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돈 있음 된다? 이 의지는 광기" 이건희 컬렉션에 놀란 미술계

중앙일보 2021.04.29 11:52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사진 대구미술관]

이인성, '노란 옷을 입은 여인'. [사진 대구미술관]

"돈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어림도 없는 얘기다." 

28일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평생 모은 문화재와 미술품이 기증된 날 미술계 전문가들은 이렇게 입을 모았다. 유족들이 결정한 기증 규모도 화제이지만 " 이건희 컬렉션에 담긴 가치와 의미를 우리 사회가 반드시 짚어보아야 한다"는 얘기다. 이들은 " '총 감정가 3조원, 시가 10조원'이라는 말로 요약되거나 설명될 수 없는, 광기에 가까운 의지가 그 안에 있었다"며 "이건희 컬렉션의 가치를 돈으로만 논하는 우리 문화계 의식이 안타깝다"고 했다. 그들은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일까. 이건희 컬렉션을 바라보는 전문가들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건희 컬렉션의 진짜 가치
"홀린듯이 열정에 차서 모았다"
"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다"

4대 요건 다 갖춘 '컬렉션의 정석' 

한국 산수화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사진 국립현대미술관]

한국 산수화의 최고봉으로 평가 받는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사진 국립현대미술관]

미술사학자 안휘준 서울대 명예교수는 "이 컬렉션은 사전에 고증을 받고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고 수집한 것"이라며  "이건희 컬렉션 자체가 명품"이라고 강조했다. 안 명예교수는 "국보로 지정이 됐든 안됐든 모든 문화재와 미술품이 다 중요하다. 지금은 개별 작품보다는 소장품을 하나의 전체로서, 그 문화재와 미술품이 집합적으로 가진 의미가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번 기증 목록을 보고 안 교수가 가장 반긴 것은 불교 불화인 '천수관음보살도'다. 그는 "한국 미술사에서 불화가 매우 중요한데도 그동안 국립중앙박물관에 고려 시대를 대표하는 불화가 없어 늘 안타까웠다"며 "이제야 빈 자리가 메꿔지게 됐다. 국립박물관이 비로소 부끄러움을 면하게 됐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이건희 컬렉션은 절대로 그냥 이뤄진 것이 아니다"라며 "좋은 컬렉션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네 가지 요건이 모두 충족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가 말하는 4가지 요건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문화재와 미술에 대한 지대한 관심이 있어야 한다. 그냥 관심이 아니라 말그대로 지대한 관심이어야 한다.
둘째, 좋은 작품과 중요한 문화재를 알아보는 높은 안목이 있어야 한다. 
셋째, 좋은 작품을 만났을 때 바로 결정할 수 있는 결단력도 필요하다. 소장할 기회가 왔는데 우물쭈물하다가 놓치는 경우도 많다. 
넷째, 그걸 확보할 수 있는 재정적 능력이 있어야 한다. 
 
안 교수는 "간송 컬렉션과 마찬가지로 이건희 회장은 그 네 가지 조건을 갖추고 수집했다"며 "절대로 돈만 있어서 되는 게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했다. "한 소장가가 평생 들인 노력의 가치를 알지 못하면 이번에 우리 사회가 크게 배우고 갈 부분을 놓치고 마는 것"이라고도 덧붙였다. "이번 기증에 대해 국가와 정부와 국민이 진심으로 고마워해야 하고 이에 대해 합당한 예우를 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가 생각하는 합당한 예우란 컬렉션의 의미와 그 중요성을 국민이 알게끔 전시를 잘 하는 일이다. 도록 역시 최대한 성의 있게, 명품 수준으로 만들어야 한다. 안 교수는 "이번 기증을 통해 온 국민이 문화를 즐기고 누리는 것을 넘어서 문화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리는 기회로 삼아야 한다"면서 "정부와 각 미술관이  그 노력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우리 모두 관심 있게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홀린 듯 열기에 차서 모은 사람"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시장, Marché de Pontoise,, 189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카미유 피사로, 퐁투아즈 시장, Marché de Pontoise,, 1893.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회장 생전에 그를 가까이서 자주 만났던 한 원로 미술가는 "그(이건희 회장)는 홀린 것처럼 열기에 차서 열심히 모았다. 그것은 돈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건희 회장은 자신의 아버지(이병철 전 회장)보다도 100배 열정을 갖고 모았다. 한 기자가 그에게 왜 그렇게 열심히 모으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나라가 하지 못하는 일은 저 같은 입장에 있는 사람이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고 전했다. 이 미술가는 이어 "그럼 사명감 때문에 모으는 것이냐고 기자가 물었더니 사명감이라기 보다는 우선은 내가 좋아서, 홀려서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덧붙였다. 이 원로 미술가는 "완전히 홀린 식으로 수집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라며 "부디 이 컬렉션이 잘 지켜져야 한다. '이것은 나라의 것'이라고 했던 그의 뜻을 잘 살려야 한다"고 말했다. 
 
이 원로 예술가의 발언은 "내겐 이건희 회장은 사업가라기보다 어딘가 투철한 철인(哲人)이나 광기를 품은 예술가로 생각되었다"는 이우환(85) 화백의 말과 일치한다. 이 화백은 문예지 '현대문학' 3월호에 '거인이 있었다'라는 제목으로 고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을 추모한 글을 썼다. 이 글에서 그는 "이건희 회장은 한국의 미술품이라 하더라도 작품의 존재감이나 완성도가 높은 것을 추구하며, 언제나 세계적인 시야로 작품을 선별했다"며 "특히 한국의 고(古)도자기 컬렉션을 향한 정열에는 상상을 초월한 에로스(사랑)가 느껴진다"고 쓴 바 있다. 
 
이우환 화백은 평소 주변의 지인들에게 "이건희 회장은 국보같은 사람"이라고 강조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화백은 "시간이 갈수록 그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며 "이 회장은 정말 유별나고 독보적인 사람이었다"고 말하곤 했다. 
 

젊은 작가까지 배려했다  

박대성, '일출봉'.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사진 전남도립미술관]

박대성, '일출봉'. 전남도립미술관에 기증됐다. [사진 전남도립미술관]

이번에 김환기의 '여인들과 항아리', 박수근의 '절구질하는 여인', 이중섭의 '황소', 장욱진의 '소녀/나룻배' 등 한국 근대 미술 대표 작가들의 작품 1600여점은 국립현대미술관 등에 기증됐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와 같은 규모와 퀄리티의 컬렉션이 국가 미술관에 들어온다는 것은 앞으로 내 생애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일일 것"이라며 "국가 입장에서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는 기회"라고 말했다. 윤 관장은 이어 "돈만 있다고 모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앞으로 누가 이 정도의 컬렉션을 만들 수 있겠냐"고 반문했다. 
 
윤 관장은 "사람들은 이건희 컬렉션의 물량을 보고 먼저 놀라고, 나중엔 그 수준을 보고 놀랐다. 그리고 저는 그 수집품의 다양성을 보고 더 놀랐다"고 전했다. 내로라하는 작가들은 대표작은 물론 젊은 작가들까지도 배려해 수집했다는 설명이다. 윤 관장은 "보통 컬렉터들은 명품 위주로만 모으는데 이건희 컬렉션은 그 수준을 훨씬 넘어섰다. 이는 다양한 예술가들에 대한 배려가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라고 말했다.  "미술계를 폭넓게 본 시각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컬렉션"이라는 설명이다. 윤 관장은 "작품 목록을 보면 다양한 작가 차원에서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균형적 안목으로 폭넓게 수집한 것을 볼 수 있다"며 "앞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은 보존과 연구, 전시의 책무를 다하는 데 온 역량을 쏟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은주 기자의 다른 기사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