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더오래]아버지, 허물어져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울타리

중앙일보 2021.04.14 07:00

[더,오래] 송미옥의 살다보면(187)

 
고택 마당엔 복숭아꽃, 살구꽃이 ‘고향의 봄’ 노랫말처럼 활짝 피었다. 꽃같이 환한 아이들이 아빠 엄마의 손을 잡고 한옥 탐방여행을 온다. 서양식 편한 숙소가 아닌 이곳에 온 이유는 아마도 학교나 유치원에서 옛날 사람들이 살던 집에 대해 알아보는 숙제가 있었나 보다. 불편하고 추운 옛날 집에 처음 온 아이들은 신기한 듯 높은 문지방을 넘나들며 안방과 연결된 대청과 다락을 오르락내리락하며 뛰어다닌다. 엄마는 여행 짐을 정리하고, 아빠는 아이들이 흥분을 가라앉히고 안정을 찾을 때까지 위험한 대청난간을 울타리같이 버티고 서서 흐뭇하게 바라본다.
 
새삼 옛날 집 구조를 설명하며 아버지의 위치를 생각한다. 한옥은 우리의 부모 세대가 살던 집으로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울타리나 담이 조화를 이룬다. 옛날 사람들은 얼기설기 엮어 만든 나무 울타리나, 튼튼하게 쌓아 올린 흙담이나, 집을 지켜주는 울담을 귀하게 여겼다. 울담은 집을 보호하기 위해 꼭 있어야 하는 존재로 해마다 보수하고 관리했다.
 
가족의 눈에 항상 보이는 것은 어머니고 집이었다. 울타리는 그것이 허물어져야 가치를 알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 같다. [사진 pixabay]

가족의 눈에 항상 보이는 것은 어머니고 집이었다. 울타리는 그것이 허물어져야 가치를 알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 같다. [사진 pixabay]

 
집은 어머니, 울담은 아버지를 의미한다고 한다. 가족의 눈에 항상 보이는 것은 어머니고 집이었다. 그러나 할아버지 대의 아버지 모습은 할 일이 하나도 없어도 까닭 없이 바쁜 사람처럼 허세를 부리며 살았지만 위엄이 있고 대우받았다. 그 자식들인 우리 세대는 아파트가 집이 되어 산업시대의 중심에서 밤낮없이 열심히 일했다. 가족을 지키며 걷고 또 오르다 보면 담과 같은 존재의 가치가 있으리라 생각하며 살았던 것이다.
 
아버지가 된 아들은 가끔 말한다. 남자는 돈 벌어 오는 것이 가장 큰 일이라며 재미라곤 하나도 없이 오직 일만 하던 아버지가 생각났는데, 나이가 드니 아버지와의 소소한 기억이 많다고. 내가 하는 행동이나 말만 사랑이라 생각했는데 아버지도 그랬던 것 같다고. 울타리는 그것이 허물어져야 가치를 알게 되는 아버지의 모습 같다.

 
그들은 이번 여행을 특별하게 계획했다. 엄마와 아이들은 기차를 타고 내려오고 아빠는 홀로 차를 몰고 내려와 안동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늘 함께하던 아빠와 떨어지니 아이들이 걱정하더란다. 두세 시간 공백을 두고 만난 상봉의 풍경이 그려졌다. 두려운 마음으로 기차역을 나왔을 때 두 팔 벌려 기다리던 아빠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거인같이 보였을까. 아빠의 존재를 크게 확인시켜준 엄마가 참 예쁘다.

 
두려운 마음으로 기차역을 나왔을 때 두 팔 벌려 기다리던 아빠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거인같이 보였을까. 아빠의 존재를 크게 확인시켜준 엄마가 참 예쁘다. [사진 pixabay]

두려운 마음으로 기차역을 나왔을 때 두 팔 벌려 기다리던 아빠의 모습이 얼마나 든든하고 거인같이 보였을까. 아빠의 존재를 크게 확인시켜준 엄마가 참 예쁘다. [사진 pixabay]

 
그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언젠가 호주를 여행할 때 탄 ‘퍼핑빌리’라는 이름의 협곡열차가 생각난다. 한 아빠가 아이들에게 멋진 추억을 만들어 주기 위해 계획을 짰다. 엄마와 아이들은 천천히 달리는 기차 창문에 걸터앉아 밖을 내다보며 작은 풍경에도 소리를 지르곤 했는데, 기차가 정차하는 숲에서 그 아빠가 재밌는 복장을 하고 “짜잔~”하고 나타났다. 모두 환호성을 지르며 즐거워했다. 기차가 울창한 숲길을 다시 천천히 달리면 아빠도 타잔이 되어 한참을 따라 달리다가 숲으로 사라지고 또 다음 정거장에서 나타나기를 반복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 아빠는 아이의 함박웃음에 기운 내어 다음 정거장을 향해 차를 몰아 서고 달리고 서고 달리고의 고행을 기쁘게 반복했던 것이다. 기차보다 더 빠르고 힘찬 아빠를 둔 그 꼬마의 우쭐해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들은 자기도 한번 해보고 싶은 이벤트라며 부러워했다.

 
해거름에 딸이 보내온 사진을 보니 마음이 뭉클하다. 간만에 일찍 퇴근한 사위는 아이 셋과 함께 집 앞 공원을 산책한다. 두 녀석의 양손을 잡고 한 녀석은 목마를 태우고 걷는 뒷모습 사진이다. 아이들은 “아빠, 아빠, 아빠”를 부르며 새끼 제비처럼 자기를 쳐다보라 제각각 쪼잘 거리고, 아빠는 많이 놀아주지 못한 마음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로 동문서답하며 걷더라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아도, 가족을 위해 죽을힘을 다해 달리면서도, 허접한 울타리 같아 늘 미안한 아버지의 모습이다.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송미옥 송미옥 작은도서관 관리실장 필진

[송미옥의 살다보면] 요양보호사 일을 하다 평범한 할머니로 지낸다. 지식은 책이나 그것을 갖춘 이에게서 배우는 것이지만, 인생살이 지혜를 배우는 건 누구든 상관없다는 지론을 편다. 경험에서 터득한 인생을 함께 나누고자 가슴 가득한 사랑·한·기쁨·즐거움·슬픔의 감정을 풀어내는 이야기를 쓴다. 과거는 억만금을 줘도 바꿀 수 없지만, 미래는 바꿀 수 있다는 말처럼 이웃과 함께 남은 인생을 멋지게 꾸며 살아보고자 한다.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