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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오빠와 귀에 콩알 넣기 장난, 그게 삶 절반 꺾은 사고

중앙일보 2021.04.25 07:00

[더,오래]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50) 

(지난 49회에 이어)그날 밤부터 며칠을, 젖먹이였던 내가 밤낮으로 보채고 울었다. 온몸이 불덩이였고 열이 펄펄 끓었다. 목과 얼굴과 귀 주변이 벌겋게 부어올라 가라앉지 않았고 울다울다 아기는 지쳐갔다. 그 당시 박정희 정부의 화전민 이주정책이 심했다. 산을 밭으로 개간하고 나무를 불태우다 잡히면 대처로 내쫓김을 당하던 때였다. 그렇다 보니 산속 깊이 화전민으로 숨어 살던 부모님과 우리 사남매. 지금 가 봐도 귀신 나올 듯 산 깊은 곳이니 그 시절이야 말해 뭣하랴. 그때는 마을에 버스도 없었다. 첩첩산중에 병원이 구만리니 갈 수도 없었다. 병원비도 있을 리 만무했다.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울고 보채는 어린 나를 업고 여러 날 밤새우는 것뿐이었다.
 
그때는 용문면에 나와서 살았기에 가난했어도 마음먹으면 병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나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에 잠시 다녀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싸웠다. [사진 pixabay]

그때는 용문면에 나와서 살았기에 가난했어도 마음먹으면 병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나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에 잠시 다녀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싸웠다. [사진 pixabay]

 
며칠 후 이제는 여덟 살 작은 오빠까지 얼굴과 목과 귀 주변이 붓고 열이 펄펄 끓었다. 아이는 밤낮을 데굴데굴 구르며 귀가 아프다고 울부짖었다. 엄마에게 자꾸만 귀가 간지럽고 아프다고 울었다. 혹시나 싶었던 엄마가 어린 오빠 귓속을 보았더니 동그란 알갱이가 보이더라는 것이다. 너무 놀랍고 기가 막혔던 엄마는 오빠에게 귀에다 무엇을 넣었냐고 물었다. 어린 오빠 말에 의하면, 며칠 전 콩 털던 마당에서 동생인 나를 데리고 귀에다 콩알 여러 개를 넣고 누가 먼저 빨리 빼내나 내기를 했다는 것이다. 그때 어린 내게도 귀에 콩알을 넣으라고 가르쳐주었다는 것이었다. (이런! 된장!) 어린 나는 오빠에게 질세라 열심히 콩알을 귓속에 넣었다고 오빠가 말했다. 그날 엄마는 귀이개로 오빠와 내 귀를 수없이 파고 또 팠다. 퉁퉁 불은 콩알 조각을 꺼내려 했지만 허사였다. 어린아이들의 작은 귓속에서 두세 배로 불은 콩이 작은 귓구멍 밖으로 나오기는 불가능했다. 그 후 오빠와 나는 심한 중이염을 앓았고 영원히 한쪽 귀 청력을 잃은 불구가 되었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끔찍한 기억은 그 후의 내 삶이었다. 왼쪽 귀에서 갈수록 누런 피고름이 쏟아졌다. 얼마나 심했는지, 귀를 기울이면 고름이 목을 타고 냇물처럼 줄줄 흘러내릴 정도였다. 그때부터 내 편두통은 만성이 되었다. 더 창피한 것은 다음이었다. 탈지면 솜이 워낙 귀했던 시절이었다. 더구나 내가 여덟 살 때 용문면으로 강제이주된 화전민들. 그때부터 아버지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고 엄마는 가장이 되어 서울로 가 돈을 벌어야 했다. 이중 살림이 시작된 것이었다. 그러니 내 귀가 심한 중이염으로 썩어들어 가고 고름이 목을 타고 흘러내려도 누구 하나 관심이 없었다.

 
그때는 용문면에 나와서 살았기에 가난했어도 마음먹으면 병원에 갈 수 있었을 것이나 갈 수 없었다. 아버지는 일요일에 잠시 다녀가는 엄마를 볼 때마다 싸웠고 무참히 손찌검했다. 살림살이가 늘 머리 위로 날아다녔고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었다. 어렸던 나는 아버지가 엄마 때리는 모습을 볼 때마다 공포로 온몸이 덜덜 떨렸다. 늘 아버지가 두려워 벌벌 떨며 지냈다. 그랬으니 엄마는 집에 내려올 때마다 매 맞다 서울로 갔다. 나는 주먹질 선수인 아버지에게도 내 귀가 아프다고, 내 귀가 지금 점점 썩어들어 가고 있다고 말하지 못했다.

 
어린 시절 오빠 말에 의하면, 콩 털던 마당에서 동생인 나를 데리고 귀에다 콩알 여러 개를 넣고 누가 먼저 빨리 빼내나 내기를 했단다. 그날 엄마는 귀이개로 오빠와 내 귀를 수없이 파고 또 팠다. [사진 pixnio]

어린 시절 오빠 말에 의하면, 콩 털던 마당에서 동생인 나를 데리고 귀에다 콩알 여러 개를 넣고 누가 먼저 빨리 빼내나 내기를 했단다. 그날 엄마는 귀이개로 오빠와 내 귀를 수없이 파고 또 팠다. [사진 pixnio]

 
그 후로 점점 더 심해진 나의 슬픈 중이염. 아침이면 베개가 누렇고 끈적이는 것에 젖어있는 것은 일상이었다. 그 많은 고름이 도대체 내 작은 귓속 어디서 끝없이 샘솟는지 정말 징글징글했고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고름은 점점 더 심해지다 못해 귀를 덮는 단발머리에 젖어 떡 졌다. 가끔 엄마와 아버지가 고름이 말라붙은 여학생 딸의 목과 귀를 보기도 했다. 두어 번 한숨 쉬는 것이 전부였다. 함께 살며 내 모습을 물끄러미 본 아버지는 한 번도 나를 병원에 데려가지 않으셨다. 딸아이 치료할 이비인후과 병원비는 없어도, 아픈 몸으로 술집만은 꾸준히 잘 가셨던 아버지. 객지에서 살던 엄마가 어렵게 금반지 계를 들어 마련한 석 돈짜리 금가락지. 아버지는 그 금가락지를 당신이 소중히 갖고 있겠다며 엄마에게서 건네받았다. 그 비싼 금가락지는 며칠도 못 가 아버지 도박판과 현란한 유행가와 작부 치마 속으로 사라져버리고 만 사실을 나중에 엄마에게 들었다.

 
가뜩이나 비린 것 먹을 형편도 아니었지만, 나는 중이염 때문에 특히 비린 것을 못 먹었다. 계란이나 고등어, 김이나 어묵 같은 반찬을 먹은 날이면 여지없이 고름은 뜨끈뜨끈 삼복의 논물처럼 내 몸 밖으로 출렁이며 밀려 나왔다. 그 불결하고 끈적이고 냄새나는 참담한 액체는 내 곁에 누가 있든 울컥울컥 범람했다. 아침마다 세수하고 코를 풀면, 비강에 쏠린 압력으로 왼쪽 귀에서 부글부글 거품이 일다가 이내 또다시 뜨끈한 고름이 밖으로 줄줄 흘러나왔다. 남에게 보이지나 않게 틀어막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우리 집엔 솜도 없었다. 궁여지책으로 내가 쓴 방법은.(다음회에 계속)
 
시인·소설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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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희 김명희 시인·소설가 필진

[김명희의 내가 본 희망과 절망] 희망과 절망은 한 몸이고, 동전의 양면이다. 누구는 절망의 조건이 많아도 끝까지 희망을 바라보고, 누구는 희망의 조건이 많아도 절망에 빠져 세상을 산다. 그대 마음은 지금 어느 쪽을 향해 있는가? 우리는 매 순간 무의식 속에 희망과 절망을 선택하며 살아간다. 그 선택은 눈금 하나 차이지만, 뒤따라오는 삶의 결과는 엄청나게 다르다. 희망도 습관이다. 절망을 극복하게 만드는 희망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최대 원동력이다. 그동안 길 위에서 본 무수한 절망과 희망을 들려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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