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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을까

중앙일보 2021.04.05 11:00

[더,오래]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2)

낯선 여행지, 오래되거나 새로운 것, 인상 깊었던 작품…. 이렇게 살아가면서 보는 많은 것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찾아가는 길이나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하지는 않아요. 그런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차고 넘치거든요. 친절한 안내는 없지만, 낯설거나 익숙한 혹은 특별한 것을 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소소하고 다양한 감정을 나누고자 합니다.〈편집자〉

 
극장에서 놓친 영화는, 대부분 놓친 채로 지나갔다. 노트북이나 TV로 굳이 찾아보지 않았었다. 일을 그만두고 나자 여러 가지 순기능이 생겼는데 그중 하나가 한낮의 조용한 내 시간이다. 서로의 영화 취향을 맞추느라 놓친 영화를, 오롯이 혼자 즐기기에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사진 사이드미러·찬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포스터. [사진 사이드미러·찬란]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예쁜 척, 이야기인 척, 영화인 척하지 않는 이 영화는 근래에 본 영화 중 최고였다. 혼자 웃다가, 맞장구치다가 그렇게 몰입해서 보는 와중에 대사 하나하나가 와 닿은 것은 할머니에 관한 부분이었다.
 
세 들어 사는 달동네 산꼭대기 집주인은 한글을 모르는 할머니다. 주민센터에서 한글을 배우며 찬실이에게도 도움을 받는다. 내가 진짜 원하는 게 무엇인가 고민하는 찬실이가 할머니에게 원하는 게 무엇이냐 묻는다. 할머니는 원하는 것은 없다며 말씀하시길,
 
“나는 오늘 하고 싶은 일만 하면서 살아. 대신 애를 쓰면서 해.”
 
갑자기 추워진 날씨에 죽어가는 화분을 집안으로 들이며 다시 살리려는 할머니. 할머니의 손길에 집안으로 들어온 화분은 꽃을 피웠다. 주민센터 한글반에서 시 쓰기 숙제를 해오라는 말에 고민하던 할머니는 시를 써서 찬실이에게 읽어준다.
 
영화 속 한글을 떠듬떠듬 배우는 주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사진 사이드미러·찬란]

영화 속 한글을 떠듬떠듬 배우는 주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사진 사이드미러·찬란]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맞춤법도 다 틀려버린 그 짧은 한 문장의 시를 보고 찬실이는 운다. 그리고 진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게 된다. 찬실이가 동네 할머니들을 보며 이야기한다.
 
"할머니들은 다 알아요, 사는 게 뭔지. 날씨가 궂은 날에도 맑은 날에도."
 
한글을 떠듬떠듬 배우는 주인 할머니의 모습에서 나의 할머니를 떠올렸다.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셨고, 성당의 기도문으로 어설픈 한글을 배워나가셨다. 모르는 글자를 나에게 물어보셨고, 나는 기분 내키면 친절하게, 귀찮으면 퉁명스럽게 한글을 알려드렸다. 소리 내어 더듬더듬 기도문을 읽던 나의 할머니. 화내는 법 한번 없던 나의 할머니. 숱 없는 머리를 쪽지고 늘 한복을 입고 계시던 나의 할머니를 생각했다.
 
춥고, 추웠던 12월의 끝자락이었다. 갑작스레 할머니가 쓰러져 돌아가셨고, 군의관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는데도 아빠는 다시 한번 보라고 채근했다. 이불 홑청을 뜯어오라는 아빠 말씀에 우리는 훌쩍대며 이불 홑청을 뜯었다. 함께 홑청을 뜯어주던 아빠의 운전병 아저씨가 우리를 달랬다.
 
“울지 마라, 울지 마.”
 
다음날 추운 이른 아침에 관사 마당에 검은색 관이 놓여있었다. 할머니가 누우실 관이라는 걸 어린 나이에도 알았는데 나는 속으로 걱정했다. “뚱뚱한 우리 할머니가 저거 너무 작은데, 너무 작아서 들어갈 수 없을지도 모르는데” 하며 안절부절못했다.
 
할머니는 늘 맛있는 것을 뚝딱뚝딱 만들어냈다. 지금도 달달하게 고아 콩가루를 묻힌 엿을 보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할머니를 가운데 두고 잘 때 언니와 툭탁대기도 했다. 서로 나를 보고 자라고 할머니에게 투정을 부렸다. 때로는, 왜 할머니는 작은집에는 안 가고 우리 집에만 있는가 심술을 부리는 변덕도 없지 않았다.
 
할머니는 정말 다 알았을 것 같다. 사는 게 뭔지, 맑은 날에도 궂은 날에도. 하지만 할머니는 그래서 힘들지 모른다. 사실 할머니도, 젊은 사람에게나 할머니이지 자신에겐 할머니가 아니니 사는 게 뭔지 할머니 자신도 모를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남들이 할머니는 모든 것을 다 알 거라고 오해하고 있는 것인지도. 그래서 할머니는 내색도 못하고 힘들지도.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이 ‘꽃’으로 인생에 많아지는 할머니로 나이 먹고 싶다. [사진 unsplash]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이 ‘꽃’으로 인생에 많아지는 할머니로 나이 먹고 싶다. [사진 unsplash]

 
어쩌면 할머니는 사는 게 뭔지 다 아는 것이 아니라, 그런 듯 살아야 한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이 아닐까. 나이가 먹는다는 건 결국 그런 것인지 모른다. 다 알지 못하는데, 모른다고 하기엔 책임이 많아져 버리는 것. 내색할 수 없는 힘듦을 견디는 것.
 
나 역시도 할머니가 된다고 해서 사는 일을 알 수는 없을 게 분명하다. 나도 모른다, 내색을 못하고 견딜 책임이 커지는 것을 지금보다 더 감수해야 할 것도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라는 것은, 나이가 더 많이 들었을 때 “나는 오늘 하고 싶은 것만 해. 대신 애를 쓰면서 해” 정도의 할머니는 되고 싶다.
 
"사람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어쩔 수 없이 돌아올 수 없는 그리운 것들이 ‘꽃’으로 인생에 많아지는 할머니로 나이 먹고 싶다.
 
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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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명원 전명원 작가 필진

[전명원의 일상의 발견]이것은 눈이 마음에게 전해주는 이야기입니다. 낯선 여행지, 오래되거나 새로운 것들, 인상 깊었던 작품...살아가면서 보는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찾아가는 길이나 전문적인 정보를 제공해드리지는 않아요. 그런 정보는 이미 인터넷에 차고 넘치거든요. 친절한 안내는 없지만, 낯설거나 익숙한 혹은 특별한 것들을 볼 때 우리에게 찾아오는 소소하고 다양한 감정들을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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