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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억 그림 수만점 주무른다, 신세계백화점 미술계 '큰 손'

중앙일보 2021.04.03 07:00
 
백화점에서 일하는 미술계 ‘큰손’이 있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매장과 광주, 센텀시티 신세계갤러리에 전시됐던 수만 점의 예술품이 그의 손을 거쳤다. 함께 일한 작가만 2000여명. 16년째 ‘백화점 큐레이터’로 일하고 있는 오명란(41) 신세계백화점 미술관팀 수석큐레이터의 이야기다.  

[잡썰④]신세계百 오명란 수석큐레이터

 
국내 백화점 갤러리의 역사는 50여년에 달한다. 1969년 신세계백화점이 본점에 낸 미술관이 시초다. 현재는 신세계백화점과 롯데백화점이 각각 갤러리 5곳을, 현대백화점은 6곳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신세계백화점은 팀장을 제외한 팀원 20여명 모두가 큐레이터인 업계 최대 규모의 미술관팀을 운영하고 있다.  
 
오 큐레이터는 그중에서도 베테랑이다. 맡았던 전시만 300여회에 달한다. 통념과 달리 그의 일상은 우아함과는 거리가 멀다. 하루에 많으면 수십명의 작가를 만나고, 전시에 필요한 작품을 모셔오기 위해 밤낮으로 전화기를 붙잡는다. 도록에 넣을 사진을 찍고 글을 쓰는 건 예사다. 주로 밤 시간대에 이뤄지는 작품 설치 현장에선 작업복 차림으로 인부들을 감독한다. 취급이 까다로운 작품의 경우 직접 허드렛일을 하는 경우도 있다.
 
오명란 신세계백화점 미술관팀 수석큐레이터. [사진 신세계백화점]

오명란 신세계백화점 미술관팀 수석큐레이터. [사진 신세계백화점]

 
백화점과 미술관 큐레이터는 비슷하면서도 다르다. 공립 미술관은 시민들이 문화를 누리게 하는 걸 목표로 하지만, 백화점 갤러리는 문화를 통해 차별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아트 마케팅’의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일부 작가들은 상업적 공간에서 작품의 의미가 훼손될 수 있다며 전시를 거부하기도 한다. 그렇기에 갤러리에 어울리는 작품을 찾는 건 “영리와 비영리, 전문성과 대중성 사이의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 같은 작업이다.
 
예술은 어렵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사람들에게 더 친숙한 곳으로 갖고 나간다. 2011년 광주신세계갤러리에서 전시실이 아닌 백화점 매장에 예술품을 설치해본 것도, 지난해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3층을 새로 단장해 명품 매장 사이사이에 작품 전시·판매 공간을 마련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광주에서는 작품을 보러 온 손님이 줄을 섰고, 신세계백화점 강남점은 리뉴얼 한 달 만에 전시 작품 28점이 팔려나갔다.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3층 모습. 명품 브랜드 매장 사이사이로 작품 전시 및 판매 공간이 있다. [사진 신세계백화점]

신세계백화점 강남점 3층 모습. 명품 브랜드 매장 사이사이로 작품 전시 및 판매 공간이 있다. [사진 신세계백화점]

 
오 큐레이터는 “전시를 기획할 때는 ‘내가 (작품을) 이해할 수 없으면 사람들도 이해할 수 없다’는 마음가짐으로, 미술과 대중 사이의 간극을 어떻게 메울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전시의 테마와 작가를 선정하고 기획한다”며 “작품이 있고 '감상하라'고 하는 개념이 아닌, (작품이) 인테리어나 미술품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보고 느껴볼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그의 예술관은 확고하다. 오 큐레이터는 “인간이 인간다운 위엄과 기품을 지키며 살 수 있도록 하는 게 예술의 효용”이라며 “가치 있는 예술품은 예술가가 자신이 사는 시대를 통찰하며 자기만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라고 강조했다. 처음 맡았던 ‘김환기·천경자’ 전시에 가슴이 뛰었다던 그는 아직도 조르조 모란디(근대 이탈리아 화가)나 피터르 브뤼헐(르네상스 시대 플랑드르 화가)의 작품 앞에서 설렘을 느낀다. 훌륭한 작품은 몇 시간 동안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다. ‘짝사랑’이라고 그는 표현했다.
 
20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 중 하나. [사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20세기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화 중 하나. [사진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

 
요즘 그는 대전신세계갤러리 개관 준비로 정신이 없다. 어느덧 수석큐레이터가 됐지만, 2005년 입사 당시에만 해도 지금까지 큐레이터 일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는 "석사 논문을 마치고 처음으로 ‘경험 쌓기’로 도전해본 일이 큐레이터였다”며 "미술이 좋아서 시작한 공부고 일이다 보니, 덕업일치(좋아하는 것과 직업이 일치한다는 신조어)라 만족하며 큐레이터를 하고 있다”고 했다.
 
미술은 아는 것만큼 느끼는 것도 중요하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어떤 작품이 봤을 때 즐겁고 재미있는지를 느끼게 되면, 자연스레 찾아보게 되기 때문이다. 오 큐레이터는 “감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벽을 만드는 것”이라며 “작품을 누가 그렸는지나 왜 그렸는지도 중요하지만, 그것부터 알려고 하다 보면 미술에 대한 관심을 이어가기 쉽지 않다"고 했다.
 
이병준 기자 lee.byungjun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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