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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MZ세대의 분노 “약속을 지켜라”

중앙일보 2021.04.20 00:36 종합 28면 지면보기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1년 가까이 못 본 친구와 점심 약속을 잡았다. 오랜만에 보니 프로필 이름이 ‘봄내’로 바뀌었다. 봄내? 춘천(春川)의 순우리말 지명이다. 국어 교과서에 실린 피천득(1910~2007)의 ‘인연’을 통해 춘천을 접한 세대에 있어 춘천은 물리적 위치를 넘어 ‘아사코’로 대변되는 아련한 추억과 그리움으로 가득한, 그래서 그곳에 가면 헛헛함을 메울 수 있을 것처럼 마음속에 존재하는 곳이다. 누군가에게는 프로필 이름을 봄내로 바꿀 만큼 그리운 곳이지만, 내게는 너른내(洪川)를 떠나 10대 후반을 홀로 지낸 쓸쓸한 곳이다. 자율(?)학습을 마치고 돌아와 그 지긋지긋한 쓸쓸함을 털어내려 트랜지스터라디오를 켠다. 프랭크 푸어셀(1913~2000)의 ‘메르시 쉐리’(고마워요. 그대)에 뒤이어 DJ 이종환(1937~2013)의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별이 빛나는 밤에’(MBC FM)다. 10대 후반, 늦은 밤을 그렇게 늘 함께했으니 ‘봄내’와 ‘별밤’은 내게 있어 정서적 동의어다.
 

치열하게 공부하라 강요하곤
‘결실’의 약속 지키지 못한 사회
좌절과 분노 커지는 아들딸에게
부모의 욕망 투영한 것 반성해야

비록 세대별로 ‘별밤지기’를 누구로 기억하는지는 다를지언정 우리 모두의 유년 시절 한 켠에는 이렇게 ‘별밤’이 자리하고 있다. 50년을 넘긴 이 음악 프로그램의 제목이 빈센트 반 고흐(1853~1890)의 ‘별이 빛나는 밤’(1889)이라는 것쯤은 누구나 잘 알고 있다. 자신의 귀를 스스로 베어낼 만큼 광기에 시달리던 그가 스스로 생레미의 요양원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출 직전의 동쪽 창밖 풍경을 그린 작품이란다. ‘밤의 카페 테라스’ ‘론강 위로 별이 빛나는 밤’ 등 고흐는 ‘별밤’을 유난히 좋아했나 보다. 사실 ‘별이 빛나는 밤’이라는 그림은 고흐보다 밀레(1814~1875)가 먼저(1850) 그렸지만…. 미국의 싱어송라이터 돈 매클린(1964~)은 고흐의 삶을 ‘빈센트’(1971)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제 알겠어요. 당신이 전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 당신의 영혼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자유롭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그들은 들으려 하지도, 듣는 법도 몰랐지만, 아마도 이제는 알 거에요.” 이 노래가 요 며칠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아들 녀석과 몇 마디 나눈 이후로.
 
평소 패션 테러리스트라 할 만큼 충격적인 차림으로 출근하던 아들 녀석이 느닷없이 검은 정장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입사 동기가 2년 만에 세상을 등졌단다. 그날 이후 아내는 몇 번이고 깨서 아들이 잘 자고 있는지 확인하는 버릇이 생겼다. 회사 근처로 독립했던 동료들 모두 본가로 강제 소환당했단다. 어떤 부모가 그 소식을 듣고 남의 일이라 생각할 수 있겠나 생각해보면 지극히 당연한 조치다. 상가에 다녀온 아들과 이야기를 해야 했다. 두려웠다. 소위 MZ세대의 고민과 분노가 무엇인지 직접 확인해야만 할 것 같았다.
 
“산업화 세대와 민주화 세대는 자신들의 신념에 충실했고 그에 따른 역사적 소임을 다했다. 그리고 그들은 당시의 사회가 약속했던 결실을 거두었고 마땅한 권리로 그것을 누렸다. 그 세대를 부모로 둔 우리는 부모님의 강요(?)와 사회의 약속(?)을 믿고 밤새워 치열하게 공부했다. 일류대학을 거쳐 최악의 취업난에도 불구하고 직장을 얻었으니 상대적으로 성공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현 직장에서 퇴직할 때까지 급여 총액을 다 모아도 2021년 4월 현재 서울 웬만한 곳의 소형 아파트 한 채 값이 안 된다. 상대적으로 좀 나은 내 동료들의 좌절감이 이 정도니 더 열악한 상황에 처한 이들의 분노는 오죽하겠는가?”
 
평소 온순하기만 했던 녀석이 거의 피를 토하듯 내뱉은 말이다. 지극히 세속적인 관점이라고, 물질적 현실에 눈이 가려 삶의 참 의미를 보지 못한다고 나무랄 수도 있었지만, “약속했으면 지켰어야 한다”는 말에 말문이 턱 막힌다.
 
약속을 지킬 수 없는 상황을 초래한 이 사회와 정치권에 분노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일그러진 욕망을 아들딸에게 투영했음에 대하여 스스로 반성하는 것이 우선이다. 노래 ‘빈센트’의 가사를 고흐가 아니라 우리의 아들딸이라 생각하고 다시 한번 읽어보자. “이제 알겠다. 너희가 전하려 한 것이 무엇인지, 너희의 영혼이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자유롭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우리는 들으려 하지도, 듣는 법도 몰랐지만, 아마도 이제는 알 것 같구나.” 우리 중 누구라도 그토록 사랑하는 아들딸에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던가? “어떤 길이든 네가 가고 싶으면 그것이 옳은 길이 될 것이다”(피천득의 ‘인연’ 중).
 
좌절하고 힘겨워하는 그들에게, 심지어 세상을 스스로 등지는 이들에게 이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이 세상은 당신같이 아름다운 이에게는 어울리지 않아요”(돈 매클린의 ‘빈센트’ 중).
 
전상직 서울대 음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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