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삶이 난파선 같을 때 우리가 의지할 철학

중앙선데이 2021.04.10 00:20 731호 20면 지면보기
난파선과 구경꾼

난파선과 구경꾼

난파선과 구경꾼
한스 블루멘베르크 지음
조형준 옮김
새물결
 
세상은 요지경. 아니면,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이런 식의, 생활세계의 진실이 대중가요 가사에만 있는 건 아니다. 어렵고 고상한 걸 좋아하는 철학자도 그런 문제와 씨름했다는 게, 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사소한 발견이라면 발견이다. 물론 책이 품은 메시지는 그런 사소를 훌쩍 뛰어넘어 의미심장하다고 해야겠다. 그래도 대중가요의 통속 철학 수준에서 책에 대해 얘기할 수 있는데, 인생은 나그넷길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어서다.
 
저자 한스 블루멘베르크(1920~96)는 원산지 독일에서도 베일에 쌓인 철학자다. 국내에도 거의 소개된 적이 없다. (2011년 논문 모음집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들』이 그동안 유일했다) 본격적인 저작인 이번 책을 직접 번역한 출판사 조형준 대표에 따르면 블루멘베르크는 개념으로 말해질 수 없는 것, 감추어진 것, 흔적만 남은 것들을 연구한 ‘은유학’의 개척자라고 한다.
 
개념으로 말해질 수 없는, 은유학, 이런 데서 벌써 걸린다. 쉽게 말해, 우리 인생을 난파선과, 난파선을 바라보는 구경꾼의 대치 구도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게 책의 핵심 메시지다. 인생 자체가 난파선이라는 얘기가 아니다. 저자가 추적하는 은유의 계보학 혹은 은유의 고고학에서 인간 삶은 종종 항해에 비유된다. 당연히 인간이 탄 배는 언제나 난파의 위험에 시달린다. 난파의 상황에서 인간은 무얼 배울 수 있고, 어떻게 이겨낼 수 있으며 안전한 귀환 이후에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그리스·로마 시대 시인부터 괴테·니체에 이르기까지 숱한 문인·철학자들이 그런 문제들을 어떻게 다뤘는지 소개한다.
 
이 은유학 계보의 첫머리에 로마의 시인·철학자 루크레티우스가 놓인다. 이런 문장을 남겼다고 한다.
 
“폭풍우 속의 바람이 파도를 뒤집어엎을 때/ 해안에 서서 남이 난파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리라.”
 
물론 여기서 구경꾼의 기쁨이 반드시 ‘쌤통’ 의식과 관련 있는 건 아니다.
 
거친 바다로 나서는 사람처럼, 지적 모험을 마다치 않는 사람을 위한 책이다.
 
신준봉 전문기자/중앙컬처&라이프스타일랩 inform@joongang.co.kr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