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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대 "송장 치를뻔" 그놈 목소리…옆집 '경찰 아들'이 막았다

중앙일보 2021.04.04 08:00
여주경찰서 홍문지구대 고재중 경위. 사진 여주경찰서

여주경찰서 홍문지구대 고재중 경위. 사진 여주경찰서

“내 돈 날렸으면 살지도 못하죠. 사람 하나 송장 치를 뻔했어요. 아직도 자다가 깨서 심장이 두근거려요.” 

 
경기도 여주시에 사는 70대 오보화씨는 ‘그놈’ 목소리만 생각하면 아직도 몸서리가 쳐진다고 했다. 때는 지난 2월 26일 오전 8시 30분쯤. 낯선 남성으로부터 전화 한 통이 걸려왔다. “안녕하세요. 금융감독원 직원입니다. 할머니 통장에서 500만원이 빠져나갔어요. 그냥 두면 통장에 돈이 다 빠져나갈 수 있으니 남은 돈 전부를 빼서 안전하게 보관해야 합니다.”
 

“금감원 직원”이라는 말에…

오씨가 당시 우체국을 갔던 상황을 그린 만화. 우체국에서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사진 경기남부경찰청

오씨가 당시 우체국을 갔던 상황을 그린 만화. 우체국에서 직원들과 실랑이를 벌였다고 한다. 사진 경기남부경찰청

오씨는 통장에 남은 7000만원이 한꺼번에 인출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이 남성과 2시간 넘게 통화를 이어갔다. 그러다 상대방 요구대로 돈을 찾기 위해 오전 10시 50분쯤 인근 우체국을 찾았다. 오씨는 “강원도 원주에 김밥집을 내려고 한다”며 우체국 직원에게 돈 인출을 요구했다. 수상함을 느낀 직원이 인출을 말렸다. 경찰관 2명도 불렀으나 오씨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고 한다. “우체국 직원이 돈을 빼갔다”는 상대방 말에 아무도 믿을 수 없다고 판단해서다. 
 
오씨는 “내 돈 내가 찾겠다는데 왜 말리냐”며 30분 동안 우체국 안에서 경찰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경찰관들의 계속된 설득에 나중에는 “내 아들이 경찰이다. 아무도 못 믿으니 아들을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오씨가 부른 ‘경찰 아들’은 여주경찰서 홍문지구대 고재중(52) 경위. 고 경위는 동네에서 보일러 수리 등 온갖 일을 도맡아 마을 어르신들에게 ‘경찰 아들’로 불린다고 한다. 
 

“경찰 아들 데려오라”는 말에 출동한 경찰 아들  

여주경찰서. 연합뉴스

여주경찰서. 연합뉴스

다른 근무지에 있던 고 경위는 호출을 받고 오씨를 찾아왔다. 그 뒤 “어머니. 이건 사기다”“돈을 가져오라는 주소를 확인하면 아무것도 없다. 가선 안 된다”고 말하며 30분 넘게 오씨를 달랬다고 한다. 고 경위는 “어머니가 처음에는 나에게도 성질을 낼 정도로 설득이 어려웠는데 얘기를 차차 들어드리며 사기라는 것을 납득시켜드렸다”며 “나중에 사기인 걸 깨달으시고는 몸을 벌벌 떠셨다”고 말했다. 
 
오씨가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정교하게 짜인 범행 시나리오에 있었다. “은행 직원은 믿을 수 없다. 직원이 의심하면 가게 분점을 낸다고 말하라”는 등 대처 사항을 하나하나 알려줬다는 것이다. 오씨는 “의심할 틈도 없이 계속 주문 사항을 말하고 불안하게 만들면서 통화도 못 끊게 해서 그때는 사기라고 생각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고 경위는 노인을 상대로 한 보이스피싱 사기는 흔한 일이라고 했다. “시골에서 돈 10만원이 아쉬운 노인들에게 500만원이 없어졌다고 하니 정신을 잃어버린 거죠. 금감원에 경찰 확인까지 다 했다고 하니 껌뻑 속았다는 거예요.”
  
오씨는 “옆집 경찰 아들 덕분에 살았다. 범행에 당했다면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을 것”이라며 “통화하면서 집 주소 등을 노출해 그날 이후 4일간은 집 밖으로 외출도 못 하고 공포에 떨어야 했다”고 말했다. 고 경위는 “경찰 누구라도 했을 당연한 일”이라며 “금감원·경찰이라고 하면서 돈을 안전하게 보관해야 한다고 하는 전화가 걸려온다면 일단 끊고 경찰에 신고하라”고 당부했다.  
 
채혜선 기자 chae.hyes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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