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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길영의 빅 데이터, 세상을 읽다] 생활 근육, 성장

중앙일보 2021.04.24 00:12 종합 27면 지면보기
송길영 Mind Miner

송길영 Mind Miner

저는 지금 부산에 다녀오는 중입니다. 도착하자마자 바다를 품은 사진을 서울의 지인들에게 메신저를 통해 쏘아보냈습니다. 받은 이 모두가 별다른 설명없이 바로 알아보는 것을 보니 역시 부산은 확실한 브랜드를 가진 곳입니다. 핸드폰에 고이 간직된 사진 한 장으로도 바닷바람을 환기시켜 왕복 이동에 꼬박 반나절이 걸리는 시간마저 낭만으로 느껴집니다. 돌아오는 기차 속, 풍광이 뒤로 빠르게 흘러가는 차창을 옆으로 보며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들려오는 로파이 음악과 함께 이 글을 쓰면서도 아직도 바닷바람이 남아있는 듯한 느낌을 온몸으로 담아옵니다.
 

변화하는 환경 적응 노력이
생활의 근육으로 축적되면
‘성장’이라는 훈장 남게 돼

부산에서 만난 분은 이따금 저를 도와주시는 지역의 전문가입니다. 예기치 못한 재난과 업의 환경 변화로 그간 겪었던 어려움과 새로운 기회를 되짚어보고 객쩍은 농담을 나누다 본격적인 업무를 마친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고 발길을 돌린 곳은 저만의 소확행인 곳입니다. 이따금 지역을 방문할 때마다 끼니를 챙길 수 있는 행운이 생기면 들르는 몇 군데의 호사가 있습니다. 그중 한 곳인 역 앞의 초밥집에 들어서자 오랜만에 왔다는 인사와 지난번 식사한 위치를 기억해 주시는 감동을 선사받습니다. 간단한 식사를 부탁하니 장국이 비워지는 찰나도 놓치지 않습니다. 어쩌다 올지라도 단골을 우대하는 살가움에 관계는 빈도보다 시간과 비례함을 느낍니다.
 
낯선 곳을 익숙하게 만들어준 두 분을 뵌 후, 몇 년을 두고 이따금 만나며 실낱같은 인연을 이어가는 많은 분들에 대한 고마움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각자 자신의 위치를 지키며 공전하다 이따금 만나는 행성과 같이, 견우와 직녀가 그토록 오랜 기간이 흘렀음에도 서로에 대한 애틋함을 지키고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만남의 소중함도 중요하지만 지난 시간 서로에 대한 역사를 함께 함에 큰 의미를 부여하기 때문이기도, 오랜 시간이 흘러도 잊지 않았다는 기대보다 큰 환대에 대해 감동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고 보면 이 또한 각자가 자신의 일을 오래하기에 얻은 선물입니다. 같은 일을 지속하는 것은 지난한 일이기도, 인내의 시간이기도 합니다. 석회동굴 속 한 방울씩 떨어지는 물방울이 굳어 바닥에서 솟아오르는 종유석처럼, 단단해지는 과정은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확실히 차오르며 흔들리지 않는 것은 시간이 지닌 힘과 같습니다. 이처럼 지속의 우직함은 감동으로 다가옵니다.
 
빅데이터 4/23

빅데이터 4/23

지난 주말엔 대중에게 전달하는 콘텐트를 만드는 전문가와 만나 오랜만에 식사를 하며 새로 만든 기획서를 보았습니다. 까다로운 주제라 착점을 내기가 쉽지 않은 기획을 부드럽고 유려하게 정리한 것을 보고 만드신 작가분이 어떤 분인지를 여쭤보니 본인이 썼다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엄청난 친화력과 의욕적인 도전으로 유명한 분이라 뵐 때마다 에너지를 받아왔지만, 작가의 일까지 잘하실 줄은 몰랐기 때문입니다. 기획서를 보고 찬사를 보내니 막상 당사자는 어리둥절해했습니다.
 
교양을 대중들에게 알기쉽게 풀어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벌써 10년 가까이 하다 보니 본인도 모르는 사이에 생각을 정돈하고 아름다운 글을 쓰는 능력이 생겨난 것입니다. 더 공부를 하고 싶어 대학원까지 진학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선비는 사흘만 보지 않아도 괄목상대하여야 한다는 옛 고사가 떠올랐습니다. 일에서 얻은 인연을 가벼이 여기지 않고 얻기 어려운 지혜를 노력해 얻어낸 그분에게 존경의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이 들어서 하는 공부는 쉽지 않음을 알기에 그의 용기와 도전에 박수를 보냅니다.
 
숙련은 연습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전에서 이루어집니다. 헬스클럽의 로잉 머신에서 시간을 보낼 수도 있지만 뱃사공은 매일의 노동에서 절로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하루의 일과를 충실히 보내고 그 일과를 좀 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며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정신의 근육이 만들어집니다. 오늘도 어쨌든 나의 일을 시작하면서 이것이 소진되는 하루가 아니라 축적되는 것임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해 노력하는 것이 적응이라면, 그 적응을 위해 하루를 살아가며 맞는 형질로 변화하려 노력하면 남게 되는 생활의 근육을 우리는 성장이라 부릅니다. 성장은 목표가 아니라 잘 살아남은 내가 얻은 훈장이라는 생각이 들며 아쉬운 부산발 서울행 열차에서 내려 또 새로운 하루를 다짐합니다.
 
송길영 Mind Min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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