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부 물려주고 싶다" 네살 딸 손잡고 1억 기탁한 아빠 [기부,부의 품격①]

중앙일보 2021.04.15 05:00 종합 1면 지면보기
서울 중구 정동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자 이름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임현동 기자

서울 중구 정동의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부자 이름이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임현동 기자

“우리 딸 이름도 여기 올리자.” 1억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 아너스소사이어티 멤버인 김준용(41·마이프랜차이즈 CEO)씨가 지난해 가입 축하행사에서 4살 딸에게 한 말이다. 행사장엔 기부자들의 명패가 빼곡히 걸려 있었다. ‘아빠가 의미 있는 일을 했구나’라는 생각에 가슴이 벅차올랐다는 김씨는 “딸이 이 순간을 기억하고 기부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바랐다”고 했다. 아버지의 선행이 딸의 추억이 되고, 본보기가 된다면 그 뿌듯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는가.
 
기부는 ‘선순환(善循環)의 미학’을 만들어 낸다. 지난해 7월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유해진(70·세무법인에이블마포지점 대표세무사)씨는 기부를 “내게 주는 보약”이라고 표현했다. “처음엔 잘 몰랐는데 기부를 할수록 기쁨이 커지고 에너지도 생기는 것 같다”면서다. 그는 “‘헬퍼스 하이(Helpers High)가 이런 거구나’하는 경험을 했다”고 했다. 헬퍼스 하이는 남에게 도움을 줄 때 느끼는 정신적 만족감·포만감을 일컫는 정신의학 용어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아너소사이어티’ 가입 현황. 그래픽=박경민 기자 minn@joongang.co.kr

코로나19 확산에도 사랑의열매 기부 29% 증가

그래서일까. 기부의 선행이 위기 속에서 더 빛을 발하고 있다. 전 세계적 위기인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 와중에 기부는 오히려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사랑의열매(사회복지공동모금회)’ 전체 기부 모금액은 코로나19 창궐 이전보다 29% 가까이 증가했다. 5900억원대에서 2019년 6541억원, 지난해 8426억원으로 1885억원 증가했다. 사랑의열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소속인 아너소사이어티는 2019년 230명이었던 가입자가 지난해 256명으로 11%가 늘어 감소세에서 증가세로 돌아섰다.
사랑의열매 전체 기부 모금액.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사랑의열매 전체 기부 모금액.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굿네이버스 더네이버스클럽.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굿네이버스 더네이버스클럽.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굿네이버스의 1000만원 이상 고액기부자 모임인 ‘더네이버스클럽’의 지난해 등재 인원은 47명으로 2019년(18명) 보다 2배 이상 늘었다. 지난해 기부액(26억6500만원)은 전년도(약 7억원)의 3배를 훌쩍 넘었다. 황성주 굿네이버스 나눔마케팅본부장은 “코로나19라는 재난 상황 속에서 유명인을 비롯한 각계각층의 고액 기부가 늘었다”며 “함께 힘을 모아 위기를 극복하겠다는 연대의식이 사회 전반에 퍼진 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양극화 나타나면 자산가들이 나선다”

실제로 국가적 어려움이 있을 때 기부가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게 전문가의 분석이다. 양용희 서울신학대 사회복지학과 교수(한국비영리학회장)는 “IMF 외환위기 때도 그랬다”며 “코로나19로 양극화가 심해지는 현상을 보면서 사회적 책임을 느낀 자산가들이 나서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 김범수 카카오 의장 등 자수성가형 기업인의 “재산 절반 기부” 선언도 비슷한 맥락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자산가들이 ‘사회적 책임’을 ‘공유’하려는 움직임이 생겼다는 얘기다.
사랑의열매 아너소사이어티 명예의전당에 붙은 가입자들 이름. 사진 사랑의열매

사랑의열매 아너소사이어티 명예의전당에 붙은 가입자들 이름. 사진 사랑의열매

고액기부에서 이런 경향성이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양호영 사회복지공동모금회 마케팅본부장은 “과거엔 재벌과 사회 지도층이 도덕적 책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기 위해 기부를 했다면, 요즘은 자수성가한 분들이 개인 재산을 사회로 환원하겠다는 신념을 보인다. 이는 기부 패러다임의 전환을 보여주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중앙일보가 인터뷰한 3명의 아너스소사이어티 기부자들도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돌려줘야 한다”는 의무감을 이야기했다.
 

“내재된 부채의식 조금이나마 덜어”  

지난해 5월 사랑의열매 회관을 찾은 김준용(41·가운데) 마이프랜차이즈 CEO와 딸, 그의 아버지(오른쪽). 사진 사랑의열매

지난해 5월 사랑의열매 회관을 찾은 김준용(41·가운데) 마이프랜차이즈 CEO와 딸, 그의 아버지(오른쪽). 사진 사랑의열매

김준용씨는 ‘부채 의식’을 덜어내는 기회라고 했다. 형편이 좋지 않았던 학창 시절, 학원비와 등록금을 대주며 그의 공부를 도운 분들이 김씨에게 “언젠가 성공하면 내가 받은 것들을 베풀어야겠다”는 생각을 심어줬다고 한다. 기부한 뒤 홀가분한 기분을 느꼈다는 김씨는 “어차피 내 것이 아닌, 사회로부터 받은 것을 조금이나마 갚아서”라는 이유를 댔다. 그는 “더 많은 나눔을 하고 싶다는 욕심·목표가 생겼다”며 “그러려면 더 열심히 일해야 하니 결국 선순환이 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스타트업을 창업해 사회에 좋은 나눔까지 한 김봉진·김범수 의장 소식이 자극이 된 것 같다”며 “나의 아버지도 나눔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던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했다. 고액기부자를 연구했던 박주홍 부산복지개발원 책임연구원은 “기부는 문화나 주변 영향이 매우 크게 작용한다. 고액기부자 대부분은 ‘보고 배워서 기부했다’고 답했다”고 설명했다.
 
김씨는 기부에 대해 “‘언젠가’가 아니라 ‘지금’ 해야 하는 것, ‘누군가’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각자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기부를 하는 데 있어 액수의 많고 적음보단 지금 내가 가진 것의 일부를 나눠야 한다는 사회적 인식이 자리 잡는 게 중요해 보인다”고 했다.
 

“받은 혜택 돌려줘야…유산기부 약정”  

유해진(70) 세무법인에이블마포지점 대표세무사. 사진 사랑의열매

유해진(70) 세무법인에이블마포지점 대표세무사. 사진 사랑의열매

유해진씨는 은퇴 후 어떤 삶을 고민하다 우연히 소년소녀가장의 사연이 적힌 책자를 접했다고 한다. 인생 후반전은 취약계층을 위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연세대 사회복지학과에서 석사 과정을 밟았다. 학위를 받은 후 사회복지활동과 더불어 기부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지난해 사후 재산의 일정 부분을 기부하겠다는 ‘유산기부’ 약정을 했다. 
 
유씨는 유산기부를 결정한 이유에 대해 “살면서 국가로부터 혜택을 많이 받았다고 생각한다”며 “다같이 잘사는 사회를 만드는 데 조금이라도 일조하고 싶다”고 밝혔다. 이어 “사회문제를 해결할 땐 비용이 드는데 기부는 이를 위한 좋은 수단”이라고도 했다. 그는 “어렸을 때 보릿고개 시절 겪었다. ‘빈손으로 왔으니 갈 때도 빈손으로’라는 내 철학을 가족들이 이해해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통장에 200억 꽂히자 삶의 가치 고민”

전종하(32) 퍼플랩스헬스케어 대표. 사진 사랑의열매

전종하(32) 퍼플랩스헬스케어 대표. 사진 사랑의열매

고졸 출신 창업가인 전종하(32·퍼플랩스헬스케어 대표)씨는 지인인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의장의 추천으로 2019년 말 아너소사이어티에 발을 들였다. 전씨는 고교 졸업 후 창업한 스타트업을 300억 원대 규모로 키워 2016년 대기업에 매각했다. 전씨는 “회사 매각 후 200억원의 돈이 통장에 찍혔는데 이후 1년 정도 ‘돈의 가치’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고 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돈만 바라보고 사는 삶의 가치가 별로 높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며 “그때부터 기부와 나눔,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졌다”고 말했다.
 
전씨는 기부를 “공공재로 받은 혜택에 대한 세금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는 “공공재는 우리가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재화와 서비스이며 그 혜택을 많이 누린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MZ(2030)세대답게 전씨는 기부 시스템의 변화도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세 번째 창업까지 해보니 요새는 기술이나 디지털을 이용해 회사들이 짧은 시간 안에 매우 큰 업적을 이룰 수 있더라”며 “하지만 기부단체들은 아직도 구시대적으로 명동에서 종을 치고 있다”고 했다. 이어 “디지털 전환을 통해 저비용으로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기부 방안이나 캠페인을 고민해야 한다”며 “기부금 사용 내역 등도 디지털화해 투명하게 공개한다면 기부에 대한 불신도 없앨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지혜·이태윤 기자 kim.jihye6@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