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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랑끝 내몰린 文 백신외교, 돌고돌아 해법이 ‘러시아 백신’?

중앙일보 2021.04.22 17:30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러시아가 사용을 승인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V' [연합뉴스]

지난해 8월 세계 최초로 러시아가 사용을 승인한 코로나19 백신 '스푸트니크 V' [연합뉴스]

러시아 스푸트니크V 백신을 둘러싼 한국 정부의 입장이 한 달 만에 180도 바뀌었다. 지난 3월까지만 해도 스푸트니크V 백신과 관련 “백신 도입 검토를 진행한 바 없다”고 선을 긋더니 이제는 부랴부랴 안전성 검증에 나섰다. 문재인 대통령이 스푸트니크V와 관련 사용 중인 다른 국가의 사례, 부작용 여부, 확보 가능 물량 등 전반적인 상황을 점검하라는 지시를 내리면서다.
 

文 스푸트니크V 도입 검토 지시
'백신 기근' 우려에 총력 외교전
지난해 11월 한·러 백신협력 논의
논의 5개월만에 '늑장 대응' 비판

한국 정부는 당초 11월이면 전체 국민 중 70%가 백신을 접종해 집단 면역 체계를 달성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1월 말 이미 5600만명분에 이르는 백신을 계약하며 이같은 목표는 순조롭게 달성되는 듯했다. 하지만 상황은 급변했다. 아스트라제네카·얀센 백신 등이 혈전 논란에 휩싸인 데 이어 당초 올 2분기로 예상됐던 모더나·노바백스 백신 도입이 지연됐다. 정부는 추가 물량을 확보하기 위한 '백신 외교'에 뛰어들었지만 순탄치 않았다. 핵심 동맹국인 미국마저 “다른 나라에 백신을 줄 만큼 물량이 충분하지 않다”며 한국의 백신 요청을 사실상 거절했다.
 

'백신 기근' 우려에 뒤늦은 결단 

다급해진 정부는 기존에 확보한 5종의 백신 이외에도 추가적인 백신을 도입하기 위한 검토에 나섰다. 스푸트니크V는 그 중 하나로 지난해 8월 러시아가 세계 최초로 승인한 코로나19 백신이다. 다만 외교가에선 러시아 백신 도입 준비는 이미 상당기간 전 시작됐는데, 정작 청와대의 결단이 늦었다는 평가가 나온다. 한국 정부는 지난해 11월 이미 러시아 측과 백신 협력에 대한 논의를 시작했음에도, 5개월이 지난 후에야 ‘도입 검토’ 지시가 내려와서다.
 
지난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한-러시아 북극협의회. 한국 측에선 정기용(가운데) 기후환경과학외교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외교부 제공]

지난해 11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제4차 한-러시아 북극협의회. 한국 측에선 정기용(가운데) 기후환경과학외교국장이 수석대표로 참석했다. [외교부 제공]

러시아와의 백신 논의가 수면에 오른 건 지난해 11월 열린 제4차 한·러 북극협의회부터다. 당시 정기용 외교부 기후환경과학외교국장은 스푸트니크V를 개발·보급하는 러시아 국부펀드(RDIF) 측과 면담을 갖고 효능과 안전성에 대한 러시아 측의 설명을 청취했다. 러시아 측에서 한국 정부를 상대로 스푸트니크V의 효능과 안전성을 둘러싼 우려를 해소하기 위한 자리를 마련한 셈이다. 당시 스푸트니크V는 러시아의 승인을 받은 상태였지만 3상이 이뤄지지 않은 탓에 백신의 안전성과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많은 상황이었다.
 

논의 5개월 만에 '안전성 검증' 

하지만 이를 고려하더라도 러시아 측과 논의를 시작한 지 5개월이 지나도록 안전성에 대한 검증 절차를 진행하지 않은 것은 백신 수급에 대한 정부의 안일한 인식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코로나19라는 초유의 상황에서 가능한 모든 역량을 동원해 필요분 이상의 백신을 확보했어야 하는데, 이미 맺은 공급 계약만으로 충분하다며 추가적인 노력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당시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회 복지위원회 전체회의에서 “한국과 (백신) 계약을 맺자고 그쪽(화이자·모더나)에서 재촉하는 상황”이라는 말도 남겼다.
 
외교부 당국자는 “지난해 11월 이후에도 러시아 측과 스푸트니크V 백신과 관련한 논의가 이어졌지만, 당시 한국은 이미 목표로 한 물량을 채울 만큼의 백신 계약이 완료된 상태라 추가 계약의 필요성은 없는 상황이었다”며 “이제 와 스푸트니크V 백신 도입을 검토하는 것은 이미 계약했던 백신 공급이 뒤로 밀리는 등의 돌발 변수가 생겼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3월 30일 주한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 공식 계정 게시글. 한국 정부가 스푸트니크V 백신에 대한 의약품 등록 절차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식약처는 이에 대해 "검토를 진행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페이스북 캡쳐]

지난해 3월 30일 주한 러시아 대사관 페이스북 공식 계정 게시글. 한국 정부가 스푸트니크V 백신에 대한 의약품 등록 절차를 검토하고 있다는 내용이 담겼다. 하지만 식약처는 이에 대해 "검토를 진행한 바 없다"고 부인했다. [페이스북 캡쳐]

지난달에는 스푸트니크V 백신의 사용 승인을 둘러싼 석연치 않은 잡음이 나온 사건도 있었다. 주한 러시아 대사관은 3월 30일 페이스북 계정을 통해 “한국이 스푸트니크V 백신 등 러시아에서 생산된 코로나19 백신의 의약품 등록을 검토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혔는데, 식품의약품안전처는 “(러시아 측의) 공식적인 자료 제출 및 (백신 도입) 검토는 진행된 바 없다”고 선을 그었다.
 
하지만 주한 러시아 대사관 측에선 “한국 정부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 국부펀드(RDIF)가 지난 1월 30일 한국 관련 당국에 요구 자료를 제출했다”는 입장을 재차 밝히며 스푸트니크V 백신의 한국 내 사용 승인을 둘러싼 진실공방 양상이 펼쳐졌다. 그러더니 이제 돌고돌아 결국 해법으로 스푸트니크V 백신 확보에 나서려는 모양새가 된 것이다.
 

베일 쌓인 '부작용 데이터', 여전한 논란 

스푸트니크V 백신 도입과 관련한 문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정부는 본격적인 실태 조사에 나섰다. 외교부는 해외 공관을 통해 스푸트니크V를 도입한 국가들을 대상으로 안전성을 검증할 수 있는 정보를 취합중이다. 스푸트니크V의 안전성과 부작용을 둘러싼 논란이 해소되지 않은 탓이다. 러시아는 스푸트니크V 백신을 접종한 이후 어떤 합병증이 유발되는지에 대한 정보 등 부작용과 관련한 데이터를 일체 공개하지 않고 있다. 이 때문에 안전성 검증 절차가 상대적으로 까다로운 미국·캐나다 등 북미 국가에서 스푸트니크V 백신 사용을 승인한 사례는 없다.
 
외교부 당국자는 “특정 백신(스푸트니크V)을 확보하려는 노력과 상관없이 최근 관심이 됐던 미국과의 백신 협력은 당연히 계속된다”며 “한쪽과 백신 도입 논의가 이뤄진다고 해서 다른 한 쪽을 소홀히 하고 그런 일은 없다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했다.
 
정진우 기자 dino8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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