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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인생 역전과 사적 복수

중앙일보 2021.04.21 00:36 종합 27면 지면보기
이지영 문화팀장

이지영 문화팀장

민심은 표심으로만 드러나는 게 아니다. 대중이 열광하는 문화코드에도 필남필부의 솔직한 열망이 투명하게 드러난다.
 

소년원 출신 용감한형제 성공담에
‘복수 대행극’ 표방 드라마 등 인기
불공정 현실서 위로 찾으려 안간힘

요즘 대중문화의 키워드는 인생 역전과 사적 복수다. 인생 역전의 대표적 아이콘은 4인조 걸그룹 브레이브걸스다. 지난 2월 24일 유튜브의 군부대 위문공연 동영상이 촉발한 이들의 역주행 바람은 두 달 가까이 이어지며 점점 가속도가 붙는 모양새다. 음원사이트 멜론이 20일 발표한 4월 3주차 주간차트에선 아이유 신곡 ‘라일락’을 꺾고 ‘롤린’이 다시 1위를 차지했다. 지난해 발표한 ‘운전만해’도 5위에 올라 역주행 기록에 가세했다.
 
팬덤의 열기를 더하는 건 이들이 각종 인터뷰와 TV·라디오 프로그램을 섭렵하며 풀어낸 휴먼 스토리다. 10년의 무명생활, 해체 직전에 찾아온 기적 등 꿈같은 성공담만 매력적인 게 아니었다. 바쁜 아침 비좁은 숙소의 한 개뿐인 화장실에 멤버 네 명이 동시에 들어가 이를 닦고 세수를 하는 모습, ‘롤린’ 활동 수익이 정산되면 학자금 대출을 갚겠다는 소박한 계획 등이 공개되면서 비슷한 처지인 요즘 청춘들의 감정 이입을 불러일으켰다.
 
브레이브걸스에 대한 대중의 호감은 소속사인 브레이브엔터테인먼트 대표 용감한 형제(본명 강동철)로도 확산되고 있다. 그 역시 드라마틱한 인생 역전의 주인공이다.
 
브레이브걸스 ‘롤린’뿐 아니라 손담비 ‘미쳤어’, 빅뱅 ‘거짓말’, 씨스타 ‘나혼자’ 등 숱한 히트곡을 만든 용감한 형제는 소년원까지 다녀온 ‘문제아’로 청소년기를 보냈다. 중졸 학력에 폭력 전과. 싹수가 노랗다는 말을 여러 번 들어봤음직한 그가 스물한 살 어느 날, 미국 힙합그룹 사이프러스 힐의 CD를 듣고 음악의 길로 접어들었고, 10여 년 만에 수백억 자산을 일군 작곡자이자 프로듀서가 된 것이다. 열정과 행운이 결합된 그의 성공 스토리에 대중은 내 일처럼 기뻐한다. 교회 관련 뉴스마다 달리는 악플이 그의 새벽기도 동영상에선 찾아볼 수 없을 정도다.
 
서소문 포럼 4/21

서소문 포럼 4/21

다음주 열리는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의 유력 후보로 꼽히고 있는 배우 윤여정 역시 인생 역전의 사례다. 데뷔할 때부터 “쟤는 목소리 때문에 안돼”라는 평가를 받으며 ‘목소리 콤플렉스’에 시달렸다는 윤여정은 1966년 TBC 공채 탤런트로 뽑히고도 전속 계약을 못했다. 인격수양이 덜 돼있다는 게 이유였다니, 20대의 윤여정에게 세상은 퍽 냉정했다. 결혼 후 미국으로 떠나며 커리어는 중단됐고, 이혼 후 귀국해 “내 새끼 둘 먹어살리고 교육시키려고” 드라마 단역부터 다시 시작했을 때 그의 나이 마흔이었다. 30대 청춘을 송두리째 날려버린 셈이었는데, 그때 익힌 영어로 원어민마저 매료시키고 있으니 통쾌한 반전이다.
 
인생 역전과 사적 복수 모두 팍팍한 현실을 다독이는 대리만족의 통로가 된다. 죄를 지어도 제대로 죗값을 받지 않는 현실에 대한 분노가 사적 복수에 대한 열광으로 표출된다. 사적 복수엔 부작용도 많다. 모두가 속시원한 복수는 있을 수 없으니, 결국 복수는 복수를 낳는다. 사적 복수가 법으로 금지된 이유다.
 
하지만 최근 드라마마다 사적 복수가 횡행한다. ‘사적 복수 대행극’을 표방한 ‘모범택시’(SBS)는 방송 4회 만에 시청률 15%를 넘겼다. ‘죽지 말고 복수하세요. 대신 해결해드립니다’를 명함에 적어놓은 복수 대행업체 사장은 “값싼 용서로 괴물을 키운 사회 탓”을 하며 사적 복수의 당위성을 이야기한다. 드라마는 그동안 아동 성범죄자와 학교폭력 가해자, 장애인을 착취하는 젓갈공장 일당 등을 응징했다. 자극적인 폭력 장면이 난무하는데도 시청자 반응은 “핵사이다 전개”라며 호평 일색이다.
 
송중기의 드라마 복귀작 ‘빈센조’(tvN) 역시 법의 테두리 안에서 단죄할 수 없는 재벌과 그 하수인들에게 마피아식 ‘피의 복수’를 펼치고 있다.
 
사적 복수는 드라마 속에서만 실현되는 게 아니다. 봇물 터지듯 이어진 연예인들의 학폭 미투도 사적 복수의 일종이다. 공적 시스템으로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들이 인터넷의 익명성과 파급력에 기대 가해자들의 응징에 나선 것이다. 학폭 의혹이 불거진 지수·이나은·조병규 등이 프로그램에서 하차했고, 박혜수는 촬영이 완료된 드라마의 방영이 기약없이 연기됐다. 진실 공방은 여전히 진행 중이니 정의 구현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인생 역전과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이면에는 대중의 안간힘이 있다. 불공정·불평등한 현실, 사회 시스템에 대한 불신 속에서 한자락 위로를 찾아보려는 안간힘이다. 꼭 기적적인 역전극이나 영웅적인 복수극에 기대야만 희망이 보이는 걸까, 생각하면 안타까운 현상이기도 하다.
 
이지영 문화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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