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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관 불려가도 "삼성·엘지가 알아서"…미중 사이서 빠진 정부

중앙일보 2021.04.13 16:03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삼성전자 등 전 세계 반도체 업체 대표들과 화상 회의에서 반도체에 대한 공격적인 투자를 강조하며 중국 견제 방침을 분명히 했다. 반도체 분야에서 미‧중 대결 구도가 본격화하면서 한국 기업들이 난처한 입장에 놓이게 됐지만, 정부 차원의 뚜렷한 해결책은 보이지 않는다. 전략적 모호성 뒤에 숨어 미·중 간 대결의 최전선에는 기업만 내보내고 있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이 소집한 반도체 업체 대표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올리는 모습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12일(현지시간) 백악관이 소집한 반도체 업체 대표 화상회의에서 반도체 웨이퍼를 들어 올리는 모습 [AP•연합뉴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회의에서 상·하원 의원들에게서 받은 서한을 인용해 "중국 공산당이 공격적으로 반도체 공급망을 재편하고 지배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다"며 경각심을 나타냈다. 그러면서 "중국과 세계 다른 나라들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으며, 미국이 기다릴 이유도 전혀 없다"고 말했다. 또 "반도체와 배터리 분야에서 공격적 투자가 필요하며, 어제의 인프라를 고쳐쓸 게 아니라 오늘의 인프라를 새로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바이든 "중국은 기다리지 않아...공격적 투자 필요"
반도체 고리로 미‧중 대결구도 본격화...한국 기업 고심 깊어져
전문가들 "정부 모호성으로 기업에 피해"

 
미국은 당장의 반도체 품귀 사태를 극복하고 향후 재발을 막기 위해 자체적인 생산 능력을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이다. 상대적으로 높은 반도체 수입 의존도를 낮추고 궁극적으로는 반도체 자립화를 목표로 하고 있다. 이를 위해서는 미국 주도의 글로벌 공급망 구축이 시급한데, 여기에 한국 등 동맹과 우방국이 힘을 보태야 한다며 설득에 나선 것이다. 
백악관은 이날 보도자료를 통해 "회의 참석자들은 현재 반도체 부족 현상을 해소하기 위해 공급망의 투명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고 밝혔다. 바이든 행정부의 동맹 중시 기조가 군사 안보와 인권‧민주주의 분야를 넘어 경제 분야로까지 범위를 넓혀가는 모양새다. 외교 소식통은 "애초에 바이든 대통령이 2월 행정명령을 통해 반도체 공급망 조사를 지시한 건 실태 조사 뒤 믿을 수 있는 파트너들만을 주체로 공급망 규범을 다시 쓰겠다는 취지"라며 "이번 회의를 통해 삼성전자와 한국도 이런 원칙에 동의하는지, 그렇다면 믿을 수 있는 파트너인지 질문을 던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미국은 반도체 문제를 국가 안보와 직결된 이슈로 인식하고 있다. 이날 회의는 바이든 대통령이 직접 참여한 데 더해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주재했다. 반도체 산업이 조만간 중국과의 패권 경쟁의 장으로 떠오를 수 있다는 위기 의식을 기반으로 향후 국가안보회의(NSC) 차원의 대응을 예고한 셈이다. 
지난 2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4일 백악관에서 반도체·전기차배터리·희토류 등 주요 물자의 공급망 점검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전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지난 2월 미국의 조 바이든 대통령이 지난 24일 백악관에서 반도체·전기차배터리·희토류 등 주요 물자의 공급망 점검을 지시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하기 전 반도체 칩을 들어 보이고 있다. [EPA•연합뉴스]

반면 중국 측은 미국의 제재 때문에 글로벌 반도체 수급난이 발생했다고 반발한다. 에릭 쉬 화웨이 순환회장은 11일(현지시간) '화웨이 애널리스트 서밋'에서 "미국이 중국 기업에 내린 제재 때문에 전 세계 반도체 산업이 타격을 받고 있는 것"이라며 "미국의 제재에 대한 공포로 전 세계 주요 기업이 반도체 사재기를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반도체를 고리로 한 미‧중 대결 구도가 선명해질수록 삼성전자 등 반도체 관련 한국 기업의 고심도 깊어지고 있다. 삼성전자의 경우 미국과 중국을 모두 주요 생산 기지이자 판매처로 삼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경제 행보에 쉽사리 동참할 수 없다. 이번 반도체 회의를 기점으로 조만간 미국이 자국 내 생산 공장 증설 등 투자를 늘려달라며 압박 수위를 높일 가능성이 높지만, 여기에 응했다가 자칫 중국 측의 항의를 받을 수 있다.
 
미‧중 갈등에 낀 한국 기업의 딜레마는 앞서 트럼프 전 행정부 때부터 시작됐다. 지난해 미 국무부 관계자는 LG유플러스가 전체 5G 커버리지의 30%를 화웨이 장비로 쓰고 있는 데 대해 대놓고 "(통신 장비 공급 업체를) 믿을 수 있는 기업으로 바꾸라"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에 더해 미 의회는 지난해 12월 화웨이 등 중국산 통신 장비를 쓰는 국가에 미군 부대나 주요 무기체계 배치를 재검토하도록 하는 내용의 국방수권법안을 처리했다. 
바이든 행정부 역시 입장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젠 사키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월 브리핑에서 "화웨이를 포함해 신뢰할 수 없는 공급업체가 만든 통신 장비는 미국과 동맹국의 안보에 위협이 된다"면서 "우리는 미국 및 동맹국의 통신사들이 신뢰할 수 있고, 보호받을 수 있는 장비 생산을 확장하기 위해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화웨이는 물론 화웨이 장비를 쓰는 국가들을 향해서도 직접적 경고를 한 셈이다.
중국 광둥성에 위치한 화웨이 리서치개발센터 모습 [AP]

중국 광둥성에 위치한 화웨이 리서치개발센터 모습 [AP]

하지만 한국 정부의 대응은 수년째 한발 뺀 수준에 그치고 있다. 삼성전자가 백악관이 주재하는 반도체 회의에 불려가는 상황에서도 정부는 어디까지나 '정부 대 정부'의 문제가 아닌 '정부 대 기업'의 문제라며 적극적인 개입을 삼갔다. 
정부는 앞서 화웨이 문제 등에 대해서도 줄곧 "기업의 자율성을 존중한다"거나 "관련 부처간 긴밀히 협의하고 있다"는 원론적인 대응으로 일관해왔다. 한마디로 기업이 알아서 할 일이라는 식이다.
하지만 기업은 정부처럼 버틸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는 식으로 전략적 모호성을 취하기 어렵다. 어설프게 애매한 입장을 취했다간 당장 큰 손실로 이어질 수 있다.
특히 반도체 문제의 경우 미국과 중국이 주도권을 먼저 잡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예고하고 있는만큼 정부가 앞장서서 국내 기업에 명확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필요할 경우 정부간 물밑 협의에도 선제적으로 나서야 한다는 지적이다. 미·중 간 전략 경쟁으로 인해 결국 한국 기업이 피해를 볼 경우를 가정한 대비책 마련도 필요하다. 심상렬 광운대 국제통상학부 교수는 "정부가 미‧중 사이에서 모호한 입장을 취하는 탓에 삼성 등 민간기업들의 어려움은 더 커지고 있다"며 "정부가 국익 차원에서 주도적인 결정을 내리지 못해서 기업이 대신 뺨을 맞고 있는 형국"이라 지적했다.
 
박현주 기자 park.hyunj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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