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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남침 대신 '조선내전-美 침략'···中 6·25 공정이 노리는 것

중앙일보 2021.04.13 16:34
 6·25 한국 전쟁의 발발을 '내전 폭발'로 얼버무린 채 '미국의 침입'을 강조한 중국 8학년 중국역사 교과서 본문. 사진=신경진 기자

6·25 한국 전쟁의 발발을 '내전 폭발'로 얼버무린 채 '미국의 침입'을 강조한 중국 8학년 중국역사 교과서 본문. 사진=신경진 기자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이 폭발했다. 미국 정부는 조선 내전에 무장간섭을 결정하고, 제7함대를 파견해 대만 해협을 침입했다”

사실로 공인된 남침 대신 “내전 폭발”
미·중 전쟁 프레임으로 내부 단속 노려
"미국의 공격에 역사적 신화 소환"
"조용한 외교 아닌 반박 기록 남겨야"

 
표지에 ‘의무 교육 교과서’라고 표기된 중국의 8학년(중2)『중국역사』교과서 하권 2과 본문 첫 문장이다. 6·25 전쟁이 촉발된 과정을 구체적으로 언급하는 대신 “내전 폭발”로 얼버무린 채 “미국의 침입”을 강조했다.  
지난 2011년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펴낸 중국 공식 역사서 『중국 공산당 역사 제2권(1949~1978)』도 마찬가지다. 한국전쟁을 다룬 2장의 제목을 북한을 도와 미국과 싸운 전쟁이라는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로 달았다. 역사 교과서와 마찬가지로 “1950년 6월 25일 조선 내전 폭발”로 본문이 시작된다. 
 
중국의 한국전쟁 개입 70주년이던 지난해 10월 23일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정의의 군대의, 정의의 행보”라며 “중·조 군대는 이빨까지 무장한 적을 무찔렀고 미군의 불패 신화를 때려 부쉈다”고 주장했다. 이어 지난 9일에는 중국 공산당 산하 기구인 ‘중국인권연구회’가 “조선 전쟁은 미국이 발동한 침략 전쟁”이라는 보고서를 냈고, 당 기관지 인민일보가 전문을 게재했다. ‘항미원조 사관’을 다시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6·25 한국 전쟁의 발발을 '내전 폭발'로 얼버무린 채 '미국의 침입'을 강조한 중국 8학년 중국역사 교과서와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펴낸 중국 공식 역사서 『중국 공산당 역사 제2권(1949~1978)』 표지. 사진=신경진 기자

6·25 한국 전쟁의 발발을 '내전 폭발'로 얼버무린 채 '미국의 침입'을 강조한 중국 8학년 중국역사 교과서와 중공중앙당사연구실이 펴낸 중국 공식 역사서 『중국 공산당 역사 제2권(1949~1978)』 표지. 사진=신경진 기자

중국의 ‘항미원조 사관’은 북한의 남침이라는 국제적으로 공인된 역사적 사실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북한의 남침 배후에 존재했던 구소련과 중국의 존재도 가려버린다. 소련 해체 후 공개된 기밀문서는 6·25가 김일성이 소련을 설득하고 중국의 동의를 얻어 도발한 남침 전쟁이란 사실을 드러냈다. 이에 따르면 김일성은 1949년 여름부터 전쟁 개시에 반대하는 스탈린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1950년 1월 한반도와 대만을 미국의 방위선에서 제외한 애치슨 선언 이후 스탈린도 “국제 정세가 변했다”며 중국의 동의를 전제로 김일성의 요구를 받아들였다. 이에 마오쩌둥(毛澤東)도 대만 점령을 계획을 미루고 조선족 정예 사단을 북한 인민군에 편입시키며 막후 지원했다.
 
구소련 문서를 바탕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한 선즈화(沈志華) 화둥(華東)사범대 교수는 “아시아 혁명의 책임자를 자처한 마오쩌둥은 김일성의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며 ”특히 스탈린이 입장을 표명한 뒤에는 이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당시 북·중·러 삼각관계를 평가했다.(선즈화, 『아시아의 냉전(冷戰在亞洲)』 2016)
 
미국 침략론도 역사적 사실과는 어긋난다. 당시 미국이 제7함대를 급파한 것은 대만해협의 ‘중립화’를 위해서였다. 6·25 당일 장제스(蔣介石)는 주한 대사를 통해 한국이 파병을 요청하면 응하겠다고 이승만 대통령에게 전했다. 며칠 뒤 미국에 국민당 정예군 3만 3000명을 한반도에 파병하겠다고 제안했다. 트루먼 대통령은 군사 외교 부문의 반대로 이를 거부했다.(린샤오팅(林孝庭), 『사수와 반격(困守與反攻)』, 2017) 참전부터 ‘제한 전쟁’을 표방한 미국은 중국으로 확전을 원하지 않았다. 당시 맥아더 사령관의 “크리스마스 만찬은 집에서”라는 발언이 나온 배경이다.
 
신생 중국은 왜 한국전쟁에 참전했을까?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으로 평양이 함락되자 마오쩌둥에게 참전 대신 김일성 망명정부 지원을 선택지로 제시했다. 하지만 마오는 거부했다. 1958년 7월 마오쩌둥은 유진 러시아 대사에게 “소련이 언제부터 중국 사람을 믿기 시작했을까? 조선 전쟁 시작부터다. 그때부터 양국 협력과 156개 (지원) 프로젝트가 시작됐다”고 말했다. 한국전 개입으로 중국은 소련이 주도하던 사회주의 진영에 정식으로 편입할 수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차재복 연구위원은 “중국은 건국 초부터 중국이 승리하고 미국이 패배했다는 미·중 전쟁이라는 역사적 프레임이 필요했다”며 “국민 단결을 위해 세계 최강국을 이겼다는 ‘신화’의 필요성이 이른바 ‘항미원조 사관’을 계속 고집하게 하였다”고 진단한다.
 
70년 전 신생 국가 중국은 소련을 위시한 사회주의 진영으로부터 아시아 혁명의 맹주라는 위상을 인정받기 위해 막대한 희생을 감내하며 참전했다. 미국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는 중국과 중국 공산당(CCP)을 의도적으로 구분하며 정통성을 공격했다. 이어 들어선 조 바이든 행정부는 20년 전 9·11 테러로 흐지부지됐던 ‘전략적 경쟁’ 카드를 다시 꺼내 들었다. 동맹국과 손잡고 인권·과학기술·군사 등 전방위 대중 압박에 나섰다. 이런 미국에 맞서야할 중국으로선 집안 단속을 위해서라도 ‘항미원조 사관’이란 카드를 다시 꺼내 들 필요가 생겼다.
 
이런 중국의 '역사 공정'에 한국은 어떤 전략으로 대응해야 할까. 차재복 위원은 “최근 샤먼(廈門) 한·중 회담에서 합의한 외교·안보 2+2채널 등 공식 회담마다 한국전쟁사 왜곡에 대한 반박을 기록에 남겨둬야 한다”고 강조한다. 역사는 기억의 싸움이고, 기억은 기록을 기반으로 한다는 이유다. 다시 돌아온 패권 경쟁의 시대, 원칙 잃은 조용한 외교는 결국 국익의 침탈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경고도 덧붙는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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