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룽윈의 윈난군, 장제스 그물망 벗어나 중공에 투항

중앙선데이 2021.04.24 00:21 733호 29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673〉

충칭의 룽윈(오른쪽)과 장제스. [사진 김명호]

충칭의 룽윈(오른쪽)과 장제스. [사진 김명호]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치밀했다. 윈난(雲南)왕 룽윈(龍雲·용운)을 끌어내리기 위해 룽의 직계 60군과 93군을 월남으로 보냈다. 명분은 항복한 일본군의 무장해제였다. 장제스의 특명을 받은 쿤밍(昆明 ) 방위사령관 두위밍(杜聿明·두율명)은 통신시설을 파괴하고 룽의 사령부를 공격했다. 외부와 통신이 두절된 룽은 월남에 있는 병력을 회군시킬 방법이 없었다. 3일 만에 백기를 들고 충칭(重慶)으로 갔다. 룽윈이 쿤밍을 떠났다는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남 장징궈(蔣經國·장경국)를 불렀다. “직접 공항에 가서 정중히 영접해라. 관저에 성대한 환영연도 준비해라.”
 

장, 룽의 직계 60·93군 월남 파병
동북 쪽으로 귀국시켜 중공과 대치
영원히 고향 윈난 땅 밟지 못 해

속수무책 룽, 사흘 만에 백기 들어
충칭서 24시간 특무 감시 속 생활

쿤밍 방위사령관, 룽의 사령부 공격
 
두위밍(왼쪽 둘째)은 국·공전쟁에서 중공의 포로가 됐다. 10년간 전범 감옥에 복역했다. 같은 날 출옥한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오른쪽 첫째)와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두위밍(왼쪽 둘째)은 국·공전쟁에서 중공의 포로가 됐다. 10년간 전범 감옥에 복역했다. 같은 날 출옥한 마지막 황제 푸이(溥儀.오른쪽 첫째)와 친분이 두터웠다. [사진 김명호]

장징궈는 룽윈을 볼 면목이 없었다. 행정원장 쑹즈원(宋子文·송자문)에게 대신 전해달라고 부탁했다. 3일간 두위밍의 중앙군과 대치하며 아편으로 버틴 룽은 사람 몰골이 아니었다. 쑹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짜증을 냈다. “피곤하다. 내일 보자.”
 
룽윈은 임시 관저에서 첫날을 보냈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장제스가 왔다. 룽이 먼저 입을 열었다. “지방정부를 개조하기 위한 인사이동은 흔히 있는 일이다. 위원장은 정상적인 방법을 쓰지 않았다. 비상수단으로 윈난과 전 중국을 소란스럽게 하고 나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국가에 불량한 영향을 끼칠까 우려된다.” 장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내 지시는 그런 게 아니었다. 두위밍이 잘못 처리했다. 단호히 처벌하겠다.” 룽의 한마디가 장을 난처하게 했다. “건강이 엉망이다. 장기간 충칭에서 쉬고 싶다. 군사참의원 원장은 나 말고 다른 사람을 임명해라.” 장제스는 손사래를 쳤다. “그건 절대 안 된다”만 반복했다. 다음 날 쑹즈원이 과일과 와인을 들고 왔다. 룽윈의 회고를 소개한다 “쑹은 시간이 지체되면 윈난인과 월남에 있는 부대가 오해할까 두렵다며 군사참의원 원장직을 간곡히 권했다. 고사했지만 결국 승낙했다. 해 질 무렵 중산복 차림의 장제스가 나타났다. 수행원들을 물린 채 그냥 걷자며 멋쩍어했다.”
 
장제스와 룽윈은 말 한마디 없이 정원을 몇 바퀴 돌았다. 떠날 무렵 먼발치에 있는 국방부장을 불렀다. “원장의 거처가 협소하다. 신분에 맞는 집을 물색해라. 주인의 건강을 위해 정구장도 만들어라.” 부탁이 있으면 하라는 말도 잊지 않았다. 룽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두위밍을 처벌해라.” 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국민당 기관지 중앙일보가 두의 면직을 보도했다. 룽윈은 장제스가 약속을 지켰다며 만족했다. 같은 날 오후 군사참의원 원장 취임선서를 했다. 며칠 후 두위밍이 동북보안사령관 임명장을 받자 분노가 치밀었다. 군사참의원 원장은 직위만 높은 허직(虛職)이었다. 룽은 회의가 있어도 나가지 않았다. 24시간 특무들의 감시를 받으며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북민주연군이 주관한 투항 환영식에 참석한 쩡쩌셩. [사진 김명호]

동북민주연군이 주관한 투항 환영식에 참석한 쩡쩌셩. [사진 김명호]

월남에 가 있던 60군과 93군은 영원히 윈난땅을 밟지 못했다. 국민당 군사위원회는 양군 예하 6개 사단의 귀국 행로를 동북으로 틀어버렸다. 중공과의 내전에 투입할 심산이었다. 쩡쩌셩(曾澤生·증택생)이 지휘하는 60군은 미군이 파견한 해군 수송선에 올랐다. 동북과 화북을 연결하는 전략 요충지 후루다오(胡蘆島)에 상륙해 푸순(撫順), 하이청(海城), 안둥(安東)에 포진했다. 사령관은 두위밍 이었다. 두는 60군을 창춘(長春)으로 이동시켰다. 93군은 프랑스군과 충돌하자 방향을 바꿨다. 육로로 광시(廣西)와 광둥(廣東)을 거쳐 지우룽(九龍)에서 배를 타고 동북에 진입했다. 윈난군을 고향에서 완전히 격리시킨 장제스는 악수(惡手)를 뒀다. 요절한 룽윈 연구가의 저술에 이런 구절이 있다. “정치는 일종의 예술이다. 장제스는 예술가 기질이 부족했다. 권술(權術)에만 의존했다. 변증법이 뭔지 몰랐다. 레닌, 스탈린, 마오쩌둥의 투쟁예술을 이해하지 못했다. 룽윈이 그물에 걸리자 전신(戰神)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동북민주연군과의 전투에 윈난군을 투입해 윈난의 군사력을 와해시키려 했다. 성공하자 윈난의 민주인사와 좌파 학생들을 도려내기 시작했다.”
 
룽윈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 집권 기간 민주인사들을 우대했다. 하다 보니 윈난이 민주의 보루가 됐을 뿐이다. 1945년 12월 1일, 룽윈이 윈난을 뒤로한 지 2개월이 흐르자 쿤밍이 꿈틀거렸다. 대형 시위가 벌어졌다. 윈난인들은 2개월 전 등을 보인 룽윈을 그리워했다. 한 시인이 ‘돌아오라 룽장군’이라는 시를 발표하자 내전 반대와 언론의 자유, 개성의 존중을 외치며 훌쩍거렸다. 국민당은 강경책을 썼다. 시위대에 수류탄까지 투척했다. 전국의 대도시에서 희생자 추모제가 열리고 시위가 꼬리를 물었다. 저명한 교수 2명이 암살당하자 지식인들도 국민당에 등을 돌렸다.
 
룽, 60군 군장 쩡쩌셩에게 밀서 보내
 
룽윈은 중공의 신중국 선포 직전 베이징으로 갔다. 윈난강무당 동기 주더(朱德. 왼쪽)와 재회했다. [사진 김명호]

룽윈은 중공의 신중국 선포 직전 베이징으로 갔다. 윈난강무당 동기 주더(朱德. 왼쪽)와 재회했다. [사진 김명호]

룽윈의 몰락은 멀리 떨어진 동북에도 영향을 미쳤다. 향수병에 걸린 60군 병사들은 바보가 아니었다. 불만이 팽배했다. “그간 중앙정부에게 이용만 당했다. 룽 장군을 제거하기 위해 우리를 월남에 보냈다. 다시 중공과 싸우라고 동북에 파견했다. 고향에 돌아가긴 틀렸다.” 중공도 60군을 부추겼다. “윈난군과 중공의 동북민주연군은 장제스의 적이다. 동북에서 서로 죽고 죽이는 것을 보고 재미있다며 깔깔댈 것이 뻔하다.”
 
충칭에 있던 룽윈은 장제스의 처사에 치를 떨었다. 특무들의 눈을 피해 60군 군장 쩡쩌셩에게 밀서를 보냈다. 1946년 3월, 쩡은 1개 사단을 이끌고 중공에 투항했다. 나머지 2개 사단도 6개월 후 쩡의 뒤를 따랐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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