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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동의 축적의 시간] 스케일업의 속도가 혁신의 속도다

중앙일보 2021.04.12 00:45 종합 26면 지면보기

성공기업의 비결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기술혁신을 꿈꾸는 기업인들의 이야기는 즐겁기도 하고 배울 것도 많다. 특히 청년 기술창업자들 옆에 있다 보면 언제나 그 활기에 감탄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고민거리도 같이 나누게 된다. 모 그룹의 사내벤처 프로그램에 선발된 청년 창업가 두 명과 만나는 자리도 그랬다. 인공지능 기술을 접목한 혁신적인 보안서비스가 목표였는데, 자신감있는 말투에서부터 세상을 놀라게 하겠다는 각오가 그대로 묻어났다. 그러나 마련된 자금으로는 개발계획을 맞추기도 빠듯했기에 한번에 성공해야 한다는 압박감도 엄청났다. 나를 포함해 벤처전문가 모두가 한결같이 조언했다. ‘최대한 빨리 베타버전을 만들어라’.
 

아이디어가 혁신이 되는 스케일업
완성본 만드느라 시간 낭비 말고
시험버전 마련 후 빠르게 고쳐가야
보스톤 다이나믹스 성공 밑거름 돼

베타버전 빨리 만들기
 
보스톤 다이나믹스가 지난해 말 공개한 로봇개 스팟과 이족 보행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춤추는 모습. 스케일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로이터=연합뉴스]

보스톤 다이나믹스가 지난해 말 공개한 로봇개 스팟과 이족 보행 휴머노이드 로봇 아틀라스의 춤추는 모습. 스케일업의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로이터=연합뉴스]

베타버전은 기능적으로 작동하는 최소한의 제품을 말한다. 베타버전을 빨리 내라는 것은 모든 것이 갖추어진 완성본을 만드는데 시간과 돈을 다 쏟아붓지 말라는 경고다. 대신 적은 비용으로 제한된 환경에서 작동하는 시험버전을 빨리 공개하고, 결과에 따라 두 번째 버전을 만들어가는 속도에 초점을 두라는 조언이다. 한마디로 스몰베팅 전략이다. 실리콘밸리의 정신을 표현했다는 ‘빨리 실패하라(Fail fast)’, 혹은 ‘만들거나 죽거나(Demo or Die)’와 같은 경구들의 메시지와 일맥상통한다.
 
소프트웨어 업계에서는 이미 이 베타버전의 개념을 ‘애자일(agile) 프로세스’라는 이름으로 상식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요약하면 모든 사양을 다 만족하는 완벽한 제품을 출시하는 것이 아니라 개발단계별로 매듭을 짓고 선보이면서 빠르게 개선해나가는 신제품 개발절차를 말한다. 마이크로소프트가 인터넷 익스플로러를 출시하던 1996년에 이미 이 개념을 적용해 3월에 30% 완성도의 첫 번째 버전을, 4월에 60% 수준의 두 번째 버전을 내놓았다. 연이어 7월과 8월에 더 업그레이드 된 세 번째와 네 번째 버전을 내놓았다. 물론 그 후로도 계속 버전이 올라간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 결과 당시 검색엔진의 지배적인 개념설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한국에서도 애자일 프로세스가 새로운 개념설계를 만들어가는 절차로서 점차 받아들여지고 있다. 대표적으로는 크래프톤이라는 게임제작회사가 이 프로세스에 기반해 게임상품을 성공시켰고, 유니콘 기업으로까지 성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보스톤 다이나믹스 본사에 전시된 4족 보행 로봇들. 개발이 진행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정교해진다. [사진 보스톤 다이나믹스]

보스톤 다이나믹스 본사에 전시된 4족 보행 로봇들. 개발이 진행되면서 크기도 작아지고 정교해진다. [사진 보스톤 다이나믹스]

최초의 버전은 핵심 개념만 살렸다 뿐 미완성처럼 보일 수 있다. 작년 12월 현대자동차가 인수해서 화제가 된 보스톤다이나믹스의 스팟이라는 첨단 로봇도 알고 보면 100㎏이 넘는 큰 덩치에 동작도 굼뜬 빅독이라는 초기 베타버전에서부터 출발하여 끊임없이 개선을 축적한 결과다. 벤처의 롤 모델이 된 ‘배달의 민족’도 첫 번째 버전에서는 하루에 전단지 1000장씩 직접 스캔해서 올릴 정도로 빈 곳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기술기반 창업자들은 이 첫 번째 단계에서 미완성인 듯한 버전을 내놓는다는 것 자체를 못 견뎌한다. 손볼 데가 한둘이 아니라는 찜찜함을 스스로 견딜 수 없어하고, 이런저런 지적들이 나오면 꼭 틀린 답안을 써낸 학생처럼 마음 불편해 한다. 기술에 대한 자부심이 높을수록 완성도에 대한 강박은 더 심하다. 그러나 한번에 완성되는 혁신은 어디에도 없다.
 
아이디어가 혁신으로 완성되어 나가는 과정을 스케일업이라고 하는데, 대부분의 혁신적 아이디어는 이 과정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사라진다. 운 좋게 성공적인 혁신으로 이어진 사례를 거꾸로 되짚어보면, 우여곡절이야 다 다르지만, 전형적인 성장경로가 존재한다. 먼저 아주 작은 틈새시장, 혹은 테스트베드에서 버전 1을 선보이는 것으로 일단 출발을 한다. 이 단계에서는 돈과 시간을 많이 들일 필요가 없다. 곧이어 적극적 탐색노력이 되었건 우연한 계기가 되었건 연관된 분야의 시장을 발견하게 되고, 거기에 맞춰 애초의 개념설계를 조금 수정해서 버전 2를 내게 된다. 이런 개선의 과정을 축적해나가면 처음 희미했던 아이디어와 다른 독창적인 개념설계를 완성하게 된다.
 
스케일업 제대로 못하는 창업기업이 태반
 
이처럼 바로 눈앞에 있는 개선의 기회에 온 신경을 집중하고 한걸음씩 나간다는 뜻에서 스케일업 과정을 ‘근시안적 진화과정’이라고도 한다. 천재적인 창의력이 아니라 조금씩 개선해 나가겠다는 집요함과 끈기가 빛을 발하는 과정이다. 대학원 기숙사의 구석방에서 연구자료을 쉽게 찾을 목적으로 개발된 베타버전의 구글검색 알고리즘이 지금의 거대한 정보제국으로 성장하게 된 바로 그 과정이다.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까지

스타트업에서 스케일업까지

2000년대 이후 국내에 창업붐이 크게 일었다. 정부 부처뿐 아니라 지자체·공공기관·기업 등 수없이 많은 곳에서 창업 지원 프로그램이 쏟아졌다. 덕분에 작년 한 해만도 30세 미만 청년창업 기업의 수가 17만 개를 넘을 정도가 되었다. 기술기반 창업기업수도 매년 20만 개를 넘는다. 벤처기업으로 인증을 받은 기업 수는 3만 개를 훨씬 넘었다. 그러나 최근 통계에 의하면 국내 창업기업의 5년 생존율은 29.2%로, OECD 주요국 창업기업의 5년 생존율 41.7%에 비하면 크게 낮은 수준이다. 프랑스는 48%가 넘는다. 창업기업의 생존율이 낮다는 것은 한국 산업 생태계의 스케일업 과정에 문제가 많다는 것을 시사한다.
 
우리나라 창업기업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판로와 자금 문제인데, 모두 첫 번째 버전을 빨리 내놓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 결과다. 최소한으로라도 작동가능한 버전 1의 제품이 없으니 초기 매출을 올릴 수 없고, 새로운 투자금도 구할 수 없다. 버전 2를 시도해보기도 전에 대부분 사라지기 때문에 스케일업을 제대로 해보지도 못하는 창업기업이 태반이다. 스케일업이 잘되는 환경이라야 창업도 잘 된다. 그 역은 성립하지 않는다. 호스 중간이 막혔는데, 수도꼭지만 튼다고 물이 잘 나올 리가 없다. 혁신이 넘치는 곳이 되려면 병아리가 부화할 때처럼 기업 내부의 스케일업 전략과 기업 외부의 스케일업 환경이 안에서 쪼고 밖에서 깨주어야 한다.
 
대학도 패러다임 바꿔야
 
기업 외부의 스케일업 환경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국가 내 제조역량이다. 미국은 지난 10년간 민주당과 공화당을 구분하지 않고 제조기업을 미국 내로 불러들이는 ‘리쇼어링’ 정책을 줄기차게 추진해왔다. 최근에는 미국 내 생산을 중심으로 글로벌 공급망을 재구축하는 과제도 손대기 시작했다. 이 정책방향의 이면에는 정보통신·바이오·청정에너지 등 첨단산업에서의 혁신 속도가 초기 버전들을 빠르게 만들어낼 수 있는 물리적 기반에 있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중국이 국제적인 견제의 대상이 될 줄 알면서도 ‘중국제조 2025’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던 배경도 마찬가지다. 다행히 세계적으로 4~5위 수준의 제조업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한국은 이런 면에서 큰 자산을 가지고 있다. 4차 산업혁명기술을 바탕으로 제조업을 한 차원 높은 수준으로 탈바꿈시킨다면, 한국의 혁신속도는 배가 될 것이다.
 
테스트베드 역할을 하는 다양한 시장이 있는 것도 중요한 스케일업 환경이다. 매번 개선되는 버전들은 연구실에서가 아니라 도전적인 시장의 요구를 듣고, 그것을 맞추기 위해 설계를 개선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따라서 테스트베드 시장이 없으면 스케일업도 없다. 까다로운 해외시장이 중요한 테스트베드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어느 정도 스케일업이 되고난 다음에야 생각해 볼 수 있다. 기술선진국들에서는 그 대안으로 국방이나 치안·환경·보건 등 공공분야에서 새로운 혁신적인 기술을 적극 도입함으로써 수준높은 테스트베드를 제공하는데 관심을 두고 있다. 국가의 재정으로 혁신기업의 스케일업을 도우면서 공공서비스의 수준도 높이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
 
인재 육성을 책임지고 있는 대학도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어야 한다. 교과서를 들고 알려진 답을 잘 맞추도록 교육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대학을 다니는 동안 도전적인 문제를 발굴하고, 일단 작동하는 베타 버전을 만들면서 스케일업의 과정을 작게나마 연습해볼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자원이 부족한 중소기업이 대학으로 와서 베타 버전을 만들 수 있도록 허브 역할도 할 수 있다. 국가적 관심의 초점을 스케일업의 속도에 맞추고 보면, 이 밖에도 혁신친화적 규제체제나 스케일업 단계에 특화된 금융시스템 등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눈에 보인다. 모두 선도국가로 가기 위한 핵심 과제들이다. 스케일업의 속도가 혁신의 속도다.
 
이정동 서울대 공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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