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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본에 "…"만 있어도 미친 연기, 국민엄마 거부한 윤여정

중앙일보 2021.04.27 00:02 종합 4면 지면보기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윤여정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윤여정

일흔넷, 연기 인생 56년 차에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을 차지한 배우 윤여정. 미국 매체 버라이어티가 그를 올해 오스카상감에 일찌감치 점찍으며 꼽은 영화 ‘미나리’ 속 명대사는 “뻑났다. 비켜라, 이놈아!”다. 영어 자막도 한국말 비속어(뻑·bbuk)를 그대로 살린 “It’s a bbuk all you bastards!” 어린 손자 데이빗(앨런 김)과 화투를 치며 여느 할머니답지 않게 승부에 몰두한 순자(윤여정)의 추임새가 미국인들 눈에도 재미났던 모양이다. “국민 엄마는 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말해 온 윤여정은 생애 첫 출연한 미국 영화 속 한국 할머니 역마저 자기답게 평정했다.
 

연기 인생 56년 차 74세 윤여정
TBC 알바 하다 탤런트 공채 합격
김기영 감독 ‘화녀’로 영화 데뷔
이혼·목소리 이유 한때 거부감 1위
최근 TV 예능으로 매력 발산

윤여정은 뭐든 ‘전형적인’ 것은 거부해 온 배우다. 데뷔부터 남달랐다. 초등학교 양호교사였던 어머니는 윤여정 나이 열 살 무렵 남편을 여의고 홀로 세 딸을 키웠다(LG 첫 여성 임원을 지낸 윤여순 전 LG아트센터 대표가 막내다). 맏딸 윤여정은 어머니의 꿈이었던 의사가 되지 못했다. 지망한 대학에 떨어져 한양대 국문과에 가게 되자 그는 직접 등록금을 벌려고 TBC 방송국에서 사회자에게 선물을 전달하는 보조 아르바이트를 했다. 주변의 권유로 대학 1학년 때인 1966년 TBC-TV 탤런트 공채에 도전해 합격했다.
 
1976년 일일연속극 ‘여고동창생’에 출연한 윤여정(오른쪽 둘째). 김윤경·남정임(고)·나문희·김혜자와 함께 했다(왼쪽부터). [중앙포토]

1976년 일일연속극 ‘여고동창생’에 출연한 윤여정(오른쪽 둘째). 김윤경·남정임(고)·나문희·김혜자와 함께 했다(왼쪽부터). [중앙포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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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 강한 외모와 톡톡 튀는 말투. 타고난 끼로 1967년 드라마 ‘미스터 곰’에서 신인탤런트상을 타며 스타덤에 올랐다. MBC로 이적한 뒤 71년 ‘장희빈’에선 표독스러운 장희빈으로 변신했다. 분노한 시청자들이 벽에 붙은 얼굴 사진마다 눈에 구멍을 뚫는 통에 첫 모델로 발탁됐던 ‘오란씨’ 음료 광고에서 이듬해 잘렸다고 한다.  
 
팜므파탈 이미지는 같은 해 스크린 데뷔작 ‘화녀’로 이어졌다. 김기영 감독이 자신의 흑백 영화 ‘하녀’(1960)를 컬러로 재해석한 영화. 시골에서 상경해 식모살이하던 집의 유부남(남궁원)과 외도 끝에 파국에 이르는 명자를 연기해 시체스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 대종상 신인상 등을 차지했다. 한양대 은사 박목월 시인에게 수필 실력을 칭찬받기도 한 그를 김 감독은 “내 말을 이해한 유일한 배우”라며 신임했다.  
 
1970년대 중반 가수 조영남과 결혼, 미국에 건너가 두 아들을 낳으며 은퇴하는 듯했지만 이혼 후 13년 만에 귀국하며 생업 전선에 나섰다. 미국에서 시급 2.75달러 마켓 점원으로 일해선 먹고사는 데 답이 안 나왔다고 했다. ‘이혼’ 딱지가 주홍글씨 같던 시절, 그는 환영받지 못했다. ‘시청자 거부감 1위’란 꼬리표가 붙었다. “배우 그만두려고 했다. 내가 뭐 잘못한 것도 아니고 타고난 목소리 가지고 뭐라고 하는 게 인권유린 같았다”고 2013년 SBS 토크쇼 ‘힐링캠프’에서 고백했다.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윤여정과 한예리. 윤여정은 코로나19로 한 명만 동반할 수 있는 시상식 초대장을 딸 모니카를 연기한 후배 한예리에게 줬다. 아들과 이인아 프로듀서가 한예리에게 양보하면서다. [EPA=연합뉴스]

25일(현지시간) 제93회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한 윤여정과 한예리. 윤여정은 코로나19로 한 명만 동반할 수 있는 시상식 초대장을 딸 모니카를 연기한 후배 한예리에게 줬다. 아들과 이인아 프로듀서가 한예리에게 양보하면서다. [EPA=연합뉴스]

이후 조·단역 가리지 않았다. 김수현 작가의 ‘사랑과 야망’ ‘작별’ ‘목욕탕집 남자들’ 등 히트작에 출연했고, 시청률 60%를 넘나든 MBC 드라마 ‘사랑이 뭐길래’(1991)에선 사회적 성공 대신 결혼을 택하려는 딸(하희라)에게 “널 확실하게 빛내면서 살라”며 설득하는 엄마가 됐다. 영화는 보다 강렬했다. 박철수 감독의 ‘어미’(1985)에선 인신매매당한 딸이 자살하자 복수에 뛰어든 엄마가 됐다. 이어 임상수·홍상수, 이른바 ‘투 상수’ 감독의 페르소나로 새 전성기를 맞는다. 임 감독이 김기영 감독의 동명 영화를 재해석한 ‘하녀’에선 늙은 하녀 병식 역할로 대종상·시네마닐라 영화제·아시안필름어워드 등 2010년 여우조연상을 싹쓸이했다.
 
그해 홍 감독의 ‘하하하’와 ‘하녀’로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됐다. 2년 뒤엔 임 감독의 ‘돈의 맛’에서 필리핀 하녀와 바람난 남편에게 맞서 젊은 남자(김강우)를 돈으로 탐하는 재벌가 안주인으로 변신, 또 다시 칸 경쟁부문에 진출했다.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윤여정은 누구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 윤여정은 누구

노희경 작가가 “지문 하나 없이 ‘…’만 있어도 그녀는 미치게 연기를 해낸다”(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고 표현한 윤여정이다. 2016년 이재용 감독의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서 노련함은 빛을 더 발했다.
 
tvN 나영석 PD 사단 예능 ‘꽃보다 누나’ ‘윤식당’ ‘윤스테이’ 등에서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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