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 국수를 꺾고 한국 현대바둑 사상 첫 세대교체를 달성한 김인 국수(왼쪽).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4/05/5531a077-dd5f-48d4-bcca-199a224dd8e7.jpg)
1966년 제10기 국수전에서 조남철 국수를 꺾고 한국 현대바둑 사상 첫 세대교체를 달성한 김인 국수(왼쪽). [중앙포토]

김인 9단
15세 입단, 23세 국수전 첫 제패
한국 현대바둑 첫 세대교체 이뤄내
국수 6연패, 왕위전 7연패 전성기
상금 털어 어려운 후배들 잘 챙겨
1962년 제6기 국수전에서 ‘한국 현대바둑의 개척자’ 조남철 국수에게 도전했으나 패한 후 조 국수의 소개 편지로 당시 세계 바둑의 메카로 통하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기타니 미노루 9단을 사사했다. 일본 언론은 김인과 일본의 오다케(大竹英雄), 대만의 린하이펑(林海峰) 등 동아시아 3국 천재들을 한데 묶어 ‘김죽림(金竹林) 시대’를 예언하기도 했다.
![김 국수(오른쪽)는 같은 해 중앙일보가 주최한 제1기 바둑왕위전에서도 우승했다. 이후 김 국수는 왕위전 7연패, 패왕전 7연패, 국수전 6연패 등 기전을 휩쓸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4/05/2aadde2d-eee5-459d-8143-5f337503a17a.jpg)
김 국수(오른쪽)는 같은 해 중앙일보가 주최한 제1기 바둑왕위전에서도 우승했다. 이후 김 국수는 왕위전 7연패, 패왕전 7연패, 국수전 6연패 등 기전을 휩쓸었다. [중앙포토]
1960~70년대 한국 바둑의 도약 시기를 평정한 고인이지만 악착스럽고 비정한 승부사는 아니었다. 바둑의 도(道)를 추구하는 이상주의자이자 낭만주의자였다. “기계처럼 단련하고 세상사를 잊어버린 채 전력을 기울여 승리만을 추구해 이겨지는 게 바둑이라면 그것이 무슨 큰 의미가 있겠는가. 바둑의 기술자와 바둑의 고수는 다른 것”이라는 게 그의 소신이었다. 고인은 조명 밑에서 시간에 쫓겨 둬야 하는 TV 바둑이 바둑의 본질에 어긋난다며 KBS 바둑왕전에는 끝까지 참가하지 않았다.
![2005년 11월 열린 ‘현대바둑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바둑의 일인자 계보를 이어온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오른쪽부터)이 핸드 프린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https://pds.joins.com/news/component/htmlphoto_mmdata/202104/05/75da67ba-9599-45d1-a5d5-1fc9897da8b3.jpg)
2005년 11월 열린 ‘현대바둑 60주년 기념식’에서 한국 바둑의 일인자 계보를 이어온 김인 9단, 조훈현 9단, 이창호 9단(오른쪽부터)이 핸드 프린팅을 하고 있다. [중앙포토]
2004년부터 한국기원 이사를 지낸 그는 투병 중에도 바둑대회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중국 등 해외에서 국제 바둑대회가 열리면 늘 한국 선수단의 단장으로 동행했다. 고인은 2007년부터 고향 강진에서 열리는 ‘김인 국수배’에 대회장으로 참여해 아마추어 기사들과 만나는 것을 즐거워했다. 전국 어린이 바둑대회로 출범한 김인 국수배는 2008년 국제 시니어 바둑대회로 업그레이드됐다. 2019년 제13회 김인 국수배를 마지막으로 참관했던 고인은 지난해 코로나19 여파로 대회가 열리지 못한 것을 무척 안타까워했다고 전해진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옥규씨와 아들 김산씨가 있으며,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발인은 6일, 장지는 경기도 광주 시안추모공원.
이지영 기자 jylee@joongang.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