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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생 죽인 음주운전자 황당변명에…다국적 탄원서 쏟아졌다

중앙일보 2021.04.14 12:30
지난 1월 25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의 한 법정. 지난해 11월 6일 발생한 교통사고 증거 자료로 차량 블랙박스 영상이 상영됐다. 대만에서 온 유학생 쩡이린(당시 28세)씨가 서울 강남구의 한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초록불이 켜져 있었지만, 시속 80㎞로 달리던 승용차는 쩡씨를 무참히 치었다. 그 순간 방청석에 있던 쩡씨의 친구 8명은 모두 고개를 숙였다.
 
사고의 영상은 대만에 있는 쩡씨의 부모도 봤다. 살아있는 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쩡씨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딸이 살인자에게 고속 괴력으로 치인 장면이 머릿속에서 계속 나타난다. 정말 손을 뻗어 딸을 그 속에서 끌어내고 싶다”고 딸의 친구들에게 말했다.
대만 언론에 등장한 쩡씨의 어머니, 아버지. 사진 대만 방송 FTV 캡처

대만 언론에 등장한 쩡씨의 어머니, 아버지. 사진 대만 방송 FTV 캡처

검찰의 공소장에 따르면 사고 원인은 음주운전이었다. 가해자 A씨(52)는 지난해 11월 6일 오후 11시 40분 아우디 승용차를 몰고 서울 강남구의 한 도로를 시속 80㎞로 달렸다. 제한 속도가 50㎞인 도로였다. 그는 차량 앞부분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쩡씨를 치었고, 약 10m를 퉁겨져 날아간 쩡씨는 두부 과다 출혈로 숨졌다. 사고 직후 A씨의 혈중알코올농도는 0.079%였다. 법원에 따르면 그는 음주운전 전과 2범이었다. 2012년에는 벌금 300만원, 2017년엔 벌금 100만원을 각각 선고받았다.
 

“처음부터 엄벌했다면 우리 딸 죽지 않았을 것”

사건이 발생한 지 5개월이 지났지만, 쩡씨 부모와 친구들의 슬픔은 계속되고 있다. 지난달 8일 검찰은 가해자 에게 징역 6년을 구형했다. 쩡씨의 부모는 빙과일보 등 대만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검찰의 구형에 실망했다"고 했다. 쩡씨의 아버지는 "A씨는 초범이 아니고 음주운전을 세 번이나 했다"며 "처음부터 엄벌했다면 두 번째, 세 번째 음주운전은 없었을 것이고, 우리 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그는 "검찰 징역 6년이면 음주운전을 장려하는 수준의 아주 가벼운 처벌"이라고도 했다.
지난 1월 기자회견을 열고 음주운전 강력처벌 촉구하는 쩡이린씨의 친구들. 연합뉴스

지난 1월 기자회견을 열고 음주운전 강력처벌 촉구하는 쩡이린씨의 친구들. 연합뉴스

쩡씨의 부모는 검찰의 구형에 앞서 한국 재판부에 편지를 보냈다. "A씨는 자신의 이기심과 생명에 대한 무시로 과거 판결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았다"며 "살인자에게 최고의 형벌을 내려달라"고 적었다. 대만의 여러 매체에 따르면 대만법상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 최소 징역 3년에서 징역 10년을 선고할 수 있다. 한국은 지난해 개정된 도로교통법(윤창호법)에 따라 징역 3년에서 무기징역까지 선고가 가능하다. 대만보다 강력해진 법을 알았기에, 쩡씨의 부모와 친구들의 안타까움은 더 컸다.
 

변호인 "하드렌즈가 빠져서…"

쩡씨의 친구들은 A씨 측이 법정에서 한 변명에도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지난 8일 오전 열린 2차 공판에서 A씨의 변호인이 “당시 피고인이 착용하고 있던 하드렌즈가 이탈하여 당황한 상태에서 사고가 발생한 점을 참작해달라”고 한 것이다. 변호인은 “A씨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으며 변명의 여지가 없다”면서도 “음주수치가 비교적 높지 않았고, 하드렌즈가 이탈해 당황한 상태였다”고 말했다.
 
쩡씨 친구인 박모씨는 “하드렌즈가 빠졌다면 차를 세웠어야지 왜 시속 80㎞를 밟았냐”며 “우리는 A씨가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박씨는 또 “A씨가 법정에서 합의금을 내기 위해 집을 팔았다고 했다”며 “계속해서 선처를 바라고 합의를 요구하는데, 그럴 생각이 없다”고 덧붙였다.
 

10여 개국 100여 명, ‘다국적 탄원서’

쩡씨의 친구들에 따르면 지난달 서울지방법원에는 ‘A씨에 대한 엄벌 촉구’ 탄원서가 도착했다. 박씨는 "탄원서에는 10여 개국 600여명의 쩡씨 친구들 등의 서명을 받았다"고 했다. 이들은 "음주운전을 강력히 처벌하지 않는다면, 쩡씨 이후에 몇 명이 더 희생될지 모른다”는 내용이었다.
대만 유학생 쩡이린씨의 생전 모습. 사진 쩡씨 친구들 제공

대만 유학생 쩡이린씨의 생전 모습. 사진 쩡씨 친구들 제공

신학과 박사 과정 학생이었던 쩡이린은 사고 직전 교수와 면담을 한 뒤 귀가하던 길이었다. 한국에 대한 애정이 깊던 친구의 비극에 한국인 친구들은 청와대에 청원을 올려 23만여명의 동의를 얻었다. 
 

징역 8년 선고…부모 "재판부에 감사"

14일 서울중앙지법 재판부는 A씨에게 검찰의 구형량보다 2년 많은 징역 8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는 과거 음주운전 2회 처벌 전력이 있는데 또다시 정상적인 운전이 곤란한 상태에서 신호를 위반해 횡단보도를 건너는 피해자를 충격했다"며 "피해자가 젊은 나이에 사망하는 비극적 사고가 일어났다”고 지적했다. 이어 “해외에 있는 피해자 가족의 고통과 슬픔은 헤아리기 어렵다”고 설명했다. "렌즈가 돌아갔다"는 A씨의 변명은 통하지 않았다. 재판부는 “시력 좋지 않았다면 운전에 더욱 주의를 기울였어야 하는데 음주상태로 운전해 오히려 비난 가능성 더 크다”고 판시했다.
 
쩡씨의 부모는 14일 변호인을 통해 보내온 영상에서 "법원의 판단에 감사하다"는 입장을 전했다. 쩡씨 부모는 "검사가 구형한 형량에 2년을 더해주신 판사님께 감사드린다"며 "우리는 살인자가 우리의 아름답고 귀중한 딸을 살해했다는 사실을 자각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또한 "살인자가 이기적인 마음으로 음주운전 범행을 저질러 우리 가족을 파괴했다"며 "이번 판결이 향후 한국에서의 음주운전 범죄를 줄이고 가족의 파괴를 막는 데에 보탬이 되기를 희망한다"고 했다.
14일 선고 이후 쩡이린씨의 어머니, 아버지가 보내 온 영상 입장문의 한 장면. 사진 쩡씨 부모님 측 변호사

14일 선고 이후 쩡이린씨의 어머니, 아버지가 보내 온 영상 입장문의 한 장면. 사진 쩡씨 부모님 측 변호사

편광현 기자 pyun.gwang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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