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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자랑스러운 ‘검은 머리 외국인’

중앙일보 2021.04.28 00:20 종합 30면 지면보기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전수진 투데이&피플팀장

리 아이작 정이 아니었다면 배우 윤여정 씨의 오스카 트로피도 없었다. 한국에서 ‘정이삭’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는 미국인 정 감독 얘기다. 아쉽게도 본인은 오스카 트로피 운이 따르지 않았지만, 그에게도 축하와 응원을 보낸다. 그의 쾌거를 보며 떠오른 문구가 ‘검은 머리 외국인’이라는 건 서글펐지만. 2019년 더불어민주당 이해식 당시 대변인이 블룸버그 통신 기사를 (정확히는 그 기사의 제목을) 반박한답시고 내밀었던 그 무지몽매한 표현 말이다. 당시 민주당의 천박한 편 가르기 논평은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기사를 쓴 기자가 한국계라는 점에 착안했다. 정 감독도 굳이 따지자면 검은 머리 외국인이다.
 
갑자기 영웅이 됐지만(‘대한의 건아’ 같은 표현이 안 나온 게 다행), 그의 무명기는 길었다. 인천에서 교편을 잡았던 때, 그는 외로웠다. 그런 그가  고독과 무시의 시간을 묵묵히 견디며 성공을 일구자, 우린 온갖 유난을 떨며 그를 허둥지둥 자랑스러워한다. 검은 머리의 미국인인 그에게 검은 머리 한국 정치인들이며 외교관들이 나서 감격 운운하며 숟가락 얹기에 바쁘다. 자기의 할 일을 했을 뿐인 한국계 기자에겐 어떻게 당신 따위가 그럴 수 있느냐며 아귀처럼 달려들어 악플 테러를 한 이 나라에서 말이다. 2019년 당시 논평이니 고릿적 이야기일 뿐이라고? 악플 테러의 상처는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다.
 
노트북을 열며 4/28

노트북을 열며 4/28

‘검은 머리 외국인’ 표현을 두고 당시 이해식 대변인은 “네티즌들이 인터넷 공간에서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다”며 네티즌 뒤로 숨어버렸다. 사실 이런 말이 나돈다는 팩트 자체가 그 사회의 후진성을 반영한다. 노랑머리 한국인도, 검은 머리 외국인도, 한국어를 못하지만 한국계라는 게 자랑스러운 자이니치(在日) 교포들도 많은 게 현실이다. 여자가 되고 싶어 고통스러운 남자도, 그 반대도 우리 사회의 그림자 속에 숱하다. 태어날 때부터 어쩔 수 없이 지닌 것을 두고, 사람을 차별하거나 부러워하는 것 자체가 후진 일 아닌가.
 
10년 가까이 기자로 일했던 영어신문, 코리아 중앙데일리의 한 캐나다인 에디터가 불같이 화를 낸 적이 있다. 한국인은 단일민족이라 자랑스럽다는 내용의 모 유명인사의 칼럼을 두고서다. 그는 “팩트도 아닌 이런 신화를 만드는 게 차별”이라고 열변을 토했다. 틀린 말, 아니다.
 
윤여정씨가 오스카 트로피를 탄 뒤 기자회견에서 한 말로 끝을 갈음한다. “무지개도 일곱 가지 색으로 이뤄져 있다. 백인과 흑인, 황인종으로 나누거나, 게이와 게이 아닌 사람을 구분하고 싶지 않다. 우리는 같은 마음을 가진 평등한 사람이다.”
 
전수진 투데이&피플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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