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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의 시시각각] 윤여정처럼 나이들기

중앙일보 2021.04.28 00:39 종합 34면 지면보기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재기넘치는 수상 소감으로 또 한번 찬사를 받았다. [로이터=연합뉴스]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미나리'로 한국 배우 최초로 여우조연상을 수상한 윤여정. 재기넘치는 수상 소감으로 또 한번 찬사를 받았다. [로이터=연합뉴스]

올해 나이 74세. 그러나 그에게 ‘노배우’랄지 ‘노익장’이란 수사를 들이대는 건 실례로 느껴진다. ‘나이는 숫자일 뿐’이란 말이 딱이다. '윤며들다'(윤여정에게 스며들다)란 신조어와 함께 2030도 열광한다. 이용자의 70%가 1020이라는 여성 패션 플랫폼, ‘핫스타’의 전유물인 맥주 광고 모델로도 발탁됐다. 평생 빛나는 주연보다는 남을 돋보이게 하는 조연 자리에 주로 서 있었고, 그 조연 연기로 한국 배우 최초로 오스카를 거머쥔 윤여정 얘기다. 
 수상 소감도 그답게 재기 넘쳤다. 다른 후보들을 거론하며 “다른 영화에서 다른 역할을 맡았는데 어떻게 경쟁할 수 있는가. 우리는 각자의 영화에서 최고였다. 내가 운이 더 좋았다”고 했다. 이 대목에서 경쟁 후보였던 어맨다 사이프리드가 “아이 러브 허”라고 혼잣말하며 박수치는 모습이 화면 가득 잡혔다. “내 이름을 잘못 발음해 온 걸 오늘은 용서한다”거나 “아들들아, 이게 엄마가 열심히 일한 결과란다”라고 할 땐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본업을 잘하는데 말까지 잘해서 상대를 매료시키는 건 지난해 아카데미를 휩쓴 봉준호 감독과 똑 닮았다. 

귀여운 할머니 연기로 오스카
탈권위 솔직함 2030도 열광
꼰대 되지 않으려면 배우라

 1987년 베니스영화제 강수연(‘씨받이’, 임권택 감독)을 필두로 2007년 칸영화제 전도연(‘밀양’, 이창동 감독), 2017년 베를린영화제 김민희(‘밤의 해변에서 혼자’, 홍상수 감독)까지 3대 영화제에서 첫 주연상을 따낸 건 여배우들이었다. 오리엔탈리즘에 가까운 한국적 소재의 ‘씨받이’ 강수연, 한국 영화 특유의 폭발적인 감정 연기를 선보인 전도연, 홍상수의 뮤즈 김민희. 마침내 아카데미의 빗장을 연 건 70대 윤여정이었다. 한국인 이민자 가정 하면 떠오르는 억척스러운 할머니라는 전형성에서 벗어난 귀엽고 엉뚱한 할머니, 일상 연기가 빛을 발했다. 
 윤여정은 수상 소감에서 데뷔작인 김기영 감독의 ‘화녀’도 언급했다. 알려진 대로 올해는 윤여정이 한국 영화사의 독보적 작품 ‘화녀’의 파격 연기로 스크린에 데뷔한 지 50년이다. 이후 결혼·이혼 공백기를 겪었고 이혼녀라는 편견, 허스키한 목소리 등 핸디캡과 싸워야 했다. 빼어난 미모나 청순함 또는 섹스 어필로 승부를 본 당대 여배우들과 달리 자기주장이 강하고 할 말은 하는 주체적인 캐릭터를 연기했다. 싱글맘 생계형 배우로 1년에 서너 편씩 다작을 했고, 바람난 시어머니(‘바람난 가족’), 박카스 할머니(‘죽여주는 여자’) 등 파격적 역할에서 강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스포트라이트가 집중되는 화려한 스타인 적은 없지만, 연기와 삶 모두에서 전형성을 벗어나며 시대의 한계에 도전장을 던져 온 문제적 배우다.   
 윤여정 하면 특히 젊은이들과 격의 없이 어울리는 장면이 많이 기억된다. 예능에선 30~40살 연하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고, 여배우들이 실명으로 나오는 페이크 다큐인 ‘여배우들’에서도 후배들과 어울렸다. 사적으로도 30~40살 연하 지인들과 친분이 깊다. 시원하게 직설을 날리지만 권위를 내세우거나 자기를 강요하지 않는 탈권위, 위선과 거짓 없는 솔직·투명·당당함, 자존감 넘치는 세련된 매너와 유머 감각 등이 나이를 넘어 소통하는 비결이다. 인터넷에는 ‘세상 힙하고 쿨한 힙머니'(힙+할머니)란 찬사가 많다. 70대 배우로 이례적으로 2030의 워너비 스타가 된 이유다. 잘 늙고 싶다면, 꼰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MZ 세대와 소통하고 싶다면 윤여정을 배우면 될 것 같다. 진짜 어른 대접을 받고 싶어도 마찬가지다. 
 2009년 ‘여배우들’에서 윤여정은 “(여배우는) 박수받는 만큼 돌멩이질 받는 것 같다”고 토로했다. “(송)혜교는 중국 시장, (최)지우는 일본 시장, 나는 재래시장이나 지킬라구”라고 농담했는데, 재래시장 아닌 할리우드를 공략해 버렸다. “내가 기억이 있는 한, 대사를 외울 수 있는 한 (연기를) 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도 했는데, 물론이다. 그는 영원한 현역, ‘끝’ 없는 배우니까.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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