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문희상 "강국 틈바구니는 숙명, 미국 풀 중국 풀 가려 먹을 수 있나" [월간중앙]

중앙일보 2021.04.25 00:03
■ 국익을 우선에 두는, 유연하고 변형 가능한 실용 외교 절실
■ 안보·경제 다 중요, 미·중 가운데 한쪽 택하는 건 어리석은 일

특별 인터뷰 | '외교전문가' 문희상 前 국회의장의 긴급 제언

■ 한·일 관계 해법은 단 하나, 정상회담 통해 모든 문제 풀어야
■ ‘자원의 보고’ 러시아와 힘 합치면 상승작용 기대할 수 있어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실용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사진: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은 문희상 전 국회의장이 월간중앙과의 인터뷰에서 실용 외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 사진: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문희상 전 국회의장은 자타공인 외교 전문가다. 6선 의원 출신인 그는 의정활동 기간 가운데 꽤 오랜 시간을 외교통일위원회(위원장 포함)에서 보냈다. 미 행정부는 물론이고 상·하원에 문 전 의장과 교분이 두터운 인사가 적지 않다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다.
 
문 전 의장은 문재인 정부 출범 직후였던 2017년 5월에는 문재인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해 당시 아베 신조 총리와 면담했다. 그 자리에서 문 전 의장은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까울 뿐만 아니라 시장경제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공유하고 있다”며 “그뿐만 아니라 안보적으로도 북한 문제 등 공동의 문제가 있다”고 강조했다. 문 전 의장의 주장에 아베 전 총리도 공감했다.
 
그런 문 전 의장이 최근 동아시아문화센터(2012년 설립, 원장 노재헌)가 중심이 돼 추진하는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는 동아시아문화센터·일대일로연구원·한중문화우호협회·동아시아재단·한국문화산업포럼 등이 공동 구성한 민·관 협력단체로 한·중 수교 30주년(2022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한편 양국의 발전적 미래 청사진을 구상하고 있다.
 
월간중앙이 3월 31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사무실에서 문 전 의장을 만났다. 이날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는 ‘한국과 중국에 봄이 온다’는 주제로 세미나를 개최했다. 개소식을 겸한 행사에 문 명예위원장과 노재헌 상임위원장을 비롯해 송영길·권영세 공동위원장, 박병석 국회의장, 정의용 외교부 장관, 싱하이밍 주한 중국대사, 김준형 국립외교원장 등이 온·오프 라인으로 참석했다.
 
행사 후 월간중앙은 문 전 의장을 따로 만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작금의 한국 외교가 나아갈 길에 관해 물었다. 문 전 의장은 “한국은 두렁 사이를 걷는 소다. 미국 풀도 먹어야 하고 중국 풀도 먹어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라며 “그래서 외교는 실용적이어야 한다.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게 실용 외교”라고 힘줘 말했다.
 
지난해 5월 말 여의도에서 나왔다.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JP(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자신의 부인이 돌아가신 날 장례식장에 문상 온 사람들한테 ‘정치는 허업(虛業)입니다, 허무한 일입니다’라고 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 ‘좀 지나치신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런데 지난해 5월 30일 [동행] 출판기념회를 겸한 은퇴식을 했을 때 비슷한 감정이 들더라. 퇴임 후 아내와 함께 내 고향 의정부 곳곳을 산책하고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었나’라는 생각에 놀라곤 한다. 내 평생 중 가장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야·정파 떠나 국가 미래 함께 고민하라”

2019년 2월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왼쪽)이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붓글씨에 조예가 깊은 문 전 의장은 평소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만절필동’을 썼다. / 사진:연합뉴스

2019년 2월 당시 문희상 국회의장(왼쪽)이 워싱턴 D.C. 국회의사당에서 낸시 펠로시 미 하원의장에게 선물을 전달하고 있다. 붓글씨에 조예가 깊은 문 전 의장은 평소 가슴에 새기고 있는 ‘만절필동’을 썼다. / 사진:연합뉴스

의정활동 기간 중 외교 분야에서 유독 활동이 활발했던 거로 기억한다.
 
“국방위원회 아니면 외통위원회(외교통일위원회)에서 주로 상임위원회 활동을 했다. 외통위원회는 외교·통일 문제를 다루기 때문에 아무래도 그 분야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국회부의장·국회의장 시절에는 의원 외교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문재인 정부 들어서는 일본 특사로 임명되셨는데.  
 
“(2017년 5월 9일) 대통령 선거 이틀 후쯤 문재인 대통령이 직접 전화하셔서 ‘일본 한번 다녀오셔야겠습니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일본에 가게 됐다. 돌아보면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 때도 집권 초기에 미·일·중·러 4대 강국에 특사를 보내 새 정부의 외교 방향을 설명하도록 했다. 그런데 나를 본 일본 네티즌들이 ‘특사를 보낸 게 아니라 야쿠자 두목을 보냈네’라는 말을 하더라(웃음).”
 
2017년 5월 대선 직후 문재인 대통령은 미국 특사에 홍석현 중앙홀딩스 회장, 일본 특사에 문희상 전 국회의장, 중국 특사에 이해찬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 러시아 특사에 송영길 민주당 의원, EU·독일 특사에 조윤제 서강대 교수를 각각 선정했다. 당시 문희상 특사를 본 일본인들은 포털사이트 댓글에 “협상을 한다더니 야쿠자 오야붕(두목)이 왔어”라는 평을 남겼다. 남다른 카리스마와 풍채를 갖춘 문 특사의 인상에 대해 언급한 것으로, 이 댓글은 국내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도 큰 화제가 됐다.
 
실용적 외교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외교는 실용적이야 한다는 게 오랜 지론이자 신념이다. (정파를 떠나) 어느 정부건 실용적 외교를 해야 한다. 실용이란 말은 ‘현실에 적용되는, 변형 가능한, 유연성을 가지라’는 의미다. 원칙을 고정해놓고 오랜 세월 동안 똑같은 말만 한다면 그건 실용적인 게 아니라 도식적·원칙론적인 것이다. 실용주의의 기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라 할 수 있다. 실질적으로 국가에 이득이 되는 게 뭔지 따져야 한다는 거다. 명과 청이 대결했던 시절, 청은 신흥 세력이었고 명은 옛날 세력이었다. 그런데도 조선은 원칙에만 매였고, (사실상) 국권을 잃게 됐다. 구한말, 약 120년 전도 마찬가지였다. 그때 4대 강국(미·일·중·러)이 지금도 4대 강국이다. 당시 (대한제국은) 세계 외교의 흐름을 몰랐기에 우왕좌왕했고, 결국 일본에 국권을 빼앗기고 말았다. 다시 강조하지만 외교에서 실용이란 국익 우선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노태우 정부가 외교 부문에서 상당히 평가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년이면 한·중 수교 30주년인데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에서 시작됐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김대중 총재가 있던 야당과의 협치가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여야를 떠나 지도자들이 힘을 합쳐 국가 미래를 염려하고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게 뭔지 고민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무조건 반대만 하는 건 곤란하다. 노태우 전 대통령 때처럼 여당이 허심탄회하게 나서야 한다.”
 

“한쪽에 줄 서는 시대는 졸업, 당당하게 나아가라”

2003년 당시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2003년 당시 문희상 대통령비서실장이 노무현 대통령에게 업무보고를 하고 있다.

좀 더 자세한 설명을 부탁드린다.
 
“외교 현안을 놓고 진보와 보수로 갈라져서 싸우는 걸 보면 참으로 안타깝다. 미국이냐 중국이냐 (선택)하는 문제로 죽기 살기로 싸우는 나라가 어디 있나? 다 같이 중요하다. DJ(김대중 전 대통령)의 표현에 의하면 한국은 양쪽 두렁 사이를 걷는 소다. 미국·중국 양쪽 두렁의 풀을 다 먹어야 한다. 그런데 어느 한쪽만 먹고 다른 한쪽은 먹지 말라는 게 말이 되는가? 미국과 친하면 중국과 틀어지고, 중국과 친하면 미국과 멀어진다는 생각은 실용 외교가 아니라 이념 외교다. 어느 한쪽만을 택한다는 건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경제도 안보도 다 국익이고 똑같이 중요하다. 옛날에는 솔직히 줄만 잘 서면 됐다. 가령 미국 편을 들면 미국에서 경제·안보 문제를 다 해결해줬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다. 그런 외교에 목맬 때도 아니다. 탈냉전 이후 우리나라가 얼마나 도약했는지 돌아볼 필요도 있다. 우리나라는 1인당 국민소득 3만 달러, 인구 5000만 명을 동시에 충족하는 ‘30-50클럽’에서 일곱 번째 나라가 됐다(현재 30-50클럽에는 한국 이외에 일본[1992년], 미국[1996년], 영국·독일·프랑스[2004년], 이탈리아[2005년]가 있다). 우리 국력은 전체적으로 7대 대국, 무역으로는 10대 강국이고, 군사력으로는 5대 강국이다. 옛날처럼 어느 한쪽에 줄 서서, 눈치 보면서 외교하는 건 이미 졸업했다. 이제 당당해져야 한다.”
 
트럼프 시대의 대북 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해낸 게 하나 있다. 톱다운(Top Down) 방식, 그러니까 정상회담 위주로 (북한 문제를) 풀어나간 거다. 북·미 정상회담은 역사적으로 참 대단했다. 외교사를 보면 정상회담에서 문제가 풀리는 경우가 많았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만났다는 사실 자체로도 외교적으로는 상당히 평가받을 만하다. 어쨌든 남북 정상회담이나 북·미 정상회담 이후로 북한이 핵·미사일 실험을 한 번도 안 하지 않았나? 그것만으로도 성과다. 지금 한·일 문제의 해법은 단 하나다. 한국 대통령과 일본 총리가 정상회담을 통해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 정상회담은 외교 기법 가운데 가장 중요하기에 맨 마지막에 써야 한다.”
 
바이든 시대 들어 대북 정책 기조 변화가 감지된다. 어떻게 전망하는가?
 
“바이든 대통령뿐만 아니라 민주당·공화당 가리지 않고 미국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에 목표가 맞춰져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바이든 행정부는 북한의 완전한 비핵화가 전제되는 외교를 할 거로 본다. 그래서 도발에는 강력히 응징한다는 기본 원칙을 정한 거다. 그리고 한·미연합훈련도 다시 옛날 수준을 회복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한마디로 말하면 동맹 관계를 중시하는 게 미국의 전통적인 외교 방식이다. 우리도 그에 따른 대응 정책이 나와야 한다.”
 

“中과 잘해보려 美 소홀히 해선 안 돼”

2005년 4월 당시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인사하고 있다.

2005년 4월 당시 문희상 열린우리당 의장이 서울 동교동 김대중 전 대통령을 찾아 인사하고 있다.

미·중 패권 경쟁이 거세지고 있다.
 
“우리는 숙명적으로 4대 강국의 틈바구니에서 살고 있고, 대륙 세력과 해양 세력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살고 있다. 100년 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아무것도 변한 게 없다. 한·미 동맹은 우리의 근간이자, 안보와 외교의 뿌리다. 이게 흔들리면 중국도 우리를 우습게 본다. 미·중 패권 경쟁이 거세지면서 얼마 전 중국이 북한 경제를 지원하겠다고 나섰다. 그건 북한을 상대로 하는 게 아니라 미국을 상대로 하는 거다. 돌아보면 미·중 관계가 원만했을 때 중국은 되레 북한을 괄시했다. 판 돌아가는 걸 잘 읽어야 한다. 중국과 잘해보기 위해 미국과의 관계를 소홀히 한다면 중국은 우리를 우습게 볼 거다.”
 
자오리젠(趙立堅)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3월 12일 “중국은 우호적 이웃으로서 북한과의 전통적 협력 관계를 공고히 하고 발전시키기를 희망한다”고 밝혔다. 이를 두고 국내외 언론들은 미국과의 갈등이 고조되자 중국이 북한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는 전략을 편 것으로 해석했다.
 
구체적으로 설명해달라.
 
“어떤 사람들은 (현 정부가) 중국과 친하게 지내다 한·미 관계가 이상하게 됐다고 주장하는데, 국익에 아무 도움이 안 되는 말이다. 내가 국회의장이었을 때(2019년 2월) 야당 원내대표(나경원 전 국민의힘 의원)와 함께 낸시 펠로시 미 연방하원의회 의장을 만나 한·미 동맹의 중요성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국익 앞에 여야가 따로 있겠나? 우리로서는 미국·중국과 따로따로 할 일이 매우 많다. 그런데 어느 한쪽에 선다는 건 국익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우선순위는 있다. 한·미 동맹은 근간이고 한·미·일 공조는 매우 중요하다. 일본과의 외교도 굉장히 중요하다. 이게 틀어지면 북·중·러가 우리를 무시한다. 또 한·중 관계는 협력적 동반 관계임에 틀림없다. 양국 수교 이후 지난 30년 동안 교역량이 몇십 배 늘었다. 우리에게는 불리할 게 하나도 없는, 유리한 구조다. 그들이 경제 대국이 될수록 우리는 우리대로 잇속을 챙기면 된다. 미국 편들려다 중국하고 척질 건 아니다. 근본을 잃어버리면 안 되겠지만, 양쪽 다 중요하다.”
 
북한 문제를 잘 풀려면 그 전에 일본과의 관계를 잘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하는 분들도 있다.
 
“남북문제 때문에 일본과의 갈등을 풀어야 한다는 건 다소 비약이지만, 근본적으로는 옳은 얘기라고 본다. 과거(2002년 9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전 일본 총리가 방북해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났을 때 관계 정상화에 따른 경제 협력을 할 경우 100억 달러 지원 얘기가 나왔다. 기본적으로 북한과 일본이 풀리면 우리한테 도움이 되는 게 무척 많다. 내가 한·일 관계가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이유는 한·미·일 공조가 우리 외교의 중요한 근간이기 때문이다. 가치관 측면에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가치 동맹이다. 이걸 무시해서는 안 된다.”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명예위원장을 맡았다. 수락 이유는?
 
“나는 중국이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던 차에 한·중 수교 30주년이 됐다며 (노재헌 상임위원장이 명예위원장을) 맡아달라고 강하게 권했다. 미·일·중·러 4대 강국 외교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중국도 절대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
 

노태우 정부 북방외교는 시의적절… 대통령 안목 중요해

2020년 5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이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사진:국회

2020년 5월 당시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이 서울 한남동 국회의장 공관에서 만나 대화하고 있다. / 사진:국회

노태우 정부의 최대 성과 중 하나로 북방외교가 꼽힌다. 현재의 관점에서 평가한다면.
 
“아주 시의적절했고, 여야가 힘을 한데 모으는 지도력도 뛰어났다. 대통령에게는 그런 안목이 필요하다. 역사 속에 길이 남을 거라 생각한다. 북방외교는 단순히 북방외교로 끝난 것이 아니라 소위 ‘4+2(미·일·중·러 4대 강국+남북)’ 등 남북문제 해법까지 담겨 있었다. 이 구상은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주장한 구조에서 비롯됐다. 4대 강국 중에 중국과 러시아, 우리하고 소원했던 두 세력을 끌어들여 한반도 평화 문제를 국제무대로 올린 공은 크게 평가받을 노태우 정부의 외교 성과다.”
 
북방외교는 서독의 동방정책에서 차용한 명칭이다. 동방정책은 1968년부터 1974년까지 서독 총리를 지내고 훗날 노벨 평화상을 받은 빌리 브란트가 주창한 것이다. 이를 통해 서독과 동독·동유럽 여러 나라 간의 긴장이 완화됐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는 한국이 소련·중국과 국교를 맺는 대신 미국·일본이 북한의 유엔 가입을 수용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었다. 북방외교는 한반도에 데탕트를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중국과 인연이 깊은 것으로 안다.
 
“열린우리당 의장 시절(2005년) 중국 공산당과 자매결연을 했는데 [인민일보] 톱기사로 자세히 보도됐다. 당시 류윈산(劉雲山) 중국 공산당 선전부장과 조인식을 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인연을 맺은 중국 측 인사가 적지 않다. 개인적으로 내 딸이 중국에서 공부했고, 동생은 다롄(大連)에서 수십 년째 사업을 하고 있다.”
 
문희상 전 의장 일행은 2005년 9월 22일부터 2박 3일간의 일정으로 중국 방문길에 올랐다. 방문은 중국 공산당 초청으로 이뤄졌다. 문 전 의장은 9월 23일에는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후진타오(胡錦濤) 국가주석을 만나 양국의 발전적 미래를 논의했다. 또 국회의장이던 2019년에는 5월 6일부터 8일까지 2박 3일간 의회 정상외교 일정으로 중국을 방문한 바 있다. 문 전 의장은 당시 국회의장 격인 리잔수(栗戰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과 양제츠(杨洁篪) 중앙정치국 위원 겸 중앙외사공작위 판공실 주임, 왕치산(王岐山) 국가부주석 등을 만났다.
 
한·중 수교 이후 30년을 어떻게 평가하는가? 또 앞으로 양국은 어떤 길을 가야 한다고 보는가?
 
“한·중 관계가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이웃 나라로서) 5000년 역사를 같이했다. 양국은 문화적으로도 한자문화권·유교문화권의 일원이다. 공통점이 상당히 많다.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고 잘될수록 북한과 우리도 잘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북한에) 압력을 가하려고 해도 중국을 통해서 하는 게 훨씬 빠르다. 쉽게 말해서 중국이 북한에 ‘앞으로 석유는 반밖에 못 줘’라고 하면 북한은 바로 자세를 낮출 수밖에 없다. 미국 전략가들에게도 ‘중국을 지렛대로 이용하면 북한 문제를 푸는 데 훨씬 수월해질 것이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틈바구니에 있다.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
 
“어느 한쪽을 선택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다. 하나를 위해서 하나를 버리는 전략은 전략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래전부터 운명적으로 4대 강국 사이에서 살아왔고, 그 구도는 지금도 깨지지 않았다. 기본적으로는 가치 동맹인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공유하는 한·미 동맹에 더해 한·미·일 공조를 뼈대로 해야 한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면 현재 우리나라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중국과의 교역량이 많다. 안보뿐 아니라 경제 역시 국익이다. 명분을 지키려다 실리를 잃어서는 안 된다.”
 
지난해 한·러 수교 30주년이었다. 양국은 어떻게 미래를 설계해야 한다고 보나?
 
“사실 러시아도 대단히 중요하다. 소홀히 하면 안 된다. 원래 북방외교의 목표는 러시아였다. 앞으로 북극항로가 열리면 세계가 진동하는 문화사적 대변화가 일어난다. 우리나라의 쇄빙선 기술 수준이 높기 때문에 (러시아와 협력·연대를 증진해도) 불리할 게 하나도 없다. 북극항로만 뚫리면 세계가 3분의1로 축소된다. 지금 우리는 북한에 가로막혀 있는 ‘섬’이지만 북한이 열리면 대륙과 연결된다. TCR(중국횡단철도)·TSR(시베리아횡단철도)·TMR(만주횡단철도) 이 모든 게 열리면 물류비가 절반으로 떨어진다. 최근에 수에즈운하 하나 막혔다고 전 세계가 난리 나지 않았나. 북극 항로가 열린다면 우리에겐 기적 같은 일이 생길 거다.”
 
북극항로는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녹으면서 생긴 북극의 뱃길이다. 북극해를 지나는 북극항로는 수에즈 운하를 경유하는 현재 항로보다 거리가 짧아 항해 일수와 물류비를 크게 줄일 수 있다. 부산에서 북유럽까지 물류 운항은 운항 시간을 절반가량 단축할 수 있다.
 
러시아 외교는 어떤 식으로 전개해나가야 할까?
 
“한국 사람들은 김소월의 시보다 푸시킨의 시(‘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더 잘 알고 있을 정도다. 그뿐만 아니라 톨스토이·도스트옙스키도 잘 안다. (나는) 2019년 5월 러시아를 공식방문해서 (대한민국 국회의장으로는 처음으로) 모스크바 러시아 상원 본회의장에서 연설했다. 그런가 하면 시베리아가 인류의 마지막 보고(寶庫)라고 하는데 ‘기술의 보고’인 우리나라와 ‘자원의 보고’인 러시아가 힘을 합치면 상승작용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를 전략적 타깃으로 삼아서 적극적으로 (외교에) 나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곧 도래할 팍스 아시아나 시대 준비해야”

3월 31일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개최한 세미나에서 자리를 함께한 문희상 명예위원장(오른쪽)과 노재헌 상임위원장.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3월 31일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가 개최한 세미나에서 자리를 함께한 문희상 명예위원장(오른쪽)과 노재헌 상임위원장. [한·중 수교 30주년 기념사업준비위원회]

끝으로 한국 외교가 나아갈 길에 관해 한 말씀 부탁드린다.
 
“약소국 프리미엄을 기대하던 시대는 지났다. 냉전시대 때처럼 강국에 붙어서 안보와 경제를 모두 보장받는 시대도 끝났다. 국익에 초점을 맞춰서 실용적인 외교를 해야 한다. 4대 강국이 물론 중요하지만 동북아·인도·동남아 등 세계를 크게 봐야 한다.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자세는 기본이다. 나는 1985년에 ‘팍스 코리아나’라는 용어를 만들어서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외교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역사 학자 아널드 토인비가 ‘역사는 서진한다’고 말했듯이 인류는 팍스 로마나→ 팍스 브리태니커를 거쳐 팍스 아메리카나를 맞았다. 이게 태평양을 건너올 거라는 게 내 주장이다. 팍스 아시아나가 도래하면 동북아의 한·중·일 3국이 각축전을 벌이는 시대가 반드시 열린다. 3국은 경쟁하면서 커져야 하는 운명이다. 하나는 해양 세력의 대표, 또 하나는 대륙 세력의 대표이고 우리는 그 중간인 반도에 있다. 누구에게 줄을 설까, 누가 더 셀까만 따지면 망한다.”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 녹취 정리 박남화 월간중앙 인턴기자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