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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 형상 착즙기, 예술품 뺨치는 디자인 걸작

중앙선데이 2021.04.17 00:21 732호 22면 지면보기

[쓰면서도 몰랐던 명품 이야기] 쥬시 살리프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사진 윤광준]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 [사진 윤광준]

60년 가까이 무명작가로 지내다 70세가  넘어 비로소 알려졌으며 90대에 전성기를 맞아 100살에 죽은 뒤 현대 조각의 거장으로 추앙받은 할머니가 있다. 특기는 남성 조각가들도 쉽게 덤비지 못할 어마무시한 규모의 대형 조각품 제작. 삶의 심연에서 끌어올린 자전적 경험을 상징화시킨 작품들은 하나같이 깊고 묵직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프랑스계 미국인으로 키는 130㎝ 남짓하고 한 손으로 들어 올릴 만큼 가벼운 루이스 부르주아(Louise Bourgeois·1911~2010) 얘기다.
 

디자이너 필립 스탁의 대표 작품
알루미늄 재질 광채 상상력 자극
외계인, 고대 어류처럼 보이기도

의뢰한 디자인 회사 처음엔 냉담
몇 년 뒤 생산하자마자 세상 열광
과일 착즙 불편, 효용성은 떨어져

대표작으론 거미를 형상화한 ‘마망(Maman)’을 꼽는다. 작가의 이름은 몰라도 커다란 거미 조각하면 ‘아하! 그거 나도 본 적 있어’라는 반응을 보일 게다. 신문이나 잡지 아니면 SNS에서 누군가 다뤘을 테니까. 마망의 실물은 세계 일곱 나라에 영구 콜렉션으로 남았다. 우리나라엔 삼성미술관 리움에 소장돼 있다. 추상성 짙은 현대 조각치고 이토록 큰 관심과 인기를 독차지하는 작품은 드물다.
 
불어로 마망은 엄마를 뜻한다. 거미는 알에서 나온 새끼가 어미를 파먹으며 자란다. 제 몸마저 내주는 거미의 생태와 루이스 부르주아 어머니의 삶은 놀랍도록 닮았다. 헤진 타피스트리를 깁기 위해 풀던 실의 모습, 남편의 외도로 일그러진 어머니의 심정이 우울하고 기괴한 거미의 이미지와 겹치는 건 자연스럽다. 마망에 담겨진 이야기는 각자의 어머니를 대입해도 크게 다를 바 없으리라. 엄청난 공감대를 불러일으킨 숨은 이유일지 모른다.
 
평소 눈에 띄지 않는 거미가 엄청난 크기로 눈앞에 나타났을 때의 충격을 상상해보라. 직접 본 마망은 생각보다 거대했다. 크기에 압도되어 한동안 멍하게 멈춰 섰던 기억이 선명하다. 흥분이 진정되자 마망에 기시감을 갖게 됐다. 거미 이미지가 프랑스의 세계적인 디자이너 필립 스탁(Philippe Starck·72)의 ‘쥬시 살리프(Juicy Salif)’와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 나뿐 아니라 이 물건을 처음 본 사람들은 거미의 형상을 떠올린다.
 
어쩌면 마망이 쥬시 살리프에서 힌트를 얻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필립 스탁의 쥬시 살리프가 먼저 만들어졌으니 개연성은 충분하다. 비슷한 시기에 나타난 조각품과 디자인이 모두 거미를 연상시킨다는 점은 흥미롭다. 기괴하나 매력적이고, 다 알고 있으나 뻔하지 않은 결과로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점이 공통점이다.  
 
삼성미술관 리움 앞마당에 설치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품 ‘마망’. [중앙포토]

삼성미술관 리움 앞마당에 설치된 루이스 부르주아의 조각품 ‘마망’. [중앙포토]

마망에서 비롯된 호기심은 필립 스탁으로 옮겨졌다. 독특한 상상력으로 실용성과 무위의 아름다움 사이를 넘나드는 디자이너. 생활용품과 건축을 아우르는 역량도 놀랍다. 루이스 부르주아에 비하면 삶의 질곡을 크게 겪지 않았다. 출발부터 승승장구한 재주꾼으로 기업과 유명인들을 상대하며 역량을 과시했다. 파리 엘리제 궁 안에 있던 미테랑 대통령의 사저 인테리어를 맡게 된 이후 세계적 명성을 이어갔다. 대표작으로 꼽히는 게 쥬시 살리프다. 만들어진 지 30년 넘었지만, 여전히 새롭고 독특한 존재감으로 생명력을 이어가는 현대 디자인의 걸작이다.
 
마망과 쥬시 살리프, 이 둘의 차이는 예술품과 상품이란 것만 다르다. 난 쥬시 살리프를 볼 때마다 친근한 예술품이란 생각이 든다. 예술품과 디자인 상품을 나누는 기준은 구체적 용도의 여부다. 용도를 제거해 버린 디자인은 감상용 예술품과 하나도 다를 게 없다. 일상으로 끌어들인 쥬시 살리프의 오브제로서의 역활은 과즙 짜는 도구의 효용성보다 훨씬 크다.
 
나의 쥬시 살리프는 작업실 앰프 위에 놓여있다. 음악이 흐르고 조명으로 도드라진 금속 홈의 굴곡진 콘트라스트는 보는 각도에 따라 1백 가지 표정으로 바뀐다. 작업실을 방문했던 사람들마다 금속 광채로 빛나는 쥬시 살리프의 낯선 형태를 신선해 했다. 앉은 위치에서 올려다보는 시선은 크지 않은 금속 오브제를 신상처럼 느끼게 한다. 외계 생명체 같기도 하고, 껑충한 다리로 서 있는 거미 같기도 하며, 심해의 고대 어류처럼 보인다. 현실의 사물 같지 않은 형태의 낯섦이 묘한 쾌감으로 바뀌고, 위태로운 비례와 알루미늄 재질의 광채가 상상력을 자극한다.  
 
하지만 써먹을 일은 별로 없다. 쓰다 보면 짜증부터 나기 때문이다. 스위치만 누르면 과일 생즙을 줄줄 쏟아내는 전동 쥬서기에 익숙한 이들이라면 더욱 그렇다. 이렇듯 필립 스탁의 디자인은 형태와 기능 사이의 모호함이 특징이기도 하다.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불분명하지만 문득 느껴지는 파격의 아름다움 때문에 놓지도 못한다. 그렇다고 보편의 아름다움도 아니다. 심오한 상징과 은유가 담겨있는 것 같지도 않다. 1만 가지 상상으로 익숙해진 낡은 반복을 거부하고 있을 뿐이다.
 
90년대부터 각국 항공사 비행기의 비즈니스석에 앉아 세상을 누비던 친구의 말이다. 비좁은 델타 항공의 델리 테이블에서 쥬시 살리프로 오렌지 생즙을 짜던 스튜어디스의 난처한 표정을 기억한다고 했다. 고정되지 않은 세 개의 긴 다리가 받침점 역할을 하니 다음은 뻔하다. 오렌지를 누르는 손에 힘을 주면 과즙이 나오기는커녕 쓰러지기 일쑤였을 것이다.
 
첨단 디자인을 재빨리 도입해 앞서가는 항공사의 이미지를 보여주고 싶었을 게다. 정작 사용하는 스튜어디스는 손사래를 쳤음직하다. 하지만 친구는 유난히 맛있었던 생 쥬스의 비결을 힘들게 주물러 댄 미인의 손맛 때문이라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 능청스러운 필립 스탁은 이런 부분까지 예상하지 않았을까. 이쯤 되면 기능의 모호함이 훨씬 살갑게 다가온다.
 
쥬시 살리프는 필립 스탁이 이탈리아 디자인회사 알레시(Alessi)의 의뢰를 받으며 시작됐다. 차일피일 미뤘던 작업은 쉬 끝나지 않았다. 이탈리아의 한 레스토랑에서 피자를 먹다 오징어를 보고 갑자기 영감이 떠올랐다. 바닥에 깔린 종이 식탁보에 급하게 스케치했고, 완결된 디자인으로 다듬었다.
 
그 도면은 알레시에 보내졌다. 알레시의 대표는 시큰둥해 했다. 눈길을 끌만한 아름다움도 없고 감탄할 만한 기능이 감추어져 있는 것도 아니란 이유였다. 그렇게 몇 년 동안 책상 속에 처박아 두었다. 필립 스탁도 잊고 있었다.
 
뒤늦게 생산된 쥬시 살리프는 나오자마자 세상을 열광시켰다. 평단의 찬사도 뒤따랐다. 시대를 대표하는 걸작은 엉겁결에 만들어졌고, 하루아침에 유명해졌다. 사람의 팔자란, 물건의 팔자도,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윤광준 사진가
충실한 일상이 주먹 쥔 다짐보다 중요하다는 걸 자칫 죽을지도 모르는 수술대 위에서 깨달았다. 이후 음악, 미술, 건축과 디자인에 빠져들어 세상의 좋고 아름다운 것을 사랑하게 됐다. 살면서 쓰게 되는 물건의 의미와 가치를 헤아리는 일 또한 삶을 풍요롭게 한다고 생각한다. 『심미안 수업』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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