 734호 25면 지면보기

[죽은 철인의 사회] 대표팀 1호 골키퍼 홍덕영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축구 대표팀 홍덕영 골키퍼가 망치로 축구화를 수선하고 있다. 함께 출전했던 선수들이 이 사진에 사인을 했다.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48년 런던 올림픽에 출전한 축구 대표팀 홍덕영 골키퍼가 망치로 축구화를 수선하고 있다. 함께 출전했던 선수들이 이 사진에 사인을 했다.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홍덕영(1926~2005) 선생은 영욕의 한국축구사를 상징하는 골키퍼다. 그는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의 첫 A매치로 기록된 멕시코와의 1948년 런던 올림픽 경기에서 5-3 승리를 지켜냈다. 멕시코전 다음 경기였던 스웨덴전에서는 대표팀 역대 최다 실점 겸 최대 스코어 차 패배(0-12)의 멍에를 뒤집어쓰기도 했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으로 열린 광복 후 첫 한·일전에서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지만, 월드컵 본선에선 2경기 16골을 허용했다. 그는 한국축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7명(김용식·홍덕영·김화집·이회택·차범근·정몽준·히딩크)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임원들이 양주 먹고 알코올 넣어둬
선수들 모르고 마셔 복통 나 대패

첫 한·일전 승리, 월드컵행 주역
명예의 전당 헌액된 축구사 증인

함흥 출신, 사전 30개 들고 월남
전차 잘못 타 서울대 대신 고대 가

스웨덴전 48개 슈팅에 멍투성이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분전하고 있는 홍덕영 골키퍼(가운데 넘어져 있는 선수).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에서 분전하고 있는 홍덕영 골키퍼(가운데 넘어져 있는 선수).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함경도 함흥 출신인 홍덕영은 함남중학 2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공격수로 뛰었으나 어느날 연습경기에서 부상당하는 바람에 골문을 지켰고, 가끔 골키퍼로 뛰었다. 그는 광복 이듬해인 1946년 큰형이 운영하는 서점에서 콘사이스(영일사전) 30권을 훔쳐 둘러메고 혼자 38선을 넘었다. 당시 서울의 하숙비가 한 달에 800원이었는데 콘사이스 한 권이 1500원이었다.
 
서대문 하숙집에 살던 홍덕영은 동대문에 있던 약학전문(현 서울대 약대)에 입학하려고 했는데 전차를 잘못 타는 바람에 보성전문(현 고려대) 시험을 쳤다. 보성전문에 합격했지만 콘사이스 30권을 다 팔아먹는 바람에 하숙집에서 쫓겨날 상황이었다. “축구부에 들어가면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는 선배의 말에 홍덕영은 무작정 축구부를 찾아간다. 주장 김용덕이 “포지션이 뭐냐”고 묻자 그는 “골키퍼”라고 대답했다. 조선 팔도에서 난다 긴다 하는 선수들이 모인 보전에서 공격수로는 살아남기 힘들 것 같았고, 전차 안에서 보전 학생들이 “우리는 골키퍼가 약해서 문제”라고 얘기하는 걸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홍덕영은 보전의 수문장이 됐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선수카드.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선수카드.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48년 런던 올림픽. ‘코리아’라는 국호로 첫 출전한 올림픽에서 축구 대표팀의 주전 골키퍼는 차순종이었으나 개막 직전 연습경기에서 차순종이 허리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10살이나 어린 홍덕영이 나서게 됐다.
 
첫 상대는 북중미 강호 멕시코. 한국은 불같은 투지와 체력을 앞세워 기선을 제압했고, 당황한 멕시코 선수들이 주춤주춤 물러서는 사이 잇따라 골을 터뜨렸다. 한국의 5-3 승리.
 
다음 상대인 스웨덴은 당시 대회 우승을 차지한 강호이긴 했지만 0-12는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였다. 참패의 이면에는 헛웃음이 나는 사연들이 숨어 있다. 다음은 이의재 선생이 쓴 『한국축구인물사』에 나오는 이야기다.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입장권.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입장권. [사진 이재형 축구자료수집가]

멕시코전 승리 후 선수들은 숙소로 돌아와 자축 파티를 했는데 술이 없었다. 선수 한 명이 임원 방에서 양주 한 병을 갖고 와 모두 나눠 먹었는데 알고 보니 메틸 알코올이었다고 한다. 한국 선수단 의무담당 의사가 양주 한 병을 사 갖고 와서 임원들과 나눠 먹고 빈 병에 선수들 치료를 위해 메틸 알코올을 가득 넣어두었다는 것이다. 그걸 마신 선수들이 복통에 시달려 컨디션이 엉망이 됐다는 이야기다. 당시 이유형 감독은 “메틸 알코올을 마신 건 방송국 아나운서”라며 소문을 진화하려 애썼다.
 
또 다른 패인은 축구화였다. 스웨덴전이 열린 날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당시 한국 선수들이 신은 축구화는 두꺼운 가죽 신발 바닥에 ‘뽕’을 못으로 박아 만든 것이었다. 뽕이란 여러 겹의 가죽을 아교로 접합한 뒤 동그랗게 오려낸 ‘스터드’를 말한다. 빗물에 젖은 가죽 축구화는 납덩어리처럼 무거웠고 뽕은 다 닳아서 죽죽 미끄러졌다. 스웨덴 선수들은 방수 처리한 축구화에 여러 종류의 스터드를 경기장 조건에 맞게 갈아 끼웠다.
 
은퇴 후에 국제심판으로도 활약
 
200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홍덕영 선생. [중앙포토]

2001년 중앙일보와 인터뷰할 당시의 홍덕영 선생. [중앙포토]

홍 선생도 1998년 축구 전문지 『베스트일레븐』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당시 축구볼은 빗물을 먹으면 볼 크기가 커지고 무거워졌다. 우리 선수들은 무거워진 볼을 차는데 다리가 아플 정도였다. 나도 긴장을 한 탓에 다리에 쥐가 났다. 내가 1954년 스위스 월드컵 헝가리전(0-9)에서 대포알 슈팅을 막느라 온 몸에 멍이 들었다고 기사가 났는데 사실은 런던 올림픽 스웨덴전이었다.”
 
스웨덴의 유효 슈팅은 48개였다고 한다. 그중 12개만 먹었으니 그만하면 선방했다고 할 수 있겠다.
 
광복 후 첫 한·일전은 1954년 3월에 열린 스위스 월드컵 극동지역 예선이었다. 한국과 일본이 홈앤드어웨이 경기를 펼쳐 승자가 본선에 진출하게 돼 있었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일본인을 대한민국 땅에 들일 수 없다”고 고집을 부려 두 경기 모두 일본에서 열렸다.
 
여기서 그 유명한 ‘현해탄’ 발언이 나온다. 이 대통령이 “일본에 지면 현해탄에 빠져 죽어라”고 했다는 건 요즘 말로 ‘가짜뉴스’다. 당시 축구협회장인 장택상 전 국무총리가 “지게 되면 현해탄을 건너오다가 모두 빠져서 고기밥이나 되라”고 했고, 출국인사 자리에서 다시 현해탄 얘기가 나왔다. 이유형 감독이 “각하. 만약 우리가 진다면 현해탄을 건너올 때 이 몸을 현해탄 바닷속에 던지겠습니다”고 말했다는 게 홍 선생의 증언이다.
 
홍 선생은 “우리 선수들 유니폼엔 백넘버를 달 만한 여유가 없었다. 대회 조직위원회에서 광목에다 등번호를 써준 것을 선수 각자가 바느질을 해 번호를 붙였다”고 회고했다. ‘현해탄 투혼’을 앞세운 한국은 1승1무(5-1, 2-2)로 일본을 누르고 첫 월드컵에 진출했다.
 
스위스 월드컵 개막일인 6월 16일 밤 9시에 한국 대표팀은 취리히에 도착했다. 미 공군 수송기를 탔는데 긴 널빤지로 만든 의자가 너무 높아서 발을 대롱대롱 흔드는 상태에서 48시간 비행기 여행을 했다는 것이다. 취리히에 도착했을 때 선수들이 제대로 걷지도 못했다고 한다. 헝가리전 0-9, 터키전 0-7 참패가 한국의 첫 월드컵 도전사였다.
 
은퇴 후 국제심판으로도 활약한 홍덕영 선생은 2002 한·일 월드컵의 성공적인 개최와 꿈같은 4강 신화를 맛본 뒤 2005년 9월 13일, 조용히 영면에 들었다.
 
골키퍼 손가락, 대포알 슈팅 막느라 휘어져
강한 슛을 막다가 손가락이 크게 휜 최상호 선생(위)과 김영광의 손. [중앙포토]

강한 슛을 막다가 손가락이 크게 휜 최상호 선생(위)과 김영광의 손. [중앙포토]

골키퍼는 골을 먹고 욕을 먹는 자리다. 손을 쓸 수 있는 특권이 있지만, 그 특권 때문에 수난도 당한다. 골키퍼 대부분의 손가락은 굽어 있다. 홍덕영· 함흥철 선생 등도 예외는 아니었다.
 
20년 전 내가 취재한 1950년대 국가대표 상비군 출신 최상호 선생은 오른손 검지손가락이 엄지 쪽으로 70도 정도, 왼손 검지도 60도 정도 휘어 있었다. 제대로 된 장갑도 없이 강한 슈팅을 막다 생긴 ‘산업재해’다.
 
최 선생은 “당시 골키퍼는 ‘시보리장갑’이라고 불린 군용 장갑을 꼈어요. 손가락이 아파도 경기에서 뺄까 봐 코치한테 말도 못했지. 아이스케키 막대기를 부목 삼아 붕대로 칭칭 감고 하룻밤을 잔 뒤 다음날 붕대를 풀면 원래대로 휘어져 있는 거야”라고 회고했다. 최 선생은 슛을 막을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찌릿찌릿 아팠다고 했다.
 
K리그 최고참 골키퍼로 성남 FC의 골문을 지키는 김영광(37)도 왼손 약지가 휘어 있다. 중3 때 손가락 뼛조각이 떨어진 상태에서 치료를 받지 못하고 계속 뛰는 바람에 휜 상태로 굳어져 반지를 낄 수도 없을 정도다. 프로축구 경기 때 김영광의 부모를 만난 적이 있다. 골키퍼는 몸도 아프지만 마음이 더 아픈 포지션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골키퍼 있다고 골 안 들어갑니까. 그런데도 영광이가 두 골만 먹으면 가족들 얼굴이 벌게집니다”고 했다.
 
정영재 스포츠전문기자/중앙콘텐트랩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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