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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피바람 부른 조선 최초 왕권 승계…장자 상속은 8명뿐

중앙일보 2021.04.11 13:00

[더,오래]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40)

 
조선시대 왕세자의 거처로 동궁(東宮)이라 불린 건물은 경복궁의 자선당(資善堂), 창덕궁의 중희당(重熙堂), 창경궁의 시민당(時敏堂)이 있었다. 동궁은 왕세자가 거처하면서 왕위에 오르기 전에 공부하고 세자로서의 업무를 보던 곳이다. 조선 초기 동궁에 관한 기록으로는 태종 18년(1418) 6월 세자익위사를 따로 설치해 세자 관속을 세자시강원과 세자익위사로 분설한 사실 등으로 보면 이미 동궁이 건립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왕세자는 정비, 즉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왕의 적장자로서 어린 나이에 원자로 정해지고 10여 세 전후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왕세자가 된 이후에는 왕의 자리를 이어나갈 재목으로 키워지고 훈육을 받는다. 조선 왕조의 세자는 다음 왕위를 이어갈 국본(國本)으로 불리며 왕재(王才)로서의 교육을 받고 왕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을 통과해야 했다.
 
조선시대 왕세자는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로서 어린 나이에 원자로 정해지고 10여 세 전후에 세자로 책봉됐다. 왕세자가 된 이후에는 왕의 자리를 이어나갈 재목으로 키워지고 훈육을 받는다. [사진 pixabay]

조선시대 왕세자는 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적장자로서 어린 나이에 원자로 정해지고 10여 세 전후에 세자로 책봉됐다. 왕세자가 된 이후에는 왕의 자리를 이어나갈 재목으로 키워지고 훈육을 받는다. [사진 pixabay]

 
그러나 조선시대 왕세자의 위치는 건국 초기부터 순탄치 않았는데, 정치적인 문제로 왕세자가 바뀌고 폐위되었으며 심지어 죽임을 당하는 사례도 있었다. 왕의 아들로 태어나면서 어린 나이에 일찌감치 왕세자에 책봉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이들이 모두 왕위에 오른 것은 아니다. 왕세자로 책봉이 되었더라도 어린 나이에 일찍 죽거나 중간에 본인의 실책으로 폐세자가 되기도 하고 세자로 부왕을 대리해 대리청정을 하던 중 승하해 즉위를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연산군과 광해군의 왕세자들은 부왕이 반정으로 폐위되면서 함께 폐세자가 되었다.
 
조선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남 방우(芳雨)는 고려 말 조정에 출사해 예의판서(현 외교‧문화부 장관)를 지냈다. 그는 1392년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즉위하자 진안군(鎭安君)에 봉해졌으나 국가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은거하다가 40세에 죽었다. 태조가 조선을 창업하고 후사로 정한 조선 왕조 최초의 왕세자는 태조의 막내 아들 이방석이다. 처음부터 후사를 정함에 있어 장자 승계의 전통이 꼬여버린 것이다.
 
태조 1년(1392) 8월 20일 서자(庶子) 이방석을 왕세자로 정했다. 실록에는 “어린 서자 이방석(李芳碩)을 세워서 왕세자로 삼았다”고 기록돼 있다. 물론 이 실록 기사가 태조 승하 후 태종 대에 작성된 것이기는 하더라도, 방석은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았으니 조선왕조 내내 세자의 우선 조건으로 내세웠던 정실(왕후)의 몸에서 태어난 맏아들이어야 한다는 관례를 처음부터 깨뜨린 것이다. 더구나 어린 왕세자 방석의 앞에는 조선을 건국하는데 주도적인 공을 세운 신의왕후 소생의 이복형들이 있었다.
 
태조 6년 (1398) 다섯 째 아들 정안군(靖安君. 芳遠)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이복동생 방석을 죽였다. 결과적으로 처음부터 무리수 일 수밖에 없었던 조선 최초의 왕세자는 왕조의 창업에 공이 컸을 뿐만 아니라 야심가였던 태종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비극으로 결말이 나고 말았다.
 
실록에는 어린 서자를 세자로 세워 후사로 삼아 장유(長幼)의 차례를 빼앗고 적서(嫡庶)의 구분을 문란케 하고, 형제를 이간시켜 서로 선동해 변고를 발생시켜 화를 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했다. 태조의 원비 신의왕후 한씨는 태조가 즉위 전에 죽었으므로 실질적으로 신덕왕후가 조선왕조 최초의 왕후였으나 태종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신덕왕후를 후궁의 격으로 격하시킨 해석이었다.
 
신덕왕후 강씨가 계비로서 태조의 정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태종은 서자가 아닌 본처에게서 낳은 아들이 후사가 되어야 한다는 명분을 세웠고, 태조의 둘째 아들 영안군 방과(永安君. 芳果)가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이후 영안군은 1개월 뒤인 1398년 음력 9월 태조의 양위로 경복궁 근정전에서 왕위를 이어받으니 조선 제2대 국왕 정종이다. 처음부터 동생 정안군이 왕위에 오를 것을 추천했던 정종은 제2차 왕자의 난을 계기로 1400년 2월 정안군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특이한 점은 태종은 정종의 왕세제(왕의 동생)가 아닌 부왕 태조의 왕세자로 책봉되어 왕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 뒤로도 조선 초기의 세자 책봉 문제는 다시 태종 대에 이르러 왕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을 폐위하고 충녕대군(忠寧大君. 세종)으로 세자를 정하는 곡절을 겪게 되었다. 세종 이후 왕세자 문종이 적장자로 왕위를 이었으나 병약한 왕이 재위 2년 만에 승하하고 어린 단종이 즉위했으니 비극적 결말이 예견된 상황이었다. 단종은 세종 30년(1448) 여덟 살에 왕세손에 책봉되었고 1450년 문종이 즉위와 함께 왕세자가 되었다. 1452년 5월 문종이 승하하면서 왕위에 올랐을 때 단종의 나이 불과 열두 살이었다. 그리고 단종 즉위 1년 만에 수양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켜 김종서, 황보인 등을 제거했다. 그러나 이는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를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한 쿠데타였다. 특히 단종의 비극을 바라보는 시점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능력이 있는 인물 위주로 후사를 잇게 하는 실리적인 운영이 더 낫지 않았을까하는 논리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후 조선왕조의 왕권승계는 후반으로 갈수록 원만하지 않았고 후대에는 적장자로 왕위를 잇는 경우가 매우 희박하게 되었다.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남 방우(芳雨). 그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즉위하자 진안군에 봉해졌으나 국가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은거하다가 40세에 죽었다. 사진은 이승효가 연기한 이방우. [사진 SBS]

태조 이성계와 신의왕후 한씨의 장남 방우(芳雨). 그는 태조가 조선을 건국하고 즉위하자 진안군에 봉해졌으나 국가 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고 은거하다가 40세에 죽었다. 사진은 이승효가 연기한 이방우. [사진 SBS]

 
왕의 동생을 후사로 삼는 경우 왕세제(王世弟)라고 한다. 그리고 국왕의 손자인 왕세손(王世孫)이 세대를 건너 동궁정립을 받고 왕통을 잇는 경우도 있다. 동궁정립을 받은 왕세손의 경우에는 왕세자처럼 저하(邸下)라고 불렀다. 영조가 경종의 왕세제로서 왕통을 이었고, 정조와 헌종이 왕세손으로서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영조는 자신이 경종의 왕위를 승계한 것보다 효종, 현종, 숙종의 혈맥을 이은 삼종혈맥(三宗血脈)의 승계명분을 더 앞세웠다. 효종과 현종은 외아들을 두었고, 숙종은 경종과 연잉군(延礽君.영조) 두 아들을 두었다. 삼종혈맥론은 경종이 자식을 낳지 못하였으니 윗대 삼종의 맥을 잇는 연잉군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순리임을 주장하는 말이었다. 조선의 국왕 중 부왕의 적장자로 왕위에 오른 인물은 문종, 단종, 연산군, 인종, 현종, 숙종, 경종, 순종으로 여덟 왕 뿐이다. 이들 중 숙종은 출생에서부터 왕세자 책봉을 거쳐 즉위에 이르기까지 가장 확고하고 뚜렷한 정통성을 가지고 있던 왕이었다.


왕세자 책봉례

세자 책봉은 대신들의 요청으로 봄철 좋은 날을 가려 궁궐 정전에서 책봉례(冊封禮)를 행한다. 세자 책봉례는 왕의 아들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다는 임명장을 수여하는 의식이다. 책봉례를 할 때 왕은 세자에게 죽책문(竹冊文.임명장)과 교명문(敎命文. 세자에게 당부하는 훈계문), 세자인(世子印. 세자를 상징하는 인장)을 전한다. 왕은 조정의 백관들이 있는 자리에서 책봉례를 행한 후 바로 종묘에 이 사실을 고하고 전국에 알린다.
 
왕세자에 책봉되면 자신의 관속과 호위병들을 거느리게 되는데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과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의 관료가 그들이다. 세자와 시강원 관료들의 인간적 유대감은 절대적이다. 세자나 시강원의 전임 관료들은 마치 예비 내각의 사람들처럼 왕세자가 즉위했을 경우 어떻게 나라를 다스릴지를 수업을 통해 반복 토론한다. 세자익위사는 세자의 후위(後衞) 임무를 맡고 있는 무신들이다. 익위사는 총 14명이 배속되어 세자가 대궐 밖에 거둥 할 때는 앞에서 인도하고, 수업을 받을 때에는 섬돌 아래에서 호위한다.
 
조각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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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향우 이향우 조각가 필진

[이향우의 궁궐 가는 길] 교사로 명예퇴직 후 조각가로 작품을 제작하면서 우리 역사와 전통문화를 배우고 알리는 궁궐 지킴이로 활동하고 있다. 궁궐에서의 오랜 활동을 바탕으로 조각가의 심미안적인 시각에서 바라본 궁궐의 아름다움을 직접 그리고 글을 썼다. 우리 궁궐의 정다운 이야기를 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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