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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정상회담 의전 푸대접…내가 남자라도 그랬겠나”

중앙일보 2021.04.28 00:02 종합 14면 지면보기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왼쪽)이 지난 6일 EU·터키 정상회담에서 정상 좌석이 아닌 소파에 떨어져 앉아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왼쪽)이 지난 6일 EU·터키 정상회담에서 정상 좌석이 아닌 소파에 떨어져 앉아 있다. [신화통신=연합뉴스]

“내가 수트 차림에 넥타이를 매고 있었어도 그런 일이 생겼을까.”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 분노
상석 대신 아래쪽 소파에 앉혀
“외교결례 아닌 여성차별에 상처
세계 기구 리더인 나도 이런 경험”

최근 터키와의 정상회담에서 푸대접을 받은 우르즐라 폰데어라이엔(사진)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여성 차별에 대한 비판을 쏟아냈다. 지난 6일 EU-터키 정상회담에서 벌어진 이른바 ‘소파게이트’를 꺼내든 것이다.
 
26일(현지시간) 영국 가디언 등에 따르면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유럽의회 연설에서 ‘소파게이트’를 거론하며 핵심은 ‘외교 결례’가 아닌 우리 주변에 만연한 ‘여성 차별 인식’이라고 지적했다. 이날 그는 “나는 EU 집행위의 첫 여성 위원장이다. 내 자격에 걸맞게 대우받기를 원했다. 하지만 2주 전 터키를 방문했을 때 그렇지 못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이어 작심한 듯 “유럽 조약에서 내가 왜 그런 대우를 받아야 했는지 정당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결국 여자이기 때문이라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었다”면서 “내가 수트 차림에, 넥타이를 맸어도 이런 일이 일어났겠느냐”고 반문했다.
 
폰 데어 라이엔

폰 데어 라이엔

당시 느꼈던 감정도 솔직하게 털어놨다. “나는 여자로서, 그리고 유럽인으로서 상처받았고, 외로움을 느꼈다”면서 “좌석 배치나 의전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여성) 존재 가치에 미치는 사건이다. 여성이 (남성과) 평등한 대우를 받기 위해 얼마나 더 먼 길을 가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이어 “여성이라면 누구나 비슷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세계 기구의 리더로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특권층인 나도 이런 경험을 했다”며 “무관심 속에 힘없이 차별당하는 여성의 인권에 관심을 보여달라”고 호소했다.
 
앞서 여성 인권 문제를 둘러싸고 마찰을 빚어온 EU와 터키는 지난 6일 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정상회담에서 좌석 배치를 놓고 논란을 벌였다. 당시 촬영된 영상을 보면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과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각각 상석에 나란히 마주 보며 앉았다. 반면 뒤따라 들어온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상석에 따로 의자가 제공되지 않아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터키 측은 끝까지 의자를 가져다주지 않았고,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아래편 소파에 떨어져 앉아야 했다. EU 집행위원장은 외교 의전상 국가 정상 대우를 받아야 하지만 결국 자신보다 서열이 낮은 터키 외무장관과 마주 앉는 형태가 됐다.
 
영상이 공개되자 유럽권에서는 터키가 의도적으로 여성인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을 모욕하고 ‘외교 결례’를 범했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유럽 주요 언론은 이 상황을 ‘소파게이트(sofagate)’라고 칭했다. 터키가 여성에 대한 폭력과 가정폭력 방지 및 근절을 위한 EU의 협약인 이스탄불 협약 탈퇴를 두고 국제적인 비판에 직면하자 불편한 속내를 은근히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나왔다.
 
이날 폰데어라이엔 집행위원장은 에르도안 대통령이나 미셸 의장을 공개적으로 비판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터키가 이스탄불 협약에서 탈퇴하는 것을 깊이 우려한다”면서 “앞으로 여성을 폭력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 EU 집행위의 우선 과제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민정 기자 lee.minjung2@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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